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books |
2016.11.15 |
|
|
|
서양미술사의
그림
vs 그림
김진희
|
비슷해 보이는 그림 두 장을 나란히 제공한다.
전문비평인의 평을 듣기에 앞서 독자 나름대로 감상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부여한다.
독자와 예술가의 작품 외에 전문비평가의 선입견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감상할 시간을 주고 있다.
화가명도 없이 제작시기와 제목만이 주어진다.
한
페이지에 그림 한 장씩 두 페이지에 비슷해 보이는 다른 작품 하나를 나란히 배치해서 작품을 더 잘 보이게 한다.
명화를 많이 접한 사람들은 그림만으로도 누구의 작품인줄 알겠지만 나와 같은 일반독자는 블라인드테스트처럼 작품을 먼저
바라본 후 저자의 비평을 들어 볼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난쟁이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왕자>와 앙리 루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는 모두 2인 초상화 형식인데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선 왕자를 돋보이기 위해 난쟁이 하인을 루소 자신의 초상화를 돋보이기
위해 여신을 함께 등장시킨다.
고귀한 왕자의 핏줄을 돋보이기 위해 당시엔 기형적이고 열등한 비교
대상을 초상화에 함께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벨리스케스의 작품에선 난쟁이의 모습이 전혀 열등하거나
하찮아 보이지 않는다.
명화라기 보다는 그림책에 나오는 일러스트처럼 보이는 앙리 루소의
작품은 제목을 알지 못하면 영감을 주는 뮤즈인지 모를 만큼 아름답지 않고 뚱뚱하며 전체 그림은 평면적인데 모델의 실물과 똑같이 그리려는 노력과
달리 그의 작품은 실물과 닮지 않고 화면 구성요소의 밸런스도 맞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요소들로 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풍속화처럼 서민들의 일상을 담을 그림을
서양미술사에선 <장르화>라고 하며 네덜란드
장르화는 보여지는 것 이면의 교훈이나 상징처럼 숨겨진 의미도 있다고 한다.
<포도주 잔을 든
소녀>의 창분 부분의 그림을 잘 보면 양손에 직각자와 굴레를 각각 들고 있는 여인을 통해
포도주의 단맛과 음주를 경계하는 절제를 <뚜쟁이>
란 작품에선 매춘의 한 장면을 통해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탕자 이야기”와 연관된 종교적 의미와 함께 악덕을 비판하는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만 보면 그런 교훈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색유리창의 그림도 말해줘야 알 수
있다.
<포도주 잔을 든
소녀>는 관람자를 의식한 듯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17세기 일반 가정의 한 장면이라며 <카페에서>는 19세기 카페의 황금기였던 파리의 도심의 카페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근대 생활의 화가인 마네의
<카페에서>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도시 파리의 사회를 보여준다.
말하는 그림 vs. 보여주는
그림
<사려분별의
알레고리>에선 노인, 중년, 청년의 세 얼굴이 한 화면에 담겨있고 <찰스 1세 삼중 초상화>는 찰스
1세의 방향에 따른 세 모습이 나타난다. 세 얼굴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사리분별의 알레고리>에서 알레고리란 제목에서 짐작하듯
사람의 세 단계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고
기억, 지성, 예지라는 인간의 세 미덕과 대응된다. 본문 187쪽 인용
과거에서 배워서,
현재에 현명하게 행동해야, 미래를 그르치지 않을 수 있다 본문 187쪽 인용
<사리분멸의
알레고리>에선 말하려는 상징이 숨겨져 있고
<찰스 1세 삼중 초상화>는 찰스
1세왕의 세 모습을 말 그대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간에
다른 방향을 응시한 찰스 1세를 그린 후 한 화면에 조합한 듯 입은 옷 색깔도 다른 점이
흥미롭다.
감상
감상자가 할 일은 작품의 뒤를 캐고 주변을 둘러봐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 주는 것이라 작품 앞에서, 그 표면에 시각을 집중하여 예술가와 동등한 자격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이주헌의 추천
글에서
적어도 나는 예술가와 동등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림에 전문적인 평을 하는 전문비평가와 달리 순전히 사적인 감상자의 눈을 통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즐겨도 무방하지만 딱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림에서 보여주는 내용들을 다 보고 있지 않았다.
저자는 치밀하게 비슷한 구도의 그림들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작가들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들을 함께 제공한다.
명화의 양보다는 명화를 깊게 볼 수 있는 도상학적 비평과 서양미술을 통해 서양 역사의 흐름을 읽어내는 지적인 순간을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