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미식가
박진배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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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으려고 고르는 책들 중 반은 <윤고은의 EBS 북가페>에서 나온다. DJ 윤작가님이 마음에 착착 감기도록 낭독해 주는 책, 패널들이 나와 맛있는 음식 먹듯 재밌게 나누는 책, 그리고 북 카페에 나온 작가님들의 책...


인터넷 서점이 내게 베스트셀러 혹은 추천이라 보여주고, AI가 내게 맞는다며 알려주는 그런 책에는 사람의 냄새가 없어서일까? 내가 읽을 책은 내 귀로 듣고 내 귀를 착 끌어당기는 책들에 더 솔깃하고, 눈길도 간다. 그래서 (이렇게 라디오에서 알고) 읽은 책들 중 거의 90프로 가량은 '성공'이다!

(윤고은 라디오 작가님들 여기 보세요!!ㅎㅎㅎ 조용한 청취자도 이렇게 도움 잘 받고 있답니다. 흐흐흐)


아무튼, 이 책도 그 책들 중 하나다.

이 책은 내가 못 본 건지, 스친 건지 모르겠지만, 라디오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뻔한 책이다.

그런데다 두께가 보통 책의 두 배가량 정도 된다.

읽고 나서는, '왜 이 (좋은) 책을 나는 몰랐지?' 싶었다.

내용을 풍성히 뒷받침해 줄 사진이 가득 있으니 두께 또한 맘에 든다.


제목만큼은 신선했다. 공간 미식가! 한 손에 익혀질 제목이다. 다섯 글자가 한 손의 손가락의 숫자만큼이나 딱 맞다.

공간이란 단어와 미식이란 단어가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

'공간'이란 데에 '맛'이라는 감각을 부여할 수 있을까?

의미 있고, 하나뿐일 듯한 공간을 누군가에게 맛집을 소개하듯 책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마치 미식가의 역할과 비슷하다. 세계 곳곳에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알 곳은 아닌 듯 보인다, 깊숙한 곳을 그리고 그 공간을 충분히 거닌 자가 아니고서는 잘 모를 것 같다. 공간에 대한 저자의 사색과 새로운 앎을 주는 내용도 참 좋았지만, 다양하고 아름답고 각 나라나 도시다운 공간을 이 책 한 권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감격스러웠다. 그 덕에 내가 알지 못한 공간을 보고, 시각을 경험하며, 삶을 느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기에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접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을 즐겨 찾는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시골을 선호한다'라는 저자 소개 글에 이 책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저자가 간 미국을, 아일랜드를, 이탈리아를 내가 그대로 여행을 했더라면 그 공간들을 이토록 깊고 재밌게 이해하고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은 각자 경험이 다르니까 보는 게 다르지!' 얼버무리겠지만, 솔직히 나라면, 저 공간의 반 이상은 다 지나쳐버리고 유명한 곳에서 사진 찍기 바빴을 거다.


'가로등', '신호등', '간판', '계단' 등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가 다른 나라에선 이렇게 다채로운 모양과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옥스퍼드 대학이 영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몇 개의 주에 옥스포드 소재 대학이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웃음이 났다. '우리(자그마치 10명이다!!) 애들 다 키우고 갈 거라고 텍사스로 갈 거라고!' 큰 소리 떵떵 친 그곳, 다른 한 명인 내 친구가 살고 있는 텍사스. 그곳 이야기가 나올 땐, 내 친구가 그렇게 광활한 주에 살고 있구나! 싶어 신기했다.(뭣도 모르고 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니 무모했어... 그렇다고 못 갈 건 없지만)


파스텔 톤의 건물이 늘어선 마이애미 해변, 아르데코 지역을 걷고 싶고,

로보스 레일에서 고급스러운 기차 식사를 해보고 싶어 남아공에 가고 싶고,

커다란 도넛 간판이 있는 랜디스 도넛을 먹고 그 앞에서 사진도 찍으러 LA에 가고 싶다.

한번 다 읽고 난 지금, 책 속 사진을 한 장 한 장 다시 봐도 궁금하고, 즐겁고, 신기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이 책이 코로나에 꼼짝 못 하던 시기에 나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어디로 여행을 갈지 설레도록 하는 데도 좋을 책 같다.

나같이 여행을 갈 수 없거나 굳이 가지 않아도 좋은 사람에게도 사진과 내용만으로도 간접 체험하는 듯 행복한 마음이 들게 해줬다. 이 책을 다른 사람들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처럼 설레는 마음을 함께 공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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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 - 패권전쟁으로 이해하는 역사의 흐름
썬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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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 책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를 보고, 세계대전이야기가 후루룩 정리되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이렇게 공부했더라면 세계사가 참 재밌었을텐데...하며 시간이 지나니 새로운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은 뭘 다뤘든 무조건 읽고 봐야한다! 하고 느지막하게 읽었다.


다루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

하지만 '두 나라 이야기'라 부르고 세계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제목 '패권전쟁으로 이해하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말처럼 두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면 세계대전 전후 세계의 흐름이 이해가 된다. 어느 인터넷 서점 한줄평에 내가 썼지만, 이 책은 '미국과 러시아 이야긴데 세계사가 정리되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미국은 콜롬부스가 발견해서, 1620년 영국의 청교도인들로 시작된 나라 아닌가?

그 사람들이 서부 쪽으로 쫘악 진출해갖고 몽땅 미국땅이 된 거 아닌가?

미국은 '흑인노예제도'를 대체로 찬성했던 거 아닌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는 거기대로,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각자 사상과 철학을 발전시킨 거 아닌가?

'공산주의'가 '사회주의'? 그게 그거 아닌가?

때엥!!!! 땡! 땡! 떙!


무지를 굳이 리뷰에 드러낸 게 부끄럽지만, 나같이 미국을 러시아를 오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다.

어찌됐든 러시아와 미국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바로 정리가 된다.


필라델피아가, 뉴욕이, 펜실베니아, 워싱턴 D.C.가 어떻게 생긴 이름인지 알려면 세계사를 알아야 한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역대 미국 대통령 4명의 큰 바위 얼굴의 속사정을 알려면 미국사를 알아야 한다.

(눈물 없이 못 읽어요..ㅠㅠ 흑흑)

쌩뚱맞게 칭다오에서 무슨 맥주란 말인가? 의문이라면 중국과 엮인 세계사를 알아야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미국사를 알아야 한다. 뭐가 사라진 건지도 함께 알 수 있음!

어이없게 필리핀만 미국땅? 괌은 어쩌다가 미국땅? 알려면 미국사!!! 알아보셔야죠!!

요즘에 러시아가 미국한테 알래스카를 돌려달라던데, 어떻게 미국이 알래스카를 차지했을까?

미국 손에 들어가는 땅이면 가치가 그제서야 발견되는거지? 어딘지 궁금해요? 궁금하면 책으로!!^^

프라이드 치킨의 원조는 KFC 할아버지가 아니야!!! 그럼 누구?


제국주의 시기 당시, 힘이 생기면 다른 땅을 더 정복하려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렸다는 말이 씁쓸했다. 내가 알던 미국은 영화가 혹은 기독교가 심어준 긍정적인 이미지 덕분에 생긴 나라였다.(물론 좋은 점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동물농장'에 등장한 나폴레옹, 레닌을 상징한 동물들이 왜 그렇게 그려졌는지 이 책을 읽으니 조금 더 이해가 된다.(동물농장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ㅠㅠ) 미국이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니 지금까지의 미국의 영향력을 알만하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이해하기엔 조금더 알고 싶은 면이 있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왜 생길 수 밖에 없는지 크림반도 이야기만으로 부족해 ㅠㅠ) 고등학교때 귀에 박히게 듣던 사건들이 다 이해가 된다.(보스턴 차사건, 의화단 사건, 을미사변 등등)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를 읽다가, 아래 부분에서 어찌 많이 본 장면같다 싶은 장면이 있었다. 마지막 러시아 황제가 니콜라이 2세던데, 저 승려가 황후와 러시아를 말아먹었다는 표현까지 있던데 소름끼치도록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 글을 보고 왠지 모를 걱정이 드는 사람은 나 뿐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러시아 황실은 정신을 못 차립니다. 당시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통치하던 사람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아니었습니다.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니콜라이 2세를 아주 쥐락펴락하던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그 황후를 뒤에서 조종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 몰락의 주역, 요승(요상한 승려) 그리고 리 라스푸틴이란 인물입니다. 이 라스푸틴이란 인물은 원래 시베리아 출신으로 수도원을 전전하던 부랑자였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라 황후를 만나게 되는 기회를 잡아 인생 역전에 성공합니다.

...

황제 부부는 라스푸틴에 무한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다 믿고 들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황후인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을 거의 신처럼 신봉했어요. ...

p.232


아무튼 이 책을 읽고나니 지난 책에 이어서, 그동안 듬성듬성 듣고보고 읽은 퍼즐들이 하나하나 맞춰져 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느낌이다. 썬킴 선생님의 세계사이야기 앞으로도 계속 출판되길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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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 - 패권전쟁으로 이해하는 역사의 흐름
썬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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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이야긴데 세계사가 정리되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지난 번 책에 이어 썬킴 쌤의 책!!! 쉽고 재미납니다.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사서 놓고 또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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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플레저
클레어 챔버스 지음, 허진 옮김 / 다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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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까페에서 누군가가 추천한 책이었다. 다른 데선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추천하는 걸 못 봤던 지라(?) 더 읽고 싶었다. 책표지가 예뻤고, '스몰 플레저'라는 단어의 조합이 궁금증을 더 불러 일으켰다.


1. 줄거리

때는 1957년. 이 책은 한 철도사고 발생의 신문기사의 한 지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40대 초반의 여성의 이름은 진. 그녀는 신문기자다. '이제 번식에 남자는 필요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이후로 신문사는 한 여인(그레천)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10살이 된 자기 딸이 남성과의 관계 한번 없이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왔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에 취재를 맡으면서 그레천의 가족(딸 마거릿, 남편 하워드)과 가까운 관계가 되고, 취재를 하면서 색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한편, 진은 자신을 의지하는 엄마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여동생은 결혼 후 출가했다. 미혼인 딸과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적절히 발전되는 그레천 및 가족의 진실. 이 모든 것으로 진의 인생 또한 진실이 밝혀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게 되는데...


2.<스몰플레저>에서 보이는 인물관계 데자뷰?

먼저, 진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선 <에이미와 이저벨>이 떠올랐다. 물론 딸인 진은 40대 초반이며, 에이미는 10대였다. 다른 세대지만, 엄마와 딸과의 관계에서 오는 묘한 신경전, 그리고 의존관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엄마들은 하나같이 고집스러웠고, 겉으로 보이든 안 보이든 딸들을 통제하려 했다. 모녀 사이엔 서로 의존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



에이미와 이저벨
에이미와 이저벨
저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6.05.27.



두번째로, 진과 그레천의 관계에선 <파친코>의 선자와 경희가 떠올랐다. 진은 한 유부남에게서 배신을 당했지만, 1950년대치고 상당히 주도적인 직업을 갖고 있다. 남초현상이 보일 듯한 기자의 세계에서 약간은 소외되거나 특정 기사를 다룰 수 밖에 없는 상황일지라도 자기 일에 대해 성실하고 주도적이었다. 파친코의 선자 또한 유부남인 한수의 가정을 뒤늦게 알게 된다. 비록 여성이 주도적으로 가장의 자리에 설 수는 없어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면서도 지혜롭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같은 성격은 아니어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그레천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여성적이면서 흔들리는 모습이 '파친코'의 경희의 모습과 흡사해보였다. 그녀가 의외의 반전을 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경희나 이 책의 그레천이나 흔들리는 태도가 조금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파친코 1~2권 세트
파친코 1~2권 세트
저자
이민진
출판
인플루엔셜
발매
2022.08.25

.

3.터질 것 같은 감정을 제인 오스틴 느낌으로 차분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는 차분했고, 일상적이었다. 어떤 불안과 긴장도 없을 것 같은 모녀와 가정의 이야기에 조금씩 칠판 긁는 듯 부스럼이 생겨난다. 겉으로는 고요해보였지만, 원망, 동요, 집착, 의존, 통제, 절제의 꾹꾹 눌어온 감정들이 폭발하기 전 들썩 거리는 모습과 같다. 그리고 '진'이란 한 인물을 통해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으로 터져나간다. 그래서 혹시나 인물들은 '스몰 플레저'를 찾을 수 있을지, 누군가에게 뺏기지나 않을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문장들이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인 오스틴'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도서관 반납일이 가까워졌는데,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결국은 구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4.당신의 작은 즐거움(small pleasure)은 무엇인가요?

번역자나 작가의 그 어떤 이야기도 없이 소설만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좋았다. 어떤 전문가의 설명이 없는 덕에 독자의 해석은 어리숙할지 모르겠지만, '스몰 플레저'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이 맘에 든다. 나 또한 평범하게 지금의 삶을 'pleasure'이라 여기는데, 이 책에서 small pleasure 또한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인생 별거 있나 생각이 들게도 한다. 그리고 행복은 별다른 곳에 있지 않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주위 사람들의 pleasure은 무엇인지 묻고 싶고 궁금해지는 단어조합이 이 책의 제목이다.


5.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차분하고, 섬세한 감성을 느끼고 싶으신 분!

잔잔한 것도 좋고, 묘한 긴장감도 좋아하시는 분!

엔딩에서 은근한 여운이 남습니다.(말해드릴 순 없어요!!^^)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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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오늘 - 카피라이터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코로나 이후, 시대의 변화
유병욱 지음 / 북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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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의 책이다.

광고계나 기획 쪽 일하시는 분들의 시선은 늘 새롭다. 내가 보지 못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글은 상큼하고 매력적이다.

퍽!

내가 보던 세상이 전부라고 굳건히 믿는 나의 뒤통수를 한 문장으로 시원하게 때려주는 느낌이랄까?

좌르륵!

내 시야 커튼을 한 뼘 더 열어주는 느낌이다.


이 책 또한 그랬다. 그리고 여기엔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더해졌다.

'음미력'이란 단어를 처음 봤다. 음미도 능력이 있구나! 음미하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결과, 말과 글만 봤지 이 음미하는 것에 대해 능력을 대보지도 못했었다. 음미하며 모든 사물을 소화하는 타인들의 시선을 자주 접하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음미하며 살고 싶다.

찰흙에 대한 글은 정말 읽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진지한 저자가 찰흙에 대해 적은 글을 이해가 가면서도 진짜 흙을 퍼다 주신 저자의 어머님의 순수함이 재밌었다. 엄마인 나라도 저자의 엄마라면 그러지(흙 퍼서 아들 준비물 챙겨주기) 않으려나? 그래서 우리 첫째가 울고불고 하며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까? 간간이 우리 모자에게도 발견되는 모습이라 오버랩되어 친근했다.


인간관계에, 책에 대해, 세대에 대해, 하나하나 공감되는 에세이를 보며 카피라이터의 문장이라지만 쏙쏙 마음에 박히는 글을 쓰는 저자가 참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역시 카피라이터구나! 그래서 글로 마음을 사로잡는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수박에 대해 바라보며 다시 거론한 '음미력'을 나 또한 다시 봤다. 나는 책을 읽으면 뭐든 그냥 흐름을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어 묘사에는 안중에도 없다. 문장의 하나하나를 살펴볼 만큼 여유도 없고, 빨리 읽어내려는 급한 마음에 사로잡힌 나는 깊이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말한 걸 보니, 작가들이 쓴 '수박'의 묘사가 다르게 보였다. 앞으로 보게 될 책에서 나오는 묘사와 표현을 유심히 살펴보고 싶어졌다. 음미를 하면 멋진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음미한 사람의 삶이 더 풍성해진다는 점에서 정말로 '음미'하는 걸 즐기게 된다면 좋겠다. 소설가와 시인들의 관찰력과 섬세한 시각이 참 매력 있단 생각이 든다.


처음 알게 된 저자였는데, 이분의 책은 다른 저서도 읽어봐야겠다. 나는 접하기 힘든 색다른 시선과 세계라서인지 이런 부분들 때문에 주변에도 추천하고픈 책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단순한 문장이라도 힘이 꾹꾹 담겼다는 김훈 작가님의 책도 읽어야지!



서울에는 수백 년을 일관된 방향으로 디테일을 올려온 유럽의 도시들이나, 숨 막힐 듯 정리된 일본의 대도시처럼 정돈된 맛은 없지만 오히려 서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집중력과 긴장감이 있다. 솔직히 예전엔 이 긴장감이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이 도시의 매력이다. 기록이 대단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뛰는 러너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p.28


게다가 한국 사람 특유의 최선을 다하는 습관 때문인지 나는 요즘 서울의 완성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의 서울은 큰 것, 대단한 것, 다수의 것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서울도 개별 개별의 아름다움을 조망하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골목 곳곳에 등장하는 완성도 높은 커피숍이나 빵집, 몇 개의 메뉴로 승부하는 작은 식당들이 그 증거다. 요즘은, 오랫동안 남을 따라 하기만 하다가 조금씩 자기도 멋진 사람임을 깨달은 이의 자존감 같은 것을 서울에서 느낀다. p.28


원치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과감하게 줄이고, 취향이 맞는 사람들,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는 다양하게 그리고 얕게 만나는 인간관계, 매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게 더 현명한 삶의 방식이란 생각도 든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고, 필요에 의해 맺은 관계들은 내 필요가 사라짐에 따라(혹은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 없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리된다는 것이다. 가족을 빼고 정말 중요한 사람은 한 줌이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이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도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여전히 소중하고 마음이 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감사하면서 충분히 그 감사함을 표현하면 된다. p.36


2미터. 비말의 비행거리. 그리고 인류가 최소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안한 사회적 거리. AI가 인간 최고의 두뇌를 이긴 시대에, 침방울의 비행거리가 문명의 새로운 기준이 되다니 허탈하고도 놀랍다. 커피숍을 가도, 투표장을 가도, 우리는 상대의 침방울이 날아와 닿지 않는 만큼 떨어져 서 있다. 바닥에 프린트된 발자국 모양에 얌전히 내 발 모양을 맞추고서. p.75


재능에 의심이 들자 나는 '성실'의 길을 택했나 보다. 성실은 폼 나지 않았지만, 천재가 아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었다. ... 잘하는 후배들, 평판이 좋은 후배들이 뭐가 다른가를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성실'과 '최선'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선배들 눈에 띄는 곳에서 보내느냐, 남이 안 보는 곳에서 보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p.104


재능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지만, 오직 재능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이런 단언하는 말투의 문장을 나는 꼰대스러워서 싫어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로 없다. 일을 하면 할수록, 가장 단순한 행위의 가장 강력한 힘에 대해 생각한다. 성실과 최선, 이 투박하고 멋없는 단어 속에 온갖 가능성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은 재능 곱하기 투입한 시간이다. 아니, 투입한 시간의 제곱이다. 시간의 힘은 그렇게 강력하고, 그것을 이루는 본질은 결국 성실과 최선, 그 소박한 두 단어다. ... p.105


게다가 유튜브는 지식을 '요리'해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형태이다. 기존의 지식을 크리에이터가 나름대로 소화하여 알기 쉬운 단어와 비주얼로 풀어놓은 경우가 많아, 어려운 문자들이 나열된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관적이고 이해가 쉽다. ... (p.110)

하지만 책은 말하자면 '대화'이다. 책의 속도는, 읽는 이가 맞춘다. 당신이 책을 읽는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속도로 책을 읽다가, 생각에 잠기고, 원하는 만큼 멈추고, 줄을 긋거나 책 귀퉁이를 접는다. 텍스트 속에는 분명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지만, 당신은 그 문장 안으로 들어가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는다. 그러다가 다음 줄을 읽을 준비가 되면 비로소 다음 장으로 향한다. 독서는 유튜브에 비해 훨씬 더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 속도는 온전히 내가 정한 속도이다. p.112


부모가 되어보니 조금 알겠다. 내가 아이를 위해 희생을 해도, 그 결과로 아이가 행복해하면 내가 치른 희생은 금방 기억에서 사라진다.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의외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더 큰 만족감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만족감이 너무나 커서,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도 세상의 엄마들과 아빠들은 여전히 엄마와 아빠로 남아 계속해서 주고 또 주려는 건 아닐까. 코로나로 통째로 바뀐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아빠는 다 큰 딸의 어리광이 반갑고, 엄마는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음식으로 다 큰 자녀의 집 냉장고를 채울까. 아직 세상이 바뀌는 중이니 추측할 뿐이지만,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이 본능을 바이러스는 막을 수 없을 거 라 생각한다. p.133


그래서 나는, 김윤아의 아우라가 아름답다. 김윤아는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않고 말하는 중이다. 시간을 두고 깊어진 것이 이렇게나 강력하다고. 그것은 오직 새롭고 새로운 것만이 무기인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 힘이라고. p.142


하지만 봉준호는 보여주었다. 꼭 주류를 따라 하지 않아도, '필 레스'라는 감정 없이도 자신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그의 자존감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게다가 나를 가슴 뛰게 했던 건 그가 주 52시간을 정확히 지키면서 영화 '기생충'을 찍었다는 소식이었다. 동양 사람들의 장점이라 생각하던 극단적인 근면성의 투입이 아니라, 나와 동료들을 갈아 넣는 '노오력'의 결과가 아니라, 온전히 생각의 힘과 합리적인 시스템의 힘으로 저 성취를 이뤘따니, '나는 부족하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해'가 아니라, '나와 내 주위의 시스템은 충분히 훌륭하니까, 지킬 것을 지키면서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겠어'라는 태도가 읽히지 않는가. 멋지지 않은가. p.177


직업이 카피라이터이다 보니 주위에서 종종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는지를 물어온다. 묻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대답도 조금씩 바뀌지만, 내가 마련해둔 모범답안은 이렇다. '잘 쓰고 싶으면 필사하세요. 다양하게 쓰고 싶으면 읽으시고요.' p.247


당신이 쓰는 문장은 당신이 읽은 문장에서 시작된다. 읽어봐야, 진정 내가 원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이라면 맨 먼저 다양한 문장들을 겪어야 한다. 그 경험들 틈에서 내가 정말 따라 쓰고 싶은 문장을 만나고, 그중 몇몇을 취사선택하여 내 문장의 방향타로 써야 한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문장은, 그가 사랑한 작가와, 닮고 싶은 사람과, 매혹당한 세계와, 가치관들의 모듬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게다가 문장은 말과 달라서,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아름답게 정리하여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 다듬어 내놓을 수 있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러니 당신이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문장을 잘 쓰고 싶다면, 이 문장을 기억할 일이다.

'You write what you read'

당신이 읽은 것이, 당신의 문장이 된다. p.254


책은 딱 읽는 사람이 준비된 만큼 내어준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과는 다르던 시절에 읽은 책이라면, 당신은 딱 그 시절의 당신만큼을 얻어 갔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책에는 당신만큼을 뺀 나머지 부분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거 읽었어. 별거 없던데?'라며 그 책을 다시 꺼내보지 않는다. 그러나 읽었다고 정말 읽은 걸까? 당신이 읽었다고 믿는 그 책 속에, 그 당시의 당신은 읽어내지 못한 놀라운 부분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p.265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오직 자신의 힘으로, 남의 해석에 기대지 않고, 어떤 텍스트를 파고들어가보는 훈련이다. 생각보다 이런 경험에 익숙하지 않은 후배들이 많다. 의존은 쉽지만, 그럴수록 의존하는 나는 약해진다. 불변의 진리다. 매일 차를 타고 출근하다 보면 다리 힘은 약해진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다 보면 아주 가까운 길도 경로가 떠오르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다 보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밖에 의존하면, 안은 약해진다. p.269


중요한 건 해석이다. 들여다보고, 매력을 찾고, 음미하는 것이다. 인생은 음미할 줄 아는 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선물한다. 그러니 음미할 줄 아는 것은 분명 대단한 재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음미하는 이들의 반짝이는 시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음미하는 힘을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비슷했다.

'좋은 걸 자꾸 보러 다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시선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는 곁에 둘 일이 없다. 음미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생을 음미하는 이가 내놓은 글과 그림과 영화를. 가까이 있으면 언젠가는 닮게 되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화가 찾아온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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