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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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헤르타 뮐러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느낌은 비슷할 것이다. 어.렵.다. 

  

1984나 동물농장,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수용소 군도 등 독재와 억압 등의 사회현실에 저항하고 고발하는 문학은 흔히 그 상황에 대한 담백한 혹은 장황한 묘사나 비유와는 상관없이 그 이야기의 진행과 언어의 선택은 상당히 담백한 상태로 진행되어왔던 것이 보통이다. 그러한 소설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헤르타 뮐러의 이야기 속 선택된 단어와 단어들의 만남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다.

특히 그녀가 루마니아의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글쓰기 때문에 수많은 곤욕과 어려움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미리 접한 독자들은 더욱 우리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글 속에서 어디로 어떻게 노를 저어가야 할지 몰라 지도와 나침반만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와 그녀의 작품 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들춰내본 여러 기사들 속에 꼭 빠지지 않고 있는 단어와 문장들이 있었다. 바로 시적인 표현, 간결한 문체, 처참한 현실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문장과 상징....

그녀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문학은 극히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온갖 술수와 방법을 동원해, 하나의 문장, 하나의 인물, 하나의 상황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많은 매체에서 루마니아 독재체제의 참혹한 현실과 그와는 선뜻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문장들, 그 아득한 차이의 무게만큼이나 공포와 불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의 언어로 적혀있는 참담한 현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실 그녀가 고발하고자 하는 상황은 어찌 보면 어느 나라나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그리 특수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그러한 시기를 30년 이상 겪었고, 북한은 3대째 차우셰스쿠가 꿈꾸던 현실 속에서 목숨을 건 탈주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잡히고, 죽고, 탈출하고 있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던 시기를 살아왔던 것처럼 루마니아의 사람들 역시도 그러한 시대를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심지어 그때가 더 좋았다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말이다.

이런, 어찌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 우리의 가슴에 더 묵직한 무언가를 던질 수 있는 것은 흔히 말하듯이 사랑과 희망을 얘기해야 하는 언어로 절망과 죽음, 공포를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그 대비를 담아내는 문체와 문장과 단락과 소제목의 간결함에 대해, 헤르타 뮐러가 자신의 이야기를 응축하고 담아내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주목해보고 싶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슈바벤 마을에 사는 빈디시 가족이 루마니아를 떠나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기 위한 사투를 담담하면서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빈디시는 여권을 얻기 위해 밀가루를 바치고, 돈을 바치다가, 급기야 딸의 존재와 자존까지 팔아치웠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그와 그녀의 가족은 약 150페이지의 기간동안 그 모든 것을 바치고, 버리고 마침내 작은 여권 하나를 얻어낸다.

그 이야기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끄집어낸다.

빈디시와 그의 죽은 옛 연인. 카타리나와 그의 옛 남자.  아멜리에와 그의 남자친구.
마을의 야간경비원, 목부, 목수와 크로너 할멈, 모피가공사와 유리기술자 루디, 애벌레 할머니. 신부와 경찰, 우편집배원 여자...
올빼미와 사과나무, 황금지빠귀와 파리, 목걸이의 십자가와 하얀 나비.

가장 긴 문장조차 열 단어, 이 작은 책의 한 줄조차 넘지 못하는 문장들을 가지고, 한 챕터가 채 두 세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은 그 단락들을 가지고 그녀는 이 많은 것들을 담아낸다. 그녀는 이 짧은 단어들과 문장들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 넣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들었던 것, 만지고 느꼈던 것, 생각했던 것, 고민했던 것, 지나온 지금의 회한과 후회,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었던 것, 지금까지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까지.

그런데 다 담아지지가 않는다. 그녀의 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 데 그녀가 겪었던 모든 것들, 말하고 싶었던 것을 다 풀어내어야 하는데 그것들이 단지 글이라는 방법 하나로는 모자랄 뿐이다. 손짓, 발짓, 텔레파시까지 모두 동원해도 모자를 것만 같은 것을 단지 글로 보여주기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의 언어를 택했다. 다 담아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넘치게 하리라.

가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분위기와 아우라 앞에서 압도당하는 작품들이 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보고나면, 읽고나면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어찌할 바 모르는 그런 작품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올빼미일 뿐이다, 그저 파리가 앉아있는데, 단지 자전거가 지나가는 데 그 문장의 휩쓸림에 함께 호흡하며 숨죽이며 빨려 들어간다. 마치 공포영화 속 한 장면, 적막한 서늘함 속에서 다음에 어떤 것이 튀어나올까 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이 활자로 독자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녀를 넘쳐흐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들이, 그 공포와 불안과 가슴속 치미는 먹먹함과 뱉어내지지 않는 하나의 버찌씨가 그 단어와 문체의 간결함 속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책 밖으로, 우리의 눈 속으로,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녀의 담아내는 작업은 그녀가 느꼈던 감정과 체험을 넘쳐흐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녀가 시의 언어를 쓰는 것은 상황과 상황의 대비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가 겪었던, 느꼈던 숨 막힘을 글로는 그 전부를 표현할 수 없다. 단지 그 숨 막힘을 전달하는 도구로 글을 이용할 뿐이다. 글은 그녀의 숨 막히는 먹먹함을 그대로 알려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그녀의 잔을 작게 만들었다. 단어와 문장이라는 잔속에서 그녀의 먹먹함을 그 안에 다 채우지 못 할 바에야, 더 많이 담고 더 많이 넘쳐흐를 수 있도록. 담고 넘쳐흐르게 하고, 잔을 넘어뜨렸다. 그녀는 더 많이 넘쳐흐르게 하기 위해서 점점 그녀의 잔을 작게, 투명하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느꼈던 날것의 생생함, 생생함을 넘은 헐떡거림을 전달해 주고 싶어서. 그녀가 사용하는 시의 언어는 그 사랑과 희망의 대비 뿐 아니라, 그녀가 담아낸 것들을 더욱 잘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그녀의 작품 속 많은 인물과 사물은 그녀가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하나하나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다 소중하다. 그녀는 하나하나의 인물들에게 모두 자신을 다 쏟아내었다. 크로너 할멈의 죽음도, 사과를 집어먹는 사과나무도, 올빼미와 황금지빠귀도, 빌마의 머리 속을 휘젓는 흰 나비까지도. 그녀는 그 하나하나에 자신을 다 담아내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 잔을 넘쳐흐르게 하고 넘어뜨린다. 그녀들이 우리에게 더욱 생생히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담아냄이 중요하다. 담아내고 남은 것의 넘쳐흐름은 우리를 점점 죄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넘어뜨린 잔 속 그 생생함에 압도 받으며 이야기의 마지막을 덮어낸다. 글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를 옭죄어오는 것들이 하나하나 많아지고 그만큼 그녀와 동화되어 숨 막히고 흐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녀의 작품은 어렵다.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 등장인물은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를 떠올릴수록 우리는 점점 그녀를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낯설어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그녀가 만들어낸 그녀의 모습들 하나하나를 쓰다듬고 보듬는 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 하나의 단어, 인물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또 하나의 그녀를 만들어낼만큼의 노력을 했을테니 말이다. 다만 그녀를 따라갈 수 없는 그저 그녀를 따라가보고 싶어만 하는 우리들은 그녀를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 넘쳐흐르는 것들, 하나하나의 그녀들과 함께
숨 막히고, 힘들어하고, 흐느끼고, 두려워하며
빈디시가 여권을 타내기 위해 했던 자존의 부정만큼이나
뱉어내어지지 않는 버찌씨를 뱉어내보려 노력하며 순순히 압도당하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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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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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여라. 그래도 삶은.

지금 나는 어느 한 시골 마을의 보건지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군복무 대신에 한의사로서 시골 보건지소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충청남도의 한적한 시골 어딘가. 이 곳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연스레 할머니, 할아버지들일 수밖에 없다. 60대조차 찾아보기 힘든,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나도 자연스레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저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처럼 철이 없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후회? 만족? 보람? 두려움? 초탈?”
물론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겠지만 조금의 힌트를 <올리브 키터리지>가 내게 던져주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미국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그 마을에 사는 올리브 키터리지 본인의 이야기들, 올리브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단편의 형식으로 담백하게 묶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헨리 키터리지의 아내. 지금은 은퇴한 학교 선생님. 족부의학 전문의 크리스토퍼 키터리지의 어머니. 흔히 말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기가 센, 약간 한 성격하는 평범한 여자.


조금 강한 성격으로 아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랑한 탓에 아들과의 관계가 조금 원만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그것마저도- 흔히 볼 수 있는 황혼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야말로 내 진료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할머니(라고 하면 왠지 혼날 것 같은.)


이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소설은 그의 남편, 그의 아들, 그의 이웃 사람들, 자살을 결심하고 마을에 돌아온 그의 제자까지.. 그 외연을 넓혀가며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주목하고 파고 들어간다.

조금 심심하다 못해 섭섭하기까지 할 정도로 양념을 치지 않은 담담한 이 소설이 결코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랄 것만 같은 이야기.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스펙타클 충만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이 소설의 미덕은 마을 사람들의, 암만 들어도 스펙타클하진 않지만 당사자에게만큼은 꼭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이야기, 내 안에만 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울컥울컥한 감정을 소설에 담아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 또한 느꼈던 그 감정을 격발시키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하나의 절정이 없다. 책 전반에 흐르는 발단도 없고 전개도 없고 절정도 없으며 결말도 담아내지 않는다. 대신,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발단이요 전개요 절정이다. 그러나 역시 하나하나의 이야기에도 결말은 담겨있지 않다. 절정과 ‘그리고’ 가 담겨있다. 이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결말은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결말은 없다. 우리를 거쳐 가는 소소한 이야기들 속. 발단과 전개와 클라이막스 속에서 우리는 다시 또 다른 소소한 사건의 발단과 전개와 절정을 만난다. 그것들이 쌓이고 또 쌓이고 굴러다니고 이리 엮이고 저리 엮이면서 우리네 삶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그 삶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소설의 모든 페이지를 다 넘겨내어도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하나의 삶이다. 살아있음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찬란함을 뿜어내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찬란한 때는 무엇일까.
청춘. 청춘이 왜 청춘일 수 있는 것일까.
사랑. 

작가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책의 처음도 사랑이요, 마지막도 사랑이다.

평생의 결혼생활. 아무리 서로 평생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사랑은 누구냐 라고 할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서로의 배우자를 말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무엇이었구나. 라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 그리고 그 자체로서 삶의 당연함. 

남편을 보내고 홀로 남은 올리브 키터리지. 그리고 평소에 재수 없는 영감탱이라고 생각했을 뿐인 마을의 잘 알지 못하는 노친네 잭 케니슨. 둘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친해지고, 또 서로 친해지고 싶어 했으며,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아낄 것이다. 또 한사람이 남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지 않더라도, 찾는 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찾아질 것이다. 또 친해지고 또 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음이라는 것의 증명이니까.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p483

그래서 인생의 모든때가 청춘이요 아름답다.

나는 그네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그때도 철이 없을 것이며,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책장에 놓아두고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여전히 기계치일 것이며, 어쩌면 그때까지도 환자를 보며 환자가 너무 많다고 투덜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삶은 이것들의 연속일 것이다. 발단 전개 절정, 발단 전개 절정. 그리고 그래서 그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이 끝난 다음에야 이 것들의 결말이 한번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직은 생각하기 싫지만 말이다.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안할 수야 있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삶의 일부분인 것을. 


찬란하여라.

그래도 삶은.

아직 살아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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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1 -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1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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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전국 이야기> 그 시작의 재기와 호기로움이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며 

 

상당히 기대되는 책이 나왔다.

<춘추전국 이야기>

소설로만, 제자백가의 이야기들로만 접해져왔던 춘추전국시대에 대해

자세히 돌아볼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 책은

시작부터 그 구성이 마음에 든다.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이라는 1권의 제목만 보고 자칫 짐작했던 그 시작과 다르게

1권의 시작은 가히 12권 시리즈의 시작으로 손색이 없으며

그동안 보았던 한 시대를 통째로 개괄하는 시리즈물들에서 보기 힘들었던(물론 내가 이런 시리즈물을 본게 많지는 않다)

재미있는 열림이었다.

 

열두권의 시리즈물의 시작답게

역사에 대한 관점부터 <춘추전국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의 대강,

춘추전국시대를 이루는 시대적 배경과 동시대의 페르시아, 로마 제국과의 비교를 통해

당시 중국 문명의 양과 질을 가늠한다.

 

그 이후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전, 중국이라는 역사의 시작과 주나라까지의 이어짐을 개괄한 후

동주 춘추시대의 개막과 함께 진정한 '춘추전국'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약 150페이지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가 갖는 의미, 오늘 날 중국 영토에 비해 그저 중원의 조그마한 나라였던 상나라,주나라에서

현재의 중국영토에 비해 크게 손색이 없는 지역까지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되게 만든

그 원형의 의미를 가지는 춘추전국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부분은 이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값어치를 다하고도 남음이다.

 

특히 그중의 백미는 작가가 춘추시대, 아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서술이다.

 

우리는 현대인의 지혜를 가지고 고대를 상상하되, 고대를 마음대로 비틀어서는 안된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일 뿐, 상상에 의해 바뀌어서는 안 된다.역사적 사실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그 많은 사건들을 기억하며 역사를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낫다. 그러나 역사를 다룬 많은 저작들이 이런 우를 버한다. 그래서 역사를 마치 개인들의 무용담이나 민담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고 원인과 결과가 아래 위도 없이 춤을 춘다.(춘추전국 이야기 1권 p60)

 

예를 하나 들어보자. 금속, 용제, 촉매 세 가지를 가지고 실험실에 들어간다. 금속을 어떤 용제에 넣었더니 녹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촉매를 넣었더니 금속이 녹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촉매가 금속을 녹이는 것인가, 용제가 녹이는 것인가? ..... 여기서 금속이 녹는 것은 역사의 사건이다. 그리고 용제는 그 사건이 야기된 원인이다. 이때 촉매는 사건이 야기된 계기일 뿐이다. (춘추전국 이야기 1권 p60)

 

 

작가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인물 중심이 아닌 그 시대가 만들어낸 흐름들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관점은 무의식적으로 역사를 주인공들만의 역사로만 생각하는

나를 포함한 일반 독자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재미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 99%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게,

작가의 역사에 대한 관점과, 그 당시의 의식주까지도 개괄하고 넘어가는 이 시리즈의 시작은   

앞으로 작가가 이러한 초심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구상했던 것들을 흔들리지 않고 이어나가 매듭을 짓는다면

중국에 놓아도 충분히 자랑할만한 대중역사 시리즈가 되리라는 강한 의지를 남겼다.

 

 

2. 관중, 2500년을 연 사나이. 그의 진정한 위대함.

 

1권의 후반부, 드디어 포문을 연 <천추전국 이야기>의 첫번째 주인공은 관중이다.

물론 작가가 밝힌대로 역사에서 주인공은 촉매제일 뿐이지만 그 촉매제가 없으면 금속이 녹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이 분명 시대의, 역사의 요구임에 불구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만들고 이리저리 휘젓는 것은 역시 주인공들의 몫이다.

 

제환공을 도와 포숙, 습붕과 함께 춘추시대의 첫번째 패자 제나라를 만들어낸 관중.

관중의 위대함은 첫번째 패자를 만들어낸 그 공적보다

2500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시초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 느낀 관중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의 인간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관중은 나라의 핵심을 백성,즉 사람으로 보았다.

왕도 아니요, 제도도 아니다.

백성들이 일단 잘먹고 잘살아야, 그들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나라가 세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분업이론에 의한 행정을 펼쳤고, 현재의 자유시장경제 이론에 해당되는 경제정책들을 펼쳤다.

물론 이는 제나라라는, 현재로 치면 미국에 해당하는, 강대국의 재상으로서 당연히 펼칠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을지라도

일단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그의 생각이 확고부동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관중은 비록 법가의 시초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는 한 개인으로는 자유주의자였던듯 싶다.아니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인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군주란 백성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그리고 군주 또한 결단력과 행동이 중요한 것라며 주군의 소소한 욕망은 건드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백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지금도 일깨워줄수 있는

진정 제갈량이 비견되기를 원했을만한 위정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위대함 중 한가지는 그의 정치철학

법을 통한 통치와 그 법의 명명백백함이다.

관중이 생각한 가장 좋은 정치는 법의 명명백백함이다.

또한 이는 그가 만들어낸 책임과 권한의 명백함이기도 하며

국제정치에서 보여준 신뢰의 모습이기도 하다.

 

백성이 모르고 죽을 죄를 지었으면 그것은 법을 알리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

백성이 죄를 지은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그야말로 법의 명(明)백(白)함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명백함의 기준을 따로 두지 않았다.

군주의 누이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면 처형했다.

위에서 법을 지켜야 아래도 법이 지켜지기 마련이다.

백성들은 같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는 반면에

고위공직자들은 청문회에서 죄를 지었음이 밝혀져도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죄송하다 만 되풀이하면

오히려 더욱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과연 이런상황에서 대통령이 말하는 법치 운운을 누가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법치란, 국민들을 법이라는 테두리로 가두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법을 통해 보호하고 그 기준을 자신들로부터 세우는 것이다.

이 법치라는 단어가 잘못쓰이고 있는 어느나라의 현실이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씁쓸해진다.

 

 

 

3. 새로운 이야기의 서막. 여행의 시작

 

관중이 죽고 제 환공은 더 이상 총명한 군주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간신들의 손에 휩싸여

나라를 망친다.

그리고 춘추시대의 첫번째 패자를 칭했던 제나라의 몰락과 함께

호시탐탐 중원을 넘보단 초나라와

서방에서 이민족과의 전쟁 속에서 그 힘을 키워오고 있던 진(秦)나라

그리고 2권의 주인공인 진(晉)나라의 문공까지.

 

춘추시대의 구조를 만들어낸 관중의 뒤를 이어

진정한 영웅들의 탄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수백년을 이어온 난세 중의 난세.

지금껏 소설이나 제자백가로만 알아온 

춘추와 전국.

지금의 중국을 탄생시킨 그 태초의 화염.

수천년을 이어온 그 질긴 불꽃 속으로 함께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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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정원 - 어느 미술사가의 그림 에세이
정석범 지음 / 루비박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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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으면서 가장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장르가 에세이이겠지만

반대로 글을 쓸 때는 가장 어렵게 어렵게 펜을 들어야 하는 장르가 에세이가 아닌가 한다.

(물론 어떠한 글 하나하나가 쉬이 쓰여졌겠는가.)

 

남의 생각을 이렇게 쉽게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남의 생각을 글로 적어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일테니까.

생각이 뛰어난 사람은 많겠지만 그 생각을 남에게 뛰어나게 전해주는 능력과 노력은 또한 별개의 것이니.

 

특히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소재로 자신의 생각뿐 아니라

어떠한 작품을 소개시켜주는 에세이의 경우에는 그 능력과 노력이 어떠할지는..

 

어느 미술사가의 그림 에세이<아버지의 정원> 역시 그러한 노력이

알알이 박혀있는 작품이다.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간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미술작품에 더욱 쉽게 다가가는 효과는 충만하다.

또한 그림을 보는 눈이란 전무한 독자에게 그림을 바라보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어렵지 않게 보여줌으로써

그림에 다가가는 방법 또한 살짝 눈을 틔우게 한다.

 

그런데, 보통의 이런 작품소개를 곁들인 에세이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작가는 어린 시절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니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소재로

이야기와 그림을 촘촘히, 혹은 얼키설키 매듭지으며 유년시절의 추억과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작가는 분명 그림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림 이야기보다도 작가의 이야기가 먼저 들어온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어느 미술사가의 그림 에세이'라기 보다는

서문에서 작가가 밝힌대로

'어느 미술사가의 그림을 통한 유년시절 추억 완성기'가 더 어울릴 듯 하다.

 

그래서 조금 애매모호하다.

형식상의 주인공은 그림인데

내용상의 주인공은 작가이다.

 

충분히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글과 그림의 결합이지만(그래서 더욱 아쉽다)

그 결합의 방법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에필로그를 표현한 방법대로(이 책의 백미는 에필로그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을 그려나갔다면 독자들에게 그림의 감동과 함께

작가의 내면 돌아보기, 나아가 우리들의 유년시절까지 돌아보게 만들

추억까지 선물했을 것이다.

 

좋은 글, 좋은 그림. 그래서 아쉽지만

그 아쉬움의 공간만큼 기대가 채워진다.

 

늦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배워온 그림들과 함께

어느 미술사가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드디어 완성시켰다.

그림을 통해 아름답게 부활한 그의 유년시절 너머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될 그의 그림이야기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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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제국 가야 - 잊혀진 왕국 가야의 실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작년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화와 같은 인기와 더불어 그 당시 신라시대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급 높아지게 되었다.

미실, 사다함, 비담, 알천, 미생....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이름들이 드라마와 함께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 드라마가 정사를 그대로 담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러한 드라마들이 한국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는 신라에 이어서 가야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이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방송 역사상 최초로 짐작되는 가야 역사에 대한 드라마.
당연하다.
우리는 심지어 국사시간에도 가야에 대한 부분은 어물쩡 넘어가고 말뿐이니까.

 
가야.

이 드라마가 방송되기 이전. 혹은 이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야라는 나라는 그저 신라와 백제사이에 껴 있는 지리적 위치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신라에 먹혀버린,
가야왕국의 유명한 인물이라곤 김수로 왕이 전부인,
중앙집권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합의 형태로 나라가 존속되었던 고대 국가.

이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가야가 드라마의 영향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동기가 어찌되었던 간에 반가워할만한 일이다.
더불어 출판가에서도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늘어나고 있다.

 
역사의 아침에서 나온 <철의 제국 가야> 역시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야의 탄생과 철기 문명에 포커스를 두고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철의 제국 가야>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야왕국의 탄생에 대한 부분과
가야 왕국의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포함한, 가야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볼수가 있다.

 
1장 토착세력, 2장 김수로 집단, 3장 석탈해 집단, 4장 허황옥 일행에 대한 부분에서(각 장의 제목이 이렇게 재미가 없지는 않다)
가야라는 나라가 김해지방에서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면,

5,6,7,8장에서는 가야라는 나라의 생성이 갖는 의미와
그들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철기라는 문명을 토대로 주변국가와 어떤 관계설정을 주고 받았는지,
그럼으로써 어떤 국가를 세웠는지와 어떻게 멸망했는지까지를 다루고 있다.

 
가야사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어찌보면 가야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가장 궁금한 부분인 국가의 건립에 대한 부분,
가야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한 부분이 자세히 나와있어서
오히려 일반 독자가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 접하기에는
더욱 좋은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좋은 입문서이다.

 
특히 책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한가지 사실.
대한민국은 단군으로부터 이어져온 하나의 민족이다 라는  

그릇되고 허황된 진실에 대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부분은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밝히는 부분은 서문이 전부이지만
이미 가야라고 하는, 당시의 다민족국가의 얘기를 통해서
우리는 충분히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국가라는 그릇된 인식을 깨어낼 수 있다.

 
애국심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애국이 다른 나라에 대한 모(侮)국이 되어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애국과 타국에 대한 모국은 분명 다른 얘기이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이 책에서 느껴지는 가야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다시금 짚어볼 수 있으며
그 부분에 대한 역할만 하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고대사를 단순히 한반도로 그 범위를 묶지않고
한반도의 역사가 유라시아의 역사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왔고
그에 따라 한반도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해서 폭 

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한 점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주로 외교라는 부분으로만 역사속의 관계를 한정해왔던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역사책의 관점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도 민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역사적 귀결을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전하는 부분은 위에 언급한 단일민족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이 책의 백미로 꼽는 부분이다.

 

물론 책에 아쉬운 부분도 존재한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흐르는
'대한민국의 고대사는 위대하다' 기조이다.
책에서도 물론 조심스레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수로가 김일제, 왕망의 후손이라고 추측하는 부분 - 물론 추측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
가야가 건국 초기에는 신라의 상국이었을 것이라는 점
가야세력이 후에 신라를 지배했으니 가야와 신라가 합해져서 삼국통일의 역량을 발휘했다는 등의 부분에서
가야가 이렇게 대단한 나라였으니 모두 놀라시고 경배하라~ 라는 분위기가 행간에서 읽힌다.
물론 실제로 그러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와중에 한가지 거슬리는 점은 가야를 내세우기 위해 다른 부분들을 깎아 내리는 듯한 느낌이 조금 아쉽다는 것이다.

 

철의 제국 가야.
가야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건국 과정에 허황옥, 석탈해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석탈해는 어찌하다가 가야에서 신라로 가게 되었을까.
가야는 왜 철의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가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까.
정말 김수로왕의 아들 딸이 일본으로 가 나라를 세웠을까.

 
우리는 가야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다.
실제 역사학적으로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몇년도에 어떤 일이 있었고 가야에 어떤 왕이 있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야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였는지, 우리의 역사에 가야라는 왕국이 생각보다 의미심장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
그리고 가야라는 나라를 통해서, 우리의 단일민족 역사관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철의 제국 가야>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일반 대중들이 가야에 대해 다가가기에
좋은 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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