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선언 -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 ㅣ 서울 선언 1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저녁을 차리는 부엌에서 나는 라디오를 듣는다. 요리에 집중하는 시간도 좋지만, 가끔은 어떤 소리에 의지하고 싶어서 그렇다. 여느 때처럼 듣는 라디오방송이었지만, 샘플을 모아놓은 듯 짧고 여러 주제를 이어나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생소하지만 익숙한 내용을 들었다. 풍납동 이야기였다. 풍납동에 산 적은 없지만, 가까운 곳에 살았었고, 서울 어딘가(잠실, 천호대교 지난 서울 어디)로 이동할 때 자주 지나치는 곳이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세모 모양의 아파트, 그리고 역 이름도 풍납토성이라는 행성과도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동네라 익숙한 곳이다. 이걸 듣고 내가 살던 그 주변이 그리고 서울이 더 알고 싶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서울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러 곳을 살아봤다. 강남구 압구정동, 양천구 신정동(목동 근처), 도봉구 도봉동, 강동구 고덕동 그리고 성내동, 그리고 지금의 은평구까지. 직장은 강남구 신사동, 서초구 염곡동, 강남구 삼성동, 용산구 갈월동.(참 많이도 옮겼다 ㅋㅋ) 살면서 일하면서 그 근처 거리를 거니는 것이 내 취미였고, 즐거움이었다. 또한, 살지 않았어도 주말마다 종로구 곳곳을 걸어 다니는 것이 내 기쁨이었다. 그런 곳곳의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들을 듣다니 이게 지금의 내게 큰 즐거움이 될 줄은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로 이게 이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 신(新) 흥밋거리를 찾은 기분이다.
이 책은 '사대문만 서울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사대문에서 대서울로의 뻗어나가는 서울의 역사의 자취를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내가 익숙했던 동네가 나와서 좋기도 했고, 낯선 곳도 있어서 지루다가도 새로웠다. 역시나 이 책에서 풍납 토성을 다뤄줬다. (목적지를) 잘 찾아왔구나! 싶었다. 옆으로 뻗어있는 차도 그리고 주거지(아파트 외), 올림픽공원 등에 묘하게 섞여버린 그곳에 문화재로 존재해 있는 걸 나 또한 생뚱맞다 보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학자의 이야기는 또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한 심정을 사사키 선생에게 말하자, 선생은 뜻밖의 답을 했습니다. [백제의 첫 왕성이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고 이처럼 파괴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보면, 백제 시대의 왕성, 조선 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의 서민 동네, 현대의 고층 아파트, 이 세 개의 시대가 이렇게 한곳에 공존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입니다.] p.47
또, 저자의 삶의 거취를 따른 서울 이곳저곳을 따라가기도 했다. 이는 어쩌면 저자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곳의 면모를 새로이 볼 수 있는 기회다. 영동대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영동 지방(강원도)'의 대로가 아닌 '영등포의 동쪽'으로 '영동'으로 삼성동 근방의 대로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걸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잠실 5단지에 수영장이 있었구나! 싶고, 아직도 살아남은 잠실 아파트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명성을 잃고 재건축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부천시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 '그것'인지 몰랐고, 20년 전 강남 부근에서 일어난 큰 두 가지 사고에 우리가 현재 이 정도만의 대처를 하고 있다는 점이 씁쓸했다. 삼풍백화점은 잘 몰라도, 성수대교는 그 끊어진 다리를 막내 고모 집에서 멀찍이 바라본 적이 있다. 또,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은 강동구에서 교회까지 차로 다니면서 강변 대로를 탈 때마다 지나친 탑이었다. 100번 이상은 지나쳤을 탑을 너무도 무심히 지나친 데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겹쳤다.
세계에 알려질만한 '서울'그리고 '한국'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그것은 한복이었고, 궁이었고,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많은 서울을 이루었던 것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투쟁이 시작됐으며, 그 끝에 결국은 지금의 서울이 남았음을 그동안은 몰랐다, 비석과 동상과 브론즈들이 각 곳에서 일어났던 목소리와 울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깊이 알았다.
일반 시민들이 봉기한 것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정부는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빈민과 힘없는 시민을 서울의 땅끝으로 보내는 정책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그 뒤로도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빈민과 상인들은 서울의 끝으로 밀려나고는 했습니다. 태평 고개 너머 성남 대로, 송파 대로를 따라 직진하면 나타나는 가든 파이브가 바로, 청계천 복원 때 밀려난 상인들이 이주한 곳이지요. p.323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근접한 곳, 익숙한 곳이 나와서 이 책을 읽은 이유도 있다. 그런데 각종 SNS를 통해 감성과 한국적인 느낌을 한껏 더하는 그곳이, 실상은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의 유골을 뒤집고 헤치고 지어진 곳임을, 그리고 그곳에 우리 서민의 기본 거주지가 아닌 심미적으로 보기 좋은 '한옥'이란 이름의 기와집이 세워졌다는 내막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이를 통해 우리의 감춰온 숨겨진 이야기들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 것이 또 내겐 의미 있었다.
앞으로는 지역을 이야기하는 소개 글을, 비석을, 팻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다. 더욱 주의 깊게 보고 궁금해하게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정말 재밌게 읽었고, 읽는 동안 그 속에 빨려 들어갈 만큼 생생했다. 그리고 지역 곳곳의 이야기에 담긴 김시덕 교수님의 시선과 바른 생각들도 참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사는 모든 자취를 향해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의 문헌학자가 우리나라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김시덕 교수님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도 그리고 이 근방도 어떤 지역인지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분의 최근 책에 담겨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은 서울을, 더 깊은 서울 이야기를 알고 싶고, 읽고 싶다.
*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이단의 종교의 희생이 있음에도 기독교에서 이단을 배척당하는 것을 지적하신 부분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것마저도 교수님의 따뜻한 시선으로도 보였습니다.
**왠지 교회사까지 아주 살짝 들춰보는 듯한 내용이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