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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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박완서 작가님이다!! 책으로 우리 곁에 다시 와 주신 작가님!

22년에 출간된 책 <모래알만한 진실>은 그가 남긴 에세이 660편 중 35편만 엄선해 모은 에세이 결정판이다. 이 책은 <모래알만한 진실>에 이은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 결정판의 두 번째라고 한다. 원 책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에세이의 전면 개정판인데, 그간 미출간 원고였던 <님은 가시고 김치만 남았네>가 더해졌다. 나는 22년에 나온 <모래알만한...> 속의 에세이 한편 한 편을 애정을 다해 읽은 기억이 난다. 끝내 내 인생 책으로까지 여겼었다. 이번 책의 출간을 확인하고, 박완서 작가님이 살아서 작가로 복귀하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읽었다. 정말 황홀했다.


이 책 속 에세이들은 1971년부터 1994년까지 작가님이 일상에서 보인 순간순간을 포착한 글이다. 작품을 읽고 난 후 맨 끝에는 작품 완성 연도임을 의미하는 듯한 '19XX 년'이 적혀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혹은 아기 때였던 때라고? 보기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고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1970-80년대 서울의 삶이 (시골에 비해) 이렇게 앞서나갔단 말인가? 시골에서 자란 나는 오히려 그 시대 서울 이야기가 지금과 이질감이 별로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가님이 경험한 입시열기, 졸업식, 도시의 삭막함, 세대 차이, 주말농장 등은 내가 경험해 온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닭이 깃털을 쫙 뽑아 내보내는 신박한 기계가 그 당시에 있다고? 난 엄마 따라 시장 다니던 어릴 적에도, 지금도 본 적이 없는데 그 땐 있었나 보다. 물론 시대감이 느껴지는 상황과 단어들로 그 시대와 지금이 다름을 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은 같다. 시대는 바뀌고, 날로 날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시기라 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 자체 본성과 욕구는 변하지 않는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작가님의 에세이에서는 자신의 수치심, 아쉬움, 치기 등의 감정이 작품 속에서 무심한 듯 툭툭 튀어나온다. '전쟁도, 어른 눈치 보느라 기에 눌린 것도 경험 안 해 본 너희가 뭐가 답답(땁땁)하냐! 생각할수록 답답해진 건 오히려 나다!'(p.200)는 글이 생각난다. 그런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먼저 피식피식 웃는다. 작가님에게서 작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 진솔함을 느끼고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누군가가 박완서 작가님이라는 데에 위로를 받는다.

작가님의 관찰과 그 너머를 발견하는 통찰에도 감탄한다. 부자와 범죄자를 두 부류에게서 어떻게 공통점을 발견하며, 그들 사이인 '보통'(의 삶)을 살자고 어떻게 저렇게 글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고를 하고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날카로우면서도 시선은 올곧은 작가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실에 있는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후련하게 논리를 펴는 글에서 말이다. 예를 들면 동성동본에 대해, 당시 장발과 짧은 치마 단속에 대해, 국제 사회의 비정한 실리 추구에 대해 참으로도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는데, 이에 편견 없는 상식으로 본인의 가치가 드러난 글이 강단 있게 느껴진다.

그런데다 또 글은 어떻고? 글은 생생했고, 상상하기 부족함 없으라고 묘사와 비유를 감칠맛 나게 넣어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에 많이들 극찬하는 '글맛'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두런두런 꾹꾹 눌러가며 낭독하고 싶고, 필사하고 싶은 글들이다.


아이들이 돌아왔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서, 개선장군처럼 지칠 대로 지쳐서, 엄청난 빨래 보따리를 전리품처럼 걸머지고 아이들은 돌아왔다.

아이들의 배낭은 마술이라도 부리듯이 꾸역꾸역 꺼내어도 꺼내어도 끝이 없는 빨랫거리를 토해 놓았다.

아이들의 빨래에선 찝찌라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옮겨 놓는 대로 무수한 모래를 떨구었다. 그러나 내 집이 해변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노독을 풀기 위해 깊은 잠에 빠지고 나는 수돗물에 열심히 바다의 때를 빨아냈다.

아이들의 빨래를 다 헹구고 나니 나의 여름은 이미 끝나 있었다. p.242-243



이 책에서는 특히 박완서 작가님 생활을 가늠케 하는 사진들을 담은 페이지도 있다. 시골이 좋다고 자랑처럼 한다 해도 꽃을 좋아하며 깔끔한 차림에 세련된 서울 사람인 작가님이 난 좋다. 사진 렌즈를 의식하며 정면으로 찍은 사진이나, 일상을 누리는 모습 그리고 자연스럽게 밝은 미소를 띤 작가님의 얼굴에서 글에서 만났던 작가님이 연결 지어졌다. 평온함과 안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호원숙 작가님을 통해 소개된 박완서 작가님의 손때가 묻어있는 사물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앤티크하면서 만질만질 잘 관리된 듯 보이는 물건들은 그를 향한 먹먹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작가님의 에세이 중간중간 인상적인 구절을 예쁜 바탕에 크게 적어 놓은 쪽들도 너무 좋았다. 찍어서 자주 보고 곱씹어 보고 싶은, 핸드폰 바탕화면에 놓고 두고두고 읽어보고 싶은 문장이다. 책표지와 내부 그림 디자인이 박완서 작가님의 글의 감성을 더욱 센스 있게 살렸다.




그런 박완서 작가님의 이 책을 갖고 있어서 좋다.

두고두고 꺼내보고, 낭독하면서 또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감동도 마음에 품으려 한다.

맞아맞아! 하고 가슴 팍 치는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의 사이다 한 잔 들이켜려고 한다.

몸이 들떠 있거나 무력할 때,

차분한 마음으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차근차근 곱씹으며 이 책을 읽으려고 한다.

읽지 않아도 책 제목만 보고도 위로받는 이 책을

두고두고 책장에 담아두고 눈길을 두려 한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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