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엮음 /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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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대전에서 졸업한 토종 대전 사람으로, 취업을 위해 상경한 서울생활이 어느덧 15년이 되어 갑니다.​

그 동안 서울에 살며 또 직장이 서울이어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며 많이 정이 들었는지 서울하면 왠지 제2의 고향같은 느낌이 듭니다.

첫 서울 생활은 올림픽공원과 석촌호수 사이 방이동에서 시작했습니다.

반지하 원룸에서 첫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벚꽃 만개한 석촌호수를 걷기도 하고, 올림픽공원에서도 데이트를 하곤 했습니다.

방이동에서만 7년여를 살면서도 한강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는데........ 서울을 떠난 지금은 한강을 가로질로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방이동 첫 직장을 퇴사하고 분당 미금역 근처의 회사로 이직하며 점심시간을 이용해 탄천을 걸었습니다.

처음으로 이직한 스트레스와 새로운 직장 분위기에 적응하려 참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몇 년 근무하며 직급도 올라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계속되는 새로운 업무와 직무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몸무게가 무려 8kg이나 늘어났지요.

더 이상은 안되겠다 생각이 들어 점심시간에 김밥 한 줄을 사서 무작정 탄천을 걸었습니다.

한 2년 정도 탄천을 걸으니 허리 사이즈가 36 -> 32로 줄어드는 엄청난 다이어트 효과를 볼 수 있었죠.

 탄천을 6년여 동안 걷다가 양재천이 있는 서울로 다시 이직을 했습니다.

이때는 수족냉증이 심해져 걷지 않으면 차가운 발로 여름에도 등산 양발을 신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 이직에 따른 스트레스와 사장과의 의견 차이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 양재천을 걸으며 마음을 진정하곤 했습니다.

​4년 여를 걷다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또 이직.

 이번에는 성수동으로 이직했다 또 다시 성북천이 있는 용두동으로 이직했습니다.

성북천을 따라 걷다가 업무 상 은행에 갈 일이 있으면 청계천을 이용해 동묘쪽으로 걸어가며 물고기를 보는 재미도 톡톡히 느낍니다.

이렇게 제 생활 주위에 강과 개천을 이용한 걷기를 통해 스트레스와 잡념을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며 서울에도 많은 개천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보며 청개천만 하더라도 그 지류가 17 개나 된다는 정보에 깜짝 놀랐습니다.

대부분의 지류가 복개도로가 되다 보니 지금은 그 형태나 위치를 알아 볼 수 없다는게 참 아쉬운 일입니다.

혹시 오늘도 당신이 지난 그 도로가 예전에는 아름다운 물이 흐르던 개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강을 가로지르는 현재의 다리들 대부분이 예전에는 배를 건너기 위한 나루터 였다는 사실도요.

이 책은 서울 한강의 지류와 근처의 유적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서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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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림 Do Dream - 영웅들의 성공 비밀
MBN Y 포럼사무국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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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 열풍 이후 우리나라에도 자기개발 서적이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실행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죠?

로또 1등 당첨을 꿈꾸고 간절히 원하고 소원하더라도 단 돈 1천원을 가지고 복권방에 가지 않는다면 당첨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이 책에서도 갈망-생각- 실행의 두드림을 통해 꿈의 성취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 목록까지 만들어 긍정의 마인드를 장착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꿈이란 더 간질히 원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허겁지겁 달리면 숨이 차고 힘들어서 주변을 볼 여유조차 없다. 성취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면 주위에 있는 꽃처럼 아름다운 것들, 보살펴야 할 것들을 잊고 지나치게 된다. 목표를 향한 두드림의 여정을 이어갈 때는 너무 숨차게 달려가서는 안된다. 인생은 42.195km의 마라톤이다. 마라톤에서는 1등으로 출발한 사람이 꼭 1등을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며 한번은 들어봤을 이야기 들이지라 식상하지만, 가슴 속에 무언가를 향해 다시금 달려갈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불씨 하나를 ​지펴봅니다.

그 작은 불씨가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꿈꾸며 잠자리에 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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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28
김도형 지음 / 역사공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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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책을 통해 유년시절부터 의거일까지 자세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이 책은 의거일까지 부분이 설명이 조금 빈약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의거일 이후 부분을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동경의거 전 국제정세]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으로 한중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사건을 일제가 부풀리고 허위선전하여 한국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당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있는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 장교들이 유조호부근에서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 노선을 폭파하고는 중국군과 비적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이로써 남만주철도 노선상의 전략 거점들을장악하는 만주사변으로 발전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국제연맹에 원상복귀를 요구했으며,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이사회의 특별위원회가 소집되어 점령지 철수를 결의하였다. 국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고조되었으나, 일본은 여론을 조작하여 관동군을 지지하고 중국과 서양을 비난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국수주의적인 정우회가 차기 내각을 맡아 천진에 2개 대대, 만주에 1개 여단을 추가 파병하고 금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일왕 히로히토는 1932년 <군인칙유 50주년 기념일에 육해군에 내리는 칙어>를 발표하고, 나흘 후 <관동군에 내리는 칙어>를 통해 관동군이 "황군의 위력을 나라 안팎에 선양했다"고 칭송했다. ​

​[국내외 반응]

 이봉창은 거사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 방에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폭탄 한개와 도쿄지도, 현금 등을 내놓았다. 일제는 이 의거를 즉시 '불경사건'으로 규정하고 일절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도쿄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정으로부터 취조가 시작됐다. 또한 이봉창의거 관련하여 보도를 금지하고, 특히 범행장소, 폭탄 작렬사실 등은 절대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의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왕을 목표로 하였기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는 '무서운 전파력'으로 퍼져나갔다.

 이봉창의거에 가장 긴장한 것은 물론 일본정부였지만, 이에 못지 않게 민감하게 반응한 측은 일제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세력들이다. 의거 이후 이들은 일왕을 대상으로 의거를 일으킨 인물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라 자신들의 입장이 난처한 지경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의거 발발 직후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곧바로 일왕을 찾아갔으며,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상애회의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한 여러 고위층을 방문하여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데에 송구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9일 친일단체 상애회 회원 120명을 소집하여 궁성 입구니쥬바시에 도열하여 사죄하였다. 국내에 있던 친일세력들은 동민회를 중심으로 1월 9일 한상룡, 박영철, 신석린, 조성근, 김명준, 민대식, 박승직 등 35명의 친일파들이 사죄의 ㄸ스으로 근신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봉위문'을 전보로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조선총독 등에게 보냈다.

​[조작된 신문조서]

​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체포된 이래로 6월 27일까지 9차례에 걸쳐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아야만 했다.

1회 신문은 이름, 나이, 직업, 주거, 본적 및 출생지 등 신상을 확인하였고, 2회 신문은 1월 11일 진행되었는데, 일왕의 목숨을 빼앗을 심산으로 거사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1월 12일 3회 신문에서는 죽을 각오로 일왕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였지만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6회 신문에서는 한국독립을 바라게 된 과정을 말하면서, 자신이 결행한 거사가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실행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7회 신문에서는 한민족이 전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 거사를 결행한 사실을 강조하였다.

9회 신문은 6월 27일 진행되었는데, 이봉창의 진술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8회까지 진술과정에서 한번도 본명을 거명한 적이 없는 '김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한 점이다. 그런데 이봉창이 김구를 지칭한 것은 오직 한 번뿐으로 진술 뒷부분에 가서는 다시 '백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계속되는 신문조서에 나타나듯이 이후에도 '백정선'이란 호칭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9회 신문조서의 내용은 이봉창 본인의 진술이 아니라 일제가 위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실수로 추정된다.

​[사형집행 과 진상 발표]

​ 1932년 10월 1일 이봉창의 사형언도가 되었다. 그리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9월 28일 의거의 경위와 의의, 이봉창의 생애와 약력 등을 담은 장문의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10월 9일 중국통신사에 보내졌고 각 신문사에 배포되어, 15일자 상해의 '신강일보'와 남경의 '중앙일보'에 게재되어 중국인들에게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켰으나 애석하게도 국내신문에서는 그 내용이 전혀 게재되지 못하였다.  ​

[상해사변]

 ​'동경의거'가 일어난 그날 저녁 도쿄에서 발신된 통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 각 도시의 신문은 바로 다음 날 한결같이 이봉창 거사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기관지 성격을 지닌 상해판 <민국일보>는 1932년 1월 9일자에 "한인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적중하지 않았다.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 부차가 조금 터졌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이 표현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폭탄이 일왕에게 적중하지 못하여 매우 안타깝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봉창을 '지사', '의사' 라는 표현이 일제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국 신문들은 이봉창의거에 동조하는 논조를 보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심양에서 '유조호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금주를 비롯한 중국 각 지역으로 침략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신문의 논조가 이봉창의거에 더욱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되어 있던 한중 간의 관계가 이봉창의거로 인해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

 상해의 <민국일보> 보도 후 상해 거류 일본인들은 "불경하지 않은가"라며 소요를 일으켰고, 상해주재 일본총영사는 상해시장 오철성에게 사과와 정정보도,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항의서를 보냈다. 이에 상해시장은 모욕의 뜻은 없었다고 답신하였지만 민국일보 측은 일본총영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게재하며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 이런 중국의 반응에 대해 일본영사관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지방장관의 사과, 신문사장의 사과 ,책임자 처벌, 신문사 정간 또는 폐간, 재발방지 보장 등을 구두 또는 공문으로 요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하게 난동을 부린 곳은 청도이다. 청도의 일본총영사는 <민국일보>가 이봉창을 '의사'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있고 내용이 불경하다고 강력한 항의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1월 12일부터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고, 민국일보사에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한 것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시당부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민국일보>사건이 진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국제도시 상해에서는 시민 항일운동과 항일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이를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역이용하기로 한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두 명을 포함한 일본인 다섯 명이 중국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을 날조하였다. 다음 날 진상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거류민대회를 열어 범인 체포와 손해 배상, 일본에 사과할 것을 결의하여 상해시 정부에 결의문을 전달하였다.

그 후 1월 20일 새벽 일본인 5~60명 정도가 중국인 습격하여 삼우공사 공장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또한 오후 6백 명의 거류민들이 무기를 들고 중국인을 모두 죽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여 상점을 파괴하고 중국인을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중국 내 반일 감정을 역이용 하기 위해 일본은 1월 24일 시게미쓰 마로루 일본공사 공관에 불을 지르게 하고 이를 중국인들이 벌인 일이라 몰아붙였다.

1월 28일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상해시장은 일본인 승려와 신도 등 5명이 죽거나 다친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피해자에게 위무금을 지급할 것과, 불법행위자를 조사하여 징벌할 것과 반일 단체도 해체시킬 것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그날 밤 11시 25분 일제의 제일견외함대 사령관은  상해를 지키는 전략거점이자 강력한 포대를 자랑하던 갑북에서 중국군과 항일세력이 물러나 상해에서 후방으로 20km 물러서라고 강요하였다. 그러고는 중국 측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15분 뒤 일본 해군육전대와 편의대가 갑북으로 침입하여 중국군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이후 34일 동안 펼쳐진 1.18사변, 송호전쟁의 서막이었다.

 중국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국민당 정부가 전면전을 원하지 않아 일본의 요구대로 상해 조계경계선 20km 밖으로 철수하여 휴전하였다. 일본군이 거류민 보호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 명분을 찾고 침공을 중단하자, 3월 14일부터 상해에 있는 영국영사관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어 국제적인 압력 아래 5월 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의 철수, 사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이와 같이 이봉창의거로 인해 '상해사변'이 일어났고, 4월 29일 천장절에 맞추어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던 홍구공원에서 상해주둔 일본군들이 윤봉길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이다.

​[유해봉환]

이봉창의사는 1932년 10월 10일 도쿄의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의 우라와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가운데 김구는 일본에서 출옥한 박열에게 이봉창과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박열은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10월 27일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된 뒤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발족하고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이봉창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우라와형무소에서 교회사로 일했던 일본인을 찾아 물어본즉, 우라와형무소 부속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형무소소장은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모른다고 발뺌하자 서상한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나가자, 교무관을 불러 묻힌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신조선건설동맹 청년동맹원 3천 명이 세 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이봉창이 거사를 일으킨 사쿠라다몬 안으로 들어가 그를 기리는 연설을 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후 만세삼창을 불렀다. 1946년 4월 20일 세 의사의 유해는 일본 도쿄를 출발하여 5월 15일 부산항에 도악하였고,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유해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였고 수송동의 태고사로 운구되어 불교식 안위식을 갖고 임시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김구가 효창원을 장지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1946년 6월 30일 국민장으로 거행하려 햇으나 장마로 7월 6일로 연장하였다. 7월 4일 김구는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에서 이봉창과 윤봉길의거가 민족 독립을 위한 거사였음을 강조하였다. 세 의사의 유해는 7월 6일 12시 40분 효창원에 도착하였다.

영결식은 오후 1시 김구, 이승만을 비롯하여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등과 각 정당의 단체 대표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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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
배경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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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을 폭사하려던 계획을 실패한 의사로 평가 절하했던 이봉창의사.

그런데 이봉창 의거가 있었기에 윤봉길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가 오기전에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처럼!

이 책은 이봉창이 직접 자서전을 쓴 듯한 느낌으로 세밀한 감정과 시대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장기]

 1901년 서울 용산에서 이진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금정(효창동) 118번지이고, 출생지는 경성부 원정2정목(원효로2가) 이다.

용산은 1894년 청일 전쟁 이전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벌판이었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 군대가 주둔하며 병참부를 세우며 군사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진구는 건축 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신흥 자본가로 운반업과 목재상을 운영하였다.

이봉창이 7, 8세 때 집에 소가 대여섯 마리나 될 만큼 부자여서 주변사람들이 "저 애가 이진구의 아이야!" 라는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대한 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듬해인 1911년에 청엽정(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이 이봉창의 유일한 정규 교육 학력이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한 국민을양성'할 것을 목표로 한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다.

이봉창은 이러한 식민지 교육의 영향으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조선 왕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 동화된 '신일본인'으로 성장했다.​

이봉창이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진구는 성공한 사업가 답게 본부인 손씨 말고도 첩을 둘이나 두고 있었다.

​이런 방탕한 삶때문에 '당창'이라 불리는 매독에 걸려 3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치료를 했지만 몸이 쇠약해지고 약값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거기에 대홍수로 목재가 떠내려 가고, 집 등기를 갱신해 주겠다는 일본인 이마이에게 속아 살고 있는 집과 두명의 첩 집까지 몽땅 날려 버렸다.

이봉창이 문창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이진구는 원정의 집을 팔고 산동네인 금정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재산이 있었지만 세집이 생활하기에는 버거웠다.

결국 이진구는 집을 하나 마련하여 소실과 그녀의 자식들만 데리고 딴 살림을 차리게 되어, 할머니를 비롯한 형 범태 부부와 조카 은임까지 여섯 명의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5년 봄에 원정2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라는 일본인 과자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과자점에서는 월7, 8원에 식사 제공을 조건이었지만 말라리아를 앓아 관절염이라는 후유증을 얻어 환절기에 통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과자점에서 1년쯤 지나 월 13, 14원을 받는 한강통(한강로) 16번지 '무라타 시게가쓰'​ 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의 점원으로 이직하게 된다.

이봉창에게 능숙한 일본어 실력은 일본인이 주인인 식민지를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생존무기였다.

1919년 8월 용산역 조차계의 시용부(임시직)로 취직하여 1년 동안 빠르게 승진한다. 

1920년 1월 역부가 되어 일당94전을 받았고, 2월에 전철수가 되어 한 달에 40~48원을 받았고, 10월에는 연결수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책임자의 조선인 차별에 따라 임금과 승진의 기회를 박탈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이봉창에게 배운 후임이 책임자가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5년 동안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았지만 가난한 가정형편과 병든 어머니 때문에 쉽게 그만 둘 수 없었다.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으며 자포자기의 삶으로 술과 여자 도박에 손을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며 외상이 4~5백원까지 늘어 퇴직금 80원으로 감당되지 않았다.

1924년 4월 14일 스물 네 살의 이봉창은 4년 8개월 간 근무했던 용산역을 사직했다.

[청년기]​

​ 용산역을 퇴직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이봉창은 지역 주민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였다.

금정에 있는 관왕묘(관우 사당) 보존 운동에 참여하였고, 금정청년회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5월 25일 총독부령 제66호로 <간이 국세 조사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10월 1일 국세 조사를 실시할 때 국세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인 인구 총조사였다.

용산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후지하타라는 일본인이 아이를 돌봐줄 여자아이를 구해달라는 부탁에 열일곱 살 조칸 은임을 소개하며 자신까지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봉창은 희망 없는 현실과 샌존을 위해 조카 은임과 함께 1925년 11월 하순 부산항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게 된다.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에 도착한 이봉창은 '조선인촌'이라고 불리는 조선인 합숙소에 들어갔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았으나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고베 철도 우편국 열차계의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응모 방법을 물어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를 받아 우편국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라 채용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좌절한다.

12월 초 오카다상회에서 발명품 외판원 모집에 응시하였지만 역시 거절당하지만, 경성에서 근무했던 총무의 도움으로 특별 채용되는 행운도 맞보게 된다.

첫 직장의 기쁨으로 한 달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 경리가 자금을 도둑질해 도망가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첫 월급의 꿈도 사라진채 실업자 신세가 된다.

1926년 2월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오사카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며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처음으로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다.

문창학교를 졸업한지 11년 만에 간사이 공업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학업과 일을 병행하지만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으로 넉달 만에 모두 중단해야 했다. 

외국인이었던 이봉창은 생활 구호 담당자의 도움으로 히가시나리 구의 지케이 병원에 입원하여 석 달 정도 요양 했으나 별 차도가 없자, 12월에 효고 현 기노사키에서 표구점을 하는 고니시 쇼지로를 찾아가 도움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 요양하며 다섯 달 동안 표구점 심부름을 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1927년 5월 오사카로 돌아와 가스 회사에 복직했지만 친구 동생 병 간호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같은 하숙집의 조선인들을 따라 부두 에서 석탄 짐꾼을 하여 첫날 3엔 20센을 받았다. 시작한 지 사흘 만에 몸살이 나서 사오 일 쉬다 다시 부두 일을 시작했는데 그세 일당이 2엔 70센에서 2엔 50센으로 자꾸 줄어들었다. 임금 삭감의 이유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 때문에 일본인으로 알았다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임금을 깍았다고 한다.     

​ 1928년 2월 친구 김수천의 도움으로 '스미토모 신동소의 아마가사키 출장소'에 상용 인부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는 20~30명 중에 조선인은 이봉창 혼자였지만 차별 대우는 받지 않았다. 정식 직원은 되지 못했지만 모처럼 안정된 생활과 여유가 생기고 만족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해 11월 10일 교토 고쇼에서 천황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이봉창과 최순평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 마에다 세이지와 함께 11월 7일 오사카로 출발한다.

이 때 이봉창의 심경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와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처음 깨달았다. 자신도 엄연한 '신일본인'이기 때문에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살이 가난한 노동자였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겟다고 다짐했다.  ​

 11월 8일 아침 세 세람은 미쓰비시 은행 앞에 말녀된 참관석에 자리했다. 이윽고 경찰이 참관객 몸수색이 시작됐고 이봉창의 양복 주머니에서 한글과 한문이 섞인 안부편지가 발견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 편지를 암호문이나 되는 줄 알고 무작정 임시 경비 본부로 이봉창을 연행하였다. 그때까지도 이봉창은 천황 즉위식 행차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9일 동안이나 감금당하게 된다. 이봉창은 유치장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나는 별수 없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인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천황 폐하를 뵈려 한 죄로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1928년 11월 15일 무죄 석방으로 풀려나 오사카로 돌아온다. 한참 만에 돌아온 이봉창을 노동운동을 하는 '주의자'로 의심하며 따돌림이 시작되자

'조선인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잇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은 없이 그저 자포자기한 상태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1929년 2월 말 혼마 시게가스의 소개로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에 있는 야마노 가노스케 비누 도매상에 취직하며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이 당시 조카 이은임은 이석숭과 결혼하였지만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이라는것이 탄로가 났다.

이때부터 이봉창은 또 한 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봉창은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살려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옛날과 같은 독립국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막연했다.

1929년 9월 수금한 100엔을 가지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오사카에서 도쿄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세계대공황이었다.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쓰던 이름을 버리고 도쿄에서 '마쓰이 가즈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공황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야쿠자 조직에 신세까지 질 정도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내게 된다. 1930년 7월 구세군 소개소의 도움으로 혼조 구에 잇는 오오키 가방점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출장 중에 수금한 회사 돈 50~60엔을 사용하고 다시 오사카로 도망쳤다. 

 오사카에 도착하여 일자리를 구하다 우연히 박태산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제의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

"상하이에 우리 조선 사람이 세운 임시 정부와 교민단이 있어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 회사에 검표원으로 취직시켜 준다" 고 한다.

떳떳하게 조선인으로 살 수 있다는 말에 이봉창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6일, 이봉창은 오사카 짓코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 온 지 5년 만의 일이다.

[독립운동]   

 ​1914년 4월 출범한 상하이 임시 정부는 프랑스 조계의 중심인 하비로에 2층집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부터 미국에서 보내오던 지원금이 뚝 끊기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거나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변절자가 되어 국내로 돌아가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김구 역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동포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실정이었다.

​ 1931년 1월 어느 늦은 밤, 이봉창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봉창은 자기소개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조선말인지 일본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밀정으로 의심하고 문 밖으로 쫓겨났다. 마침 2층 사무실에 있던 김구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내려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다음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받았다. 다음날 임시 정부를 다시 찾았지만 영국인 전차 회사에 취직하려면 영어나 중국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듣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졌다. 할수없이 이봉창은 상하이 일본 YMCA를 찾아가 일본인으로 속이고 일자리를 부탁하여 명화 철공소 대장장이로 취직했다.

 철공소 주인은 이봉창을 일본인으로 알고 임금을 후하게 쳐 주어 일당 2엔을 받았다. 이는 혼자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었다.

며칠 뒤 다시 임시 정부를 찾아가 전차 검표원 일자리를 부탁하려 들렀다 김구를 만나 상하이의 교민단과 임시정부 이야기를 나누지만 별 소득 없이 헤어졌다.

이봉창은 임시정부 직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과 국수를 사가지고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했다.

1층 주방에서 조촐하게 술자리가 벌어져 취중 떠드는 소리가  2층 사무실까지 들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봉창이 목소리를 높여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지금까지 뭘 했소?"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아직까지 천황도 죽이지 못했소?"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봉창을 비웃었다. 총독부 관리나 일본군 장교 하나 죽이는 것도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그리 쉽게 죽이겠소?

비위가 뒤틀리는지 이봉창은 "내 보기에 일본 천황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도쿄에 있을 때 천황 행차를 구경한 적이 있소. 그때 만약 내 손에 총이나 폭탄만 있다면 천황을 처치하는 것은 쉬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소."

"천황을 죽인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김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대담한 발언이었다. 이봉창의 계획대로 천황을 죽일 수만 있다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절호의 기히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김구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31년 3월 무렵이었다. 김구는 이봉창이 어떤 인물인지 떠보기 위해 많은 질문을 했다.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큰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은 없는가?"

순간 이봉창은 몇 년 전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과 유치장에 갇친 일이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을 이끌어 줄 지도자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에 들어가고 싶은데 연줄을 댈 수는 없을까요?" 이봉창은 김구의 마음을 열기 위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제가 상하이로 온 것은 일본인 행세를 하지 않고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으로서 나라를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폭탄이든 무엇이든적당한 무기만 손에 들어오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건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할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한들 과거 반생 동안 방랑 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서른한 해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선생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김구와 이봉창은 대업을 위해 뜻을 모았다.

 5월 말경 이봉창은 다시  임시 정부 사무실로 김구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김구의 연락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일단 어떤 단체든지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었했다. 천황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사건이 어떤 단체의 활동보다 중요하다는 김구의 설득과 폭탄이 구해지면 바로 거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봉창은 마음을 가라안쳤다. 이봉창은 가끔씩 술과 고기, 국수 등을 푸짐하게 사 가지고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직원들과 어울려 놀았다. 심지어는 게다를 신고 일본인 행삭으로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가 중국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행동때문에 김구는 이따금 이동녕 등 다른 국무 위원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8월 말쯤 이봉창은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고 일본인이 많이 사는 훙커우 지역에 있는 영창공사라는악기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김구와 만난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폭탄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장사라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라리 빨리 결판을 내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9월 중순 무렵 이봉창은 김구를 방문하여 재차 폭탄에 대한 확답을 듣고나서 성능 실험을 해 보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의 나라에서 폭탄 실험을 할 장소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폭탄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라 김구는 폭탄의 성능은 자신한다고 이봉창을 다독였다.

 당시 중국 현지에선느 1931년 7월 완바오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나는 급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김구는 폭탄과 자금을 준비해야 했다.

우선 폭탄 한개는 김홍일에게 부탁해 중국군 무기 공장에서, 다른 하나는 김현에게 부탁해 허난성의 류치 장군에게서 구했다. 하나는 천황 폭살용으로,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쓸 계획이었다.

폭탄 확보 다음으로 중요한 거사 자금 확보가 문제였다.​ 만주나 일본에 많은 동포가 살고 있었으나 생활이 어려워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되어 결국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살고 잇는 동포들에게 재정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한다. 이렇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답장이 없거나 반송되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카고의 김경이라는 사람이 200여 달러를 모금해 보내왔다. 또 하와이의 안창호(도산 안창호와 동명이인)와 임성우에게서 1천 달러의 자금이 왔다. 이렇게 김구는 천황 폭살을 위한 무기와 자금을 모두 확보했다. 이봉창을 만난 지 열 달 만이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특수 공장을 감행할 비밀 조직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김구를 대장으로 사업의 계획과 실행 일체을 일임받았다. 이를 위해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1년 12월 6일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 회의에서 천황 폭살 계획을 보고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깜짝 놀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에 따라 김구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12월 10일(혹은 11일)경에 이봉창은 하숙집 주인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13일 저녁 7시 30분 교민단 사무실로 오라는 김구의 편지였다.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언제쯤 일본으로 떠날 수 있겠는가?"

"마침 12월 17일 오후 상하이에서 고베로 가는 우편선이 잇으니 그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구는 허름한 옷 속에서 지폐 한 다발을 이봉창에게 내밀었다. 300달러, 웬만한 월급쟁이 석 달 월급에 해당되는 큰 돈이다. "저를 어떻게 믿고 이런 큰돈을 주시는 겁니가?"

"이런 일은 인격 문제이네, 순전히 자네를 믿고 주는 거네."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사진관 비슷한 곳으로 이동했다. 사진관 안은 어두었지만 탁자 위에는 수류탄 두개와 선서무 한 장이 놓여 있고, 맞은편 벽에는 사람의 키 높이 정도로 태극기가 세로로 걸려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선서문을 읽어 주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국애국단 앞​

선서식이 끝나자 김구가 기념사진을 찍고 청진에 있는 형에게 보낼 기념사진을 한장 더 찍었다. 이로써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입단식이 끝났다.​ 김구가 말한대로,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최선봉에 선,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다.

 12월 15일 저녁 무렵부터 폭탄 사용법과 보관법을 김구에게 학습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듣던 이봉창은 수류탄 성능을 시험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제의 했지만 ​이봉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폭탄을 던질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도 상의하기 시작했지만 도쿄 지리에 어두운 김구는 거사 장소와 날자에 대해서 모두 이봉창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거사 자금이 부족하면 1~2백엔정도는 추가로 더 송금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해 주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은 소망 하나를 말했다.

"이번 일은 저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서 다시는 임시정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조촐하게 송별회라도 열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또한 대의를 앞두고 밀정에게 누설될까 두려워 마지막 소원도 김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

 12월 16일 김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 8월 80전을 주고 이봉창에게 손목시계를 사 주었다. 김구는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찍은 사진을 이봉창에게 건네주었다.

사진을 본 이봉창은​ 너무 희미해 얼굴과 선서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 실망하여 사진을 다시 찍자고 제의했다. 김구는 나중에 경시청에서 사진을 확대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할테니 다시 찍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봉창은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김구는 경험을 토대로 주의사항을 세심하게 일러 주었다.

​ 12월 17일 아침, 이봉창과 김구는 최우희 식사를 하고 마지막 축배를 들었다.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걸세. 이승에서는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사진으로나마 다음 세상에서 함께하도록 하세."

김구는 이봉창의 손을 끌고 가까운 중국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사진기 앞에 앉아 사진을 찍었지만 애석하게도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2월 17일 오후 3시, 이봉창은 빨간 가죽 트렁크 한 개와 중국산 등나무 바스켓 한 개를 들고 고베로 가는 우편선 히카와마루에 올랐다. 선객 명부에는 '효고 현 기노사키에 사는 축음기 상인 기노시타 쇼조'라고 자신의 신분을 적었다.

 1931년 12월 19일 밤8시 상하이로 떠난 지 1년 1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12월 22일 도쿄에 도착했지만 14엔 정도가 남아 23일에 김구에거 1백엔 송금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12월 25일 천황이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는 날이었지만 돈이 없는 데다가 결행하려는 기분도 들지 않아 거사 계획을 포기했다.

12월 27일 독촉 전보를 치고 손목시계를 저당잡히고 1엔 50센을 받았다. 돈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근처 직업소개소를 찾아 기노시타 쇼조 명의로 일자리를 부탁했다.

12월 28일 "정금 1백엔 보냈다"는 전보를 받았고 아사히 신문을 통해 1932년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시관병식에 천황이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29일 아사쿠사 우체국으로 가서 송금을 확인했지만 돈이 오지 않아 불안해 했다.

12월 30, 31일 기다리던 돈이 오지 않아 싸구려 여관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1932년 1월 1, 2일 자신의 출생과 경력 등을 적은 수기를 썼다. 

1월 3일 마치내 전보 칠 돈도 떨어졌다. 여름 옷과 속옷등을 근처 헌옷 가게에 팔아 1엔 30센을 받아 우체국에서 송금 독촉 전보를 치고 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월 4일 중앙 우체국으로 가서 송금 상황을 확인했다. 상하이에서 일본 사이에는 전보 우편환을 보낼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혹시 우체국이 아닌 은행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전보 첫머리에 적힌 '정금'을 '일본 돈'으로만 생각했는데, 일본 돈이 아니라 "정금은행"이었다. 전보와 별도로 정금은행으로 부쳤다는 편지를 여관으로 보냈지만 이봉창이 여관을 옮긴 뒤라 전달이 되지 않아 혼선을 빚은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찾아 김구에게 전보를 쳤다.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시오."

1월 5일 거사를 앞두고 그 결과가 궁금해 센소사 앞에서 시험 삼아 오미쿠지를 뽑아 점을 쳐 보았다. 점괘는 '제35 길 吉'이라는 길조였다. 

1월 6일 요요기 연병장으로 사전 답사를 했지만 초행이라 실수를 했다. 승합차를 타고 운전사에게 연병장 가는길을 묻자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며 관병식에 참관할 생각으로 헌병 명함을 받아 두었지만 근무로 갈 수 없다며 이봉창에게 건네 주었다. 거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도쿄 시내 지도를 샀다.

1월 7일 관병식을 앞두고 도쿄 시내 경비가 삼엄하여 가와사키 시 다마키로 유곽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검문을 피해 몸을 숨기기도 좋았지만 하라주쿠까지 가는 교통도 편했다.

1월 8일 오전 8시 유곽을 나서 8시 50분쯤 하라주쿠 역에 도착했다. 중국 식당에서 닭고기 계란덮밥으로 식사를 하고 수류탄을 싼 보자기를 들고 식당을 나왔다. 경비가 심한 요요기 연병장 입구 보다는 국철을 타고 근처의 요쓰야 역에서 거사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카사카미쓰케 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카사카미쓰케 역에서 환궁할 때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근처 식당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관병식 중계를 듣고 있는데 관병식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봉창이 역에 도착했을 때 행열의 끝이 보이며 저 멀리 다마치의 길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허탈감에 몸을 주채할 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로 인부에게 천황의 행차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행령은 다메이케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쫓아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택시를 타고 국회 의사당 앞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에서 내려 경시청 본관 북쪽 끝까지 달려 도착하였다. 수상히 여긴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승합차 운전수에게 받은 헌병 조장의 명함으로 무사히 통과하였다. 다시 뛰기 시작해 경시청 정문 현관 앞에 도착했다.

 큰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맨 앞에는 호위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아직 천황의 행렬이 지나가지 않았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두세 겹 앞으로 나아가자, 천황 행렬이 이봉창이 있는 사쿠라다 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이봉창은 사쿠라다 문 전차 정류장의 삼각형 안전지대 잔디밭 동남ㅉ고 인도의 거의 중앙 부분에 있었다. 

이윽고 첫 번째 마차가 다가왔다. '천황이 탄 마차라면 황비까지 두 명이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한 이봉창은 천황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첫 번째 마차가 지나가고 두 번째 마차가 나타났다.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차까지는 어림잡아 10간(약 18미터), 수류탄을 던지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어 보였지만 어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마차를 겨냥해 약간 높게 던져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부근에 떨어졌다.

"꽝!" 폭발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갑작스런운 폭발에 놀란 말이 날뛰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 45분경이었다. 요란한 폭발 소리를 듣고 이봉창은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발 소리만 요란했지 수류탄의 위력은 약했다. 마차 밑바닥과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 다친 사람은 없었다. 혼란을 뒤로한 채 앞서 가던 천환의 마차는 5분 뒤에 궁성으로 들어갔다.  

"실패했구나!" 이봉창은 당황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주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혼다 쓰네요시라는 순사가 얼떨결에 이봉창 뒤쪽에 서 있던 반코트를 입은 쉰 살쯤의 남자를 체포했다. 이봉창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라고 외쳤다.   

이봉창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지만, 경찰의 거친 행동으로 입고 있던 코트의 단추들이 떨어져 나갔다. 현장에서 바로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만약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성능이 좋아 재대로 폭발했다면 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사 당일 현장 검증에 따르면,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졌을 때 천황의 행렬은 왼쪽의 경시청 건물을 끼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의 사쿠라다 문 전차 정류장 안전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폭탄 투척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18간(약33미터) 떨어진 거리다. 김구가 말한 수류탄의 위력 범위인 6, 7간(약11~13미터)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수류탄이 제대로 터졌더라도 천황을 폭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거사 당시 수류탄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던지고 나머지 하나는?

그에 대한 대답은 <제2회 신문조서>에서 예심 판사와 이봉창 사이에 오간 문답에 있다.

"그곳에서 바로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둔 폭탄을 다시 던지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때는 웬일인지 머리가 멍해져서 두 번째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이봉창은 상하이에서 폭탄 투척 연습을 한 적이 없는 아마추어 독립운동가이자 평범한 노동자였다.

일본 경찰은 경시청에 도착하 때까지도 이봉창의 호주머니 속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연행된 뒤에 이봉창이 스스로 주머니 속에서 수류탄을 꺼냈다고 공판조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봉창은 9월 16일의 구형 공판과 9월 30일의 선고 공판에서 모두 사형을 판결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매일 염주를 만지면서 조용히 재판에 응했다. 이봉창은 사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극비리에 사형되었다. 유해는 사이타마 현 우라와 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묻혔다가 해방 후 김구의 주선으로 1946년 7월 초에 효창원에 안치되었다.

[이봉창의 힘]    

  이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각 총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히로히토는 시국이 중대하다는 이류로 내각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이봉창 의거는 1931년 9월 만주 침략을 감해하여 오만해진​ 일본 제국주의가 신년 관병식을 통해 무력적 위엄을 과시하고자 한 '잔칫집'에 재를 뿌린 격이었다. 또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천황을 향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조서닌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즐겨 받고 있다고 선전해 온 일본의 식민 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만주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국의 신문들은 연일 이봉창 의거를 머릿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중국의 우호적인 반응에 화가 난 일본의 거센 항의로 이봉창 의거를 호의적으로 보도한 중국의 신문사들이 폐쇄되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20일 만에 갑자기 상하이를 침공했다.(상하이 사변)

 비록 천황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하던 미주 동포들이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으며 중국 정부의 지원하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준비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10월 15일 오전 6시 정각, 상하이 프랑스 조계 애다아로에 있는 모 사원의 집에서 남녀 유지 36명이 비밀리에 모여 이봉창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날 추도식은 교민단원 이유필 등이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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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 피트니스
윤영철.장제욱 지음 / 이지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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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면 아침 9시 전에 출근하여 6시 퇴근까지 하루의 1/3을 직장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는 법정 근로시간일 경우이고, 평균 우리나라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34개 OECE 국가중 맥시코와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저도 직장인이지만 6시 칼퇴근하려면 응근히 눈치가 보인다는 사실.........

그럼 어떻게 일을 해야 회사, 개인, 가정,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워크 다이어트

업무에 앞서 우선순위를 정하여 선택과 집중으로 효율성 증대, 목표와 상관없는 불필요한 업무 제거

​워크 웨이트

​업무의 결과물 중심으로 업무 진행, 업무를 행할 때 긍정적인 면을 더욱 확대해 자신감을 키운다, 관행보다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본다.

​워크 리바운드

​업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한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 역량을 스스로 개발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과 포기한 사람과의 차이는 분명하겠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렌시스 베이컨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항상 해오던 일을 하면 항상 얻던 것을 얻는다."

좀 더 나은 업무, 승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실천하는게 중요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책 내용은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서라기 보다는 회사 내 인사 교육 담당자의 글이라고 보여집니다.

현실적 동기부여는 조금은 부족하고 현장감이 조금은 떨어져  보입니다. 이점이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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