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28
김도형 지음 / 역사공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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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책을 통해 유년시절부터 의거일까지 자세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이 책은 의거일까지 부분이 설명이 조금 빈약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의거일 이후 부분을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동경의거 전 국제정세]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으로 한중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사건을 일제가 부풀리고 허위선전하여 한국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당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있는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 장교들이 유조호부근에서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 노선을 폭파하고는 중국군과 비적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이로써 남만주철도 노선상의 전략 거점들을장악하는 만주사변으로 발전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국제연맹에 원상복귀를 요구했으며,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이사회의 특별위원회가 소집되어 점령지 철수를 결의하였다. 국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고조되었으나, 일본은 여론을 조작하여 관동군을 지지하고 중국과 서양을 비난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국수주의적인 정우회가 차기 내각을 맡아 천진에 2개 대대, 만주에 1개 여단을 추가 파병하고 금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일왕 히로히토는 1932년 <군인칙유 50주년 기념일에 육해군에 내리는 칙어>를 발표하고, 나흘 후 <관동군에 내리는 칙어>를 통해 관동군이 "황군의 위력을 나라 안팎에 선양했다"고 칭송했다. ​

​[국내외 반응]

 이봉창은 거사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 방에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폭탄 한개와 도쿄지도, 현금 등을 내놓았다. 일제는 이 의거를 즉시 '불경사건'으로 규정하고 일절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도쿄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정으로부터 취조가 시작됐다. 또한 이봉창의거 관련하여 보도를 금지하고, 특히 범행장소, 폭탄 작렬사실 등은 절대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의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왕을 목표로 하였기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는 '무서운 전파력'으로 퍼져나갔다.

 이봉창의거에 가장 긴장한 것은 물론 일본정부였지만, 이에 못지 않게 민감하게 반응한 측은 일제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세력들이다. 의거 이후 이들은 일왕을 대상으로 의거를 일으킨 인물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라 자신들의 입장이 난처한 지경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의거 발발 직후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곧바로 일왕을 찾아갔으며,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상애회의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한 여러 고위층을 방문하여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데에 송구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9일 친일단체 상애회 회원 120명을 소집하여 궁성 입구니쥬바시에 도열하여 사죄하였다. 국내에 있던 친일세력들은 동민회를 중심으로 1월 9일 한상룡, 박영철, 신석린, 조성근, 김명준, 민대식, 박승직 등 35명의 친일파들이 사죄의 ㄸ스으로 근신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봉위문'을 전보로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조선총독 등에게 보냈다.

​[조작된 신문조서]

​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체포된 이래로 6월 27일까지 9차례에 걸쳐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아야만 했다.

1회 신문은 이름, 나이, 직업, 주거, 본적 및 출생지 등 신상을 확인하였고, 2회 신문은 1월 11일 진행되었는데, 일왕의 목숨을 빼앗을 심산으로 거사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1월 12일 3회 신문에서는 죽을 각오로 일왕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였지만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6회 신문에서는 한국독립을 바라게 된 과정을 말하면서, 자신이 결행한 거사가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실행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7회 신문에서는 한민족이 전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 거사를 결행한 사실을 강조하였다.

9회 신문은 6월 27일 진행되었는데, 이봉창의 진술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8회까지 진술과정에서 한번도 본명을 거명한 적이 없는 '김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한 점이다. 그런데 이봉창이 김구를 지칭한 것은 오직 한 번뿐으로 진술 뒷부분에 가서는 다시 '백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계속되는 신문조서에 나타나듯이 이후에도 '백정선'이란 호칭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9회 신문조서의 내용은 이봉창 본인의 진술이 아니라 일제가 위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실수로 추정된다.

​[사형집행 과 진상 발표]

​ 1932년 10월 1일 이봉창의 사형언도가 되었다. 그리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9월 28일 의거의 경위와 의의, 이봉창의 생애와 약력 등을 담은 장문의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10월 9일 중국통신사에 보내졌고 각 신문사에 배포되어, 15일자 상해의 '신강일보'와 남경의 '중앙일보'에 게재되어 중국인들에게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켰으나 애석하게도 국내신문에서는 그 내용이 전혀 게재되지 못하였다.  ​

[상해사변]

 ​'동경의거'가 일어난 그날 저녁 도쿄에서 발신된 통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 각 도시의 신문은 바로 다음 날 한결같이 이봉창 거사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기관지 성격을 지닌 상해판 <민국일보>는 1932년 1월 9일자에 "한인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적중하지 않았다.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 부차가 조금 터졌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이 표현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폭탄이 일왕에게 적중하지 못하여 매우 안타깝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봉창을 '지사', '의사' 라는 표현이 일제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국 신문들은 이봉창의거에 동조하는 논조를 보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심양에서 '유조호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금주를 비롯한 중국 각 지역으로 침략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신문의 논조가 이봉창의거에 더욱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되어 있던 한중 간의 관계가 이봉창의거로 인해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

 상해의 <민국일보> 보도 후 상해 거류 일본인들은 "불경하지 않은가"라며 소요를 일으켰고, 상해주재 일본총영사는 상해시장 오철성에게 사과와 정정보도,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항의서를 보냈다. 이에 상해시장은 모욕의 뜻은 없었다고 답신하였지만 민국일보 측은 일본총영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게재하며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 이런 중국의 반응에 대해 일본영사관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지방장관의 사과, 신문사장의 사과 ,책임자 처벌, 신문사 정간 또는 폐간, 재발방지 보장 등을 구두 또는 공문으로 요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하게 난동을 부린 곳은 청도이다. 청도의 일본총영사는 <민국일보>가 이봉창을 '의사'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있고 내용이 불경하다고 강력한 항의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1월 12일부터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고, 민국일보사에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한 것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시당부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민국일보>사건이 진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국제도시 상해에서는 시민 항일운동과 항일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이를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역이용하기로 한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두 명을 포함한 일본인 다섯 명이 중국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을 날조하였다. 다음 날 진상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거류민대회를 열어 범인 체포와 손해 배상, 일본에 사과할 것을 결의하여 상해시 정부에 결의문을 전달하였다.

그 후 1월 20일 새벽 일본인 5~60명 정도가 중국인 습격하여 삼우공사 공장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또한 오후 6백 명의 거류민들이 무기를 들고 중국인을 모두 죽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여 상점을 파괴하고 중국인을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중국 내 반일 감정을 역이용 하기 위해 일본은 1월 24일 시게미쓰 마로루 일본공사 공관에 불을 지르게 하고 이를 중국인들이 벌인 일이라 몰아붙였다.

1월 28일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상해시장은 일본인 승려와 신도 등 5명이 죽거나 다친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피해자에게 위무금을 지급할 것과, 불법행위자를 조사하여 징벌할 것과 반일 단체도 해체시킬 것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그날 밤 11시 25분 일제의 제일견외함대 사령관은  상해를 지키는 전략거점이자 강력한 포대를 자랑하던 갑북에서 중국군과 항일세력이 물러나 상해에서 후방으로 20km 물러서라고 강요하였다. 그러고는 중국 측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15분 뒤 일본 해군육전대와 편의대가 갑북으로 침입하여 중국군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이후 34일 동안 펼쳐진 1.18사변, 송호전쟁의 서막이었다.

 중국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국민당 정부가 전면전을 원하지 않아 일본의 요구대로 상해 조계경계선 20km 밖으로 철수하여 휴전하였다. 일본군이 거류민 보호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 명분을 찾고 침공을 중단하자, 3월 14일부터 상해에 있는 영국영사관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어 국제적인 압력 아래 5월 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의 철수, 사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이와 같이 이봉창의거로 인해 '상해사변'이 일어났고, 4월 29일 천장절에 맞추어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던 홍구공원에서 상해주둔 일본군들이 윤봉길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이다.

​[유해봉환]

이봉창의사는 1932년 10월 10일 도쿄의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의 우라와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가운데 김구는 일본에서 출옥한 박열에게 이봉창과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박열은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10월 27일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된 뒤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발족하고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이봉창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우라와형무소에서 교회사로 일했던 일본인을 찾아 물어본즉, 우라와형무소 부속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형무소소장은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모른다고 발뺌하자 서상한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나가자, 교무관을 불러 묻힌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신조선건설동맹 청년동맹원 3천 명이 세 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이봉창이 거사를 일으킨 사쿠라다몬 안으로 들어가 그를 기리는 연설을 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후 만세삼창을 불렀다. 1946년 4월 20일 세 의사의 유해는 일본 도쿄를 출발하여 5월 15일 부산항에 도악하였고,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유해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였고 수송동의 태고사로 운구되어 불교식 안위식을 갖고 임시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김구가 효창원을 장지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1946년 6월 30일 국민장으로 거행하려 햇으나 장마로 7월 6일로 연장하였다. 7월 4일 김구는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에서 이봉창과 윤봉길의거가 민족 독립을 위한 거사였음을 강조하였다. 세 의사의 유해는 7월 6일 12시 40분 효창원에 도착하였다.

영결식은 오후 1시 김구, 이승만을 비롯하여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등과 각 정당의 단체 대표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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