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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혁명과 임시정부 - 대한민국의 뿌리
김삼웅 지음 / 두레 / 2019년 3월
평점 :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라며 1~3월까지 전국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4월이 지나며 차츰 그 열기가 식는가 싶더니 6월에는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관심도가 떨어졌습니다.
한국인들의 냄비 근성이 어디 가겠냐 싶지만 조금은 서글퍼집니다.
3.1 혁명과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망국에서부터 대한민국 수립까지 역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하였습니다.
그 흐름의 핵심은 바로 3.1운동, 아니 3.1혁명입니다.
3.1 혁명의 시작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레닌이 민족자결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에 뒤질세라 미국의 윌슨 대통령 역시 1918년 1월 의회에서 '14개조 평화 원칙'을 공표합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터키, 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하며 그들의 식민지의 처리를 위한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를 잘못 과대 해석하여 모든 피지배 민족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지요,
어찌 되었든 학생들을 시작으로 종교 인사들을 통해 물 밑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태화관은 중국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으로, 한때 이완용이 살았던 집을 수리하여 음식점으로 바꾸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곳은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늑약을 밀의하던 장소이며, 1907년 7월 17일에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하는 음모를 꾸미고, 매국노들이 병탄조약을 준비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대표들은 이곳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를 불렀던 것입니다.
3.1 혁명 당시 일본 정부와 신문은 3.1 폭동 난동, 소우, 반란 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중국의 신문과 잡지는 '조선혁명, 대혁명, 조선해방투쟁' 등으로 썼고, 우리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렇게 불렀다.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 역시 '대혁명'이라 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전문에 '3.1 혁명'으로 명시했다.
그러던 것을 지주 계급 출신의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신생 정부를 뒤엎는 과격한 용어라고 진언해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용어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역시 매국노 이승만의 잔재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운동이 맞든 혁명이 맞든 이를 근거로 우리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100주년이라고 반짝 열을 올리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심도 있게 공부해 보고 알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