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8 - 박경리 대하소설, 2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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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단으로 다산 책방에서 새로 나온 토지 1권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조금 우습지만, 그 이후가 궁금해 도서관으로 야금야금 매달 두 어권씩 희망도서로 신청했었다. 예산 부족으로 23년 말에는 희망도서를 받지 않았고, 24년이 되어 신청을 재개했다. 그에 따라 나 또한 희망도서 신청을 재개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그런고 하니, 올해 초에 도서관에서 다산 책방의 토지 전권을 (알아서?) 이미 보유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음 편히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됐고, 도서관에서 전권을 마련해 주셨으니(그게 내가 꼭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책임을 갖고 읽을 동기가 생긴 셈이다.


그간 등장했던 모습, 즉 독립군에 동학군 그리고 불교의 스님이 가담한 듯 보이는 기세가 내겐 썩 흥미롭진 않았다. 뻔히 보이는 암담한 일제 치하의 상황, 쉬이 나아질 줄 모르는 백성들의 현실이 조선 말고 간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삶(탄생)과 죽음이 오가고, 숨겨진 비밀들이 드러나고(환의 정체) 이제 최서희가 평사리로 돌아갈 준비까지 하는 상황이니 꽤 술술 읽혔다.


공노인은 하동 등 조선을 거닐면 서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사방으로 돕고 있다. 조준구와 만나면서 환을 사주관상 봐주는 도사로 조준구에게 소개하면서 서서히 조준구를 몰락시키는데 환이 기여한다. 서희는 이미 길상과 두 아들, 환국과 윤국을 낳았다. 서희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만, 길상은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있어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노인은 (서희가 부여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그의 조카딸 월선은 서희가 보내준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린다. 홍이가 아버지 용이를 데려오려고 편지도 보내고 아버지에게 가고서야, 용은 자신의 일을 다 마친 후 월선이 죽기 전에 그녀를 만나 그녀의 임종을 지킨다. 서희가 모든 장례 비용을 책임질 뿐 아니라, 장례식에 참석해 (신분이 자신보다 미천한) 용이에게 맞절을 하며 월선의 죽음을 애도한다.

환은 간도로 와서 공노인을 통해 길상을 먼저 만난다. 서로 비슷한 처지이기에 서로를 위로하고, 여행도 가고, 같은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지낸다. 길상을 통해 환은 서희도 만난다. 그리고 그 둘은 간도를 떠나 하얼빈의 독립투사들을 만난다. 고향으로 갈 시간은 다가오는데 길상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서희는 계획대로 하동 평사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장남 환국이는 아버지 없이 안 간다고 떼를 쓰지만, 결국 서희는 간도를 떠나고 만다.


이 편에서 인상적인 사건은 역시 월선의 죽음과 서희의 귀향이다.

사랑하는 이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으나 부부로는 연을 맺지 못했다. 그의 아들만이라도 품에 두었던 월선. 참 가련하고 안쓰러운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용이가 돌아올 것을 믿었고, 그를 기다렸다. 그가 온 후에야 숨을 거뒀다. 무슨 사람 심보가 저러나 싶을 정도로 죽음을 앞둔 월선에게 쉬이 가지 않고 버티는 용이를 보고 처음엔 어이없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징벌이었고, 월선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는 용이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뭐 그래도 이해는 안 된다만....ㅎㅎㅎ


서희가 등장하여 할머니 때부터 이어진 월선네와의 인연을 끝까지 책임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서희는 평사리의 공주급이었을 텐데, 그런 신분차에도 용이에게 맞절을 하는 모습이 그 당시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그걸 콕 짚고 넘어가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음이 분명한 장면이었다.


이 권이 되면서 서희는 아들 둘을 낳은 상황이었다. 주변인들에게는 친일파 소리를 들으면서도, 결국 조준구에게서 자신의 땅을 하나하나 거둬들여 되찾고야 말았다. 결국 그녀는 해냈다! 최서희는 현실적이면서 목표 지향적으로 집념과 감각이 남다른 인물이다. 그녀의 할머니 윤씨 부인을 쏙 빼닮았다. '친일' 자체만을 볼 때 그녀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할지 모르겠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살짝 달리 보게 됐다. (친일을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라를 잃으면 누구나 '조국 독립'만 답으로 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최서희에게 평사리는 선조들이 유일한 혈육인 자신에게 남긴 정신이었고, 가치였으며, 생명이었다. 제목과 같이 바로 그곳 '토지' 그것이 최서희에겐 전부였다. 반드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 자신이 끝까지 지켜야 할 유산이다. 그랬기 때문에 '친일'은 그녀에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선택이었다. 평사리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더라면, 그녀에게 목표가 조국의 독립이었더라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가 되었을까? 그 이야기의 개연성에 과연 납득이 될까? 의문도 든다.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다는 건, 보편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서희는 이상보다는 지금 눈앞에 마주치고 있는 현실을 본 인물이다. 문득 최근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 떠오르는데, 스칼렛 오하라가 딱 그랬다. 그녀 또한 이상보다는 생존, 현실이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 지키려 애썼던 게 바로 땅, 타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상은 그녀와 다른 가치와 꿈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길상의 처지이기에 그가 이해도 된다. 그래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어미로 서희를 생각할 때면 아들과 아내를 저버리고 있는 길상이 원망스럽다. 모든 수치와 모욕을 이겨내고 결국 목표에 다다랐지만, 함께해 주거나 기뻐해 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선 서희의 모습은 못내 쓸쓸하고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기도 안 가겠노라고 고집부리는 아들을 두고 함께 목놓아 우는 서희의 고독, 수차례 너(길상)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서희의 이를 가는 분노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윤씨 부인이 느꼈던, 별당아씨가 느꼈던 그 고독이 서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긴 여정이었다. 아직도 꽤 남았지만.

여태 달려온 여정을 향해 뒤를 돌아본다. 평사리를 거쳐 간도로 그리고 이젠 다시 평사리로 간다.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행렬에게서 아직도 그들이 가야 할,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여정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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