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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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읽은 작가의 저서였다.

뭔가 빠르게 읽히도록 몰아치는 몰입감을 주는 것도 매력이지만

사물과 이해에 대한 남다른 인식과 독특함 또한 그렇기도 해서 작가의 글을 사랑한다.


그냥 한 스토리처럼 여기자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글의 한곳한곳이 지속적으로 뇌리에 남게 되는 것...

작가의 글이 뭐였더라 하며 떠올릴 때 그랬구나 하고, 그래서 작가의 책을 다시 잡게 된다.


이 책에 대해서 어떠한 분석이나 해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 개인적으로 복잡할 것 같고, 더 많은 생각을 하기에 여유가 없어서다.


그냥 글 자체가 참 좋은 작가의 저서 중 하나이고,

글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색과 삶에 대한 통찰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그냥 단순하게 몇가지 떠오른 생각들을 이야기하며 인물을 생각해 보면...


현금의 캐릭터는 거침없고 솔직하다.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매력이 참 멋지게 느껴졌다.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라서 더 끌렸고,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 할 수 잇는 그녀의 캐릭터가 동경이 되었다.

처음엔 그야말로 '나쁜 년'으로 여겼지만, 그녀 자신이 도덕적인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솔직한 인정함과 자신의 인생을 통해 끝없이 자신을 찾아가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빈은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하며 비겁하다. 어쩔 수없는 환경에서 그는 얽매이고 능동적일 수 없던 삶에서 자신의 생명만큼은 자신에게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그건 당신의 핑계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있어서 그의 상황들과 그의 우유부단함이 이해가 되었지만, 자신의 환경에서 거스르기를 포기했던 그냥 자신을 내었던 삶을 그럴 수밖에 없음처럼 이야기 하는 그의 모습이 찌질해보이기도 했다.


영묘를 보며 과연 저 여자가 사법고시 공부한 사람이 맞을까? 싶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그리고 절박함과 충격 속에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만큼은 똑똑하고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할거라고 응원하고 기대했떤데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후에는 오빠를 힘입어 결국 시댁의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참으로 그녀의 삶은 시작부터 결혼이후 내내 씁쓸하고 개운치못하게 갑갑함을 남겼다.


아! 그리고 이 책에서 강하게 뇌리에 꽂힌 것은 '인간의 탐욕과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인간의 상식과 존엄은 배제된 여러 상황들이 경악스럽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도태되고 당하는 약자들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버텨보고자 애쓰고 비틀고 방황해가며 견뎌온게 영빈의 삶을 통해 보이는 듯하다. 서로가 속고 속이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소속을 향해 가는 우리네의 모습이 이 책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서 씁쓸했으나 강렬했다.

뿌리와 본능의 힘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점차... 이내 곧... 사그러든다.

그리고 어찌어찌 살아낸다.



 


"난 느네가 이사 갔다는 거 느네 집에 능소화가 피지 않는 걸 보고서 처음 알았어. 되게 섭섭하더라. 우린 느네보다 몇 년 더 그 동네서 살았거든. 어쩜 이사 갈 때 능소화까지 파 갔냐?"

"얘는,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그때 우리 쫄딱 망해서 그 집 쫓겨났는데 무슨 수로 꽃나무를 파가냐? 파가길. 그 집 빼앗아 이사 온 아버지 친구도 우리 집에 전화 걸어 제일 먼저 한다는 소리가 어떻게 사느냐는 안부가 아니라 딴 정원수들은 다 잘 있는데 유독 능소화만 여름이 되도록 기척이 없다고 혹시 우리더러 죽이고 간 게 아니냐고 항의하는 소리였어."

"그럼 저절로 죽었단 말이지."

"저절로 죽긴 어떻게 저절로 죽냐, 자살을 한 거지."

"자살? 나무가 말이야?"

"그래 그 나무는 나를 좋아했으니까. 나를 좋아하지 않음 내 창가에 어떻게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울 수가 있겠어. 우리 집 능소화처럼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를 난 어디서고 본 적이 없어."

p.45


호적을 가르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내 안의 나태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나는 단순 소박하고 외롭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구별이 안 되는 나태라는 악령 먼저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육체노동에 대한 갈망이 신흥종교에 대한 광신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이상으로 삼은 정직하고 순결하고 최소한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육체노동의 본이 농사였다. 본보기는 제대로 정했다고 생각한다. 생각만으로 벌써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신바람이 났다. p.63


그렇게 복잡한 이유 없이도 충격 받으면 투병의지를 잃고 더 일찍 죽을까 봐 우려하는 착한 마음으로 환자를 속이는 경우가 실은 더 많다. 영빈은 그런 착한 마음에도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죽을 병들었을 때, 그의 주치의나 가족이 어떡하든 그를 속이려 든다고 바꾸어 생각해도 그는 모욕감을 느낀다. 개인정보가 예금액서부터 지문까지 어딘가에 차곡차곡 입력되어 있을 이 공포스럽도록 발랑 까진 대명천지에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고를 나만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 몸은 무언가? 이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가장 확실한 나의 것이기도 하고 내가 일생 받들어 모신 나의 주인이기도 하다. 내 몸을 가지고 비록 자식이라도 나를 속여먹으려 든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p.154-155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너무 적다. 영빈은 특히 자기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시간을 낼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도 그가 원해서 된 건 아니었다. 피할 수가 없어서 되었을 뿐이다. 결혼도 피할 수가 없으니까 했고, 일을 피할 수가 없어 휴식을 못해봤고, 여행도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여행만 해봤지, 여행이 목적인 여행은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선택은 아니지만 어떻게 죽느냐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p.155


"넌 참 좋겠다. 넌 아마 하고 싶은 말을 참은 적도, 생각에 없는 말을 꾸며댄 적도 없을 거야.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의사가 환자한테 바른말을 못하는 고민에 대해서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를테면 조기 발견 못한 암으로 시한부인 환자에게 외국 같으면 당연히 당사자에게 알릴 것을 우리는 보호자에게 먼저 통고를 하고 보호자는 거의가 다 환자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다들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각해봐.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 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 생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 적도 없다니까."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의사라고 농담하지 말란 법 있냐? 특히 너처럼 꽉 막힌 애는 농담 좀 할 줄 알아야 돼."

p.164-165


생활은 풍족했고, 노인들은 인자했고, 연못과 폭포까지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노는 걸 한 폭의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문득 할머니를 위해라는 건 자기기만일 뿐, 이 고여있는 시간 속에 뱀눈처럼 숨어있는 건, 이 저택과 조 단위의 재산을 노리는 욕망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영묘는 자기도 그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걸 간단히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었다. 송 회장이 못 박았듯이 그걸 포기하는 건 바보짓이다. 그러나 바보 짓을 안 하려니까 자신이 서서히 박제(剝製)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 건 또 어떡하나. 살아 있는 채로 생기는 야금야금 증발하고 꺼풀만 반듯하게 보존되는 과정이 영묘가 느끼는 오늘이 어제와 다른 유일한 변화였다. 이 젊은 나이에 자신이 박제가 돼버리도록 내버려두는 거야말로 정말 바보짓이 아닐까. 어떤 게 진짜 바보 짓인지 알아야 한다.

p.276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아서 기어 들어간 안방에 큰 대자로 누워서 코를 고는 아내를 보자 영빈은 뒷걸음질 칠 것처럼 놀란다. 이건 얼마나 미련하고도 당당한 현실인가. 이걸 극복할 수 없는데 어찌 뜬구름을 잡을 것인가. 내 앞에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내가 도망가봐야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육중한 것일수록 인력이 세다는 걸 그는 몸 전체로 느낀다. 아내의 몸은 실상 조금도 육중하지 않다. 현금이보다 오히려 작다. 시숙이 백만장자가 됐다는 소리에 애가 떨어질 뻔하게 놀랄 정도로 간뎅이도 작은 여자다. 그러나 나의 영역에서의 저 당당함이라니. 아내의 몸 속에는아들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유구한 여성잔혹사가 압축돼 있다. 어찌 육중하지 않겠는가. 현금의 명령 한마디로 맥없이 물러나 내 힘으로는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으리라. 그는 다용도 실에서 밤새 차게 식은 몸이 아내에게 닿을까 봐 침대 가장자리에 새우처럼 몸을 오그렸다. p.321-322


"멀리서 너희 집 쪽을 바라볼 때나, 너희 집에 올 때나, 네가 과연 거기 그냥 있을까 늘 불안해했었거든. 너와 나 사이의 불안은 이미 친숙한 감정이야."

"친숙한 불안도 있나. 친숙해질 수 없는 게 불안인 줄 알았는데."

"그래 그건 불안이라기보다는 전율이었을 거야. 매번 처음처럼 새로운....."

p.323-324


그러나 모르는 척해야 된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고도 모르는 척, 부부간의 파국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다 알고 있다는 걸 나타낼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얼마나 너그럽지 못하고 융통성 없이 막힌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만치나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는 가족이라는 게 이렇게 엉성한 허구 덩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만약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게 가장 정답인 걸로 돼 있는 모범적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모범생이 다 그렇듯이 그는 정답에 약했다. 그래서 사실이 밝혀질까 봐 조심조심하는 건 아내가 아니라 영빈 쪽이었다.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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