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첫문단이다. 참 강렬했다.
이 책은 자전적 소설로 사회주의자의 사상으로 뼛속깊이 채운 아버지를 둔 저자의 글이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다는 사람의 부고를 들은 적은 나도 없었다. 이건 뭐지?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사인을 독자에게 던져놓고, 저자는 자신에게 차근차근 다가오는 조문객들을 맞이한다. 저자는 외동딸이었다. 아버지의 삼일을 치르며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과 엮였던 아버지의 인생을 마주하고, 아버지 인생에서 은은히 비추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마주한다.
아버지를 혹은 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책들은 분량이 적든 많든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필자의 기억을 통해, 사건을 통해, 사물을 통해 그렇고 그런 식으로 기억되었는데, 이렇게 장례식의 며칠을 토대로 한 사람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잘 버무려내는 책은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따르던 학수, 그리고 황사장, 사부님의 아드님에, 혼혈의 어떤 미성년 아이, 아버지의 옛 부인의 여동생에, 어머니의 옛남편의 시동생, 잘 죽었다며 지팡이 짚고 오던 어르신, 증오하며 원망하던 작은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을 외롭게 하지 않으려던 이들이 이렇게 많던가? 이 책을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 친정아빠를 떠올렸다. 우리 아버지한테도 내가 모르는, 우리의 어처구니 없는 가정사를 드러낼 사람들이 나타나려나? 앞으로도 아빠와 연관된 것을 떠올릴 때 이 책이 바라보는 아빠의 시각을, 인물들을, 그 사람들과 아버지와 나 사이에 어우러진 따스함이 생각날 것도 같다.
사회주의자였지만 아버지였고, 아버지였지만 냉정한 현실주의자였고, 현실주의자였지만 여느 다를 것 없는 남자였다. 사회주의자였지만 '노동'은 힘들어 했고, 아버지였지만 딸아이 앞에서 다른 여인의 엉덩이를 만졌으며, 현실주의자였지만 '긍게 사람이제!'를 외치며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무조건 도와주러 달려갔다. 남자였지만, 어머니의 남편으로 남았다.ㅋ
저자의 조소를 따라 나도 수차례 웃어댔다. 솔직히 '더 있나' 즐기기까지 했다. 앞뒤가 다른 부모님의 모습에 웃음지으며 지적하는 건, 우리집만의 일이 아니라는 공감의 웃음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생활을 보낸 6년 후, 딸과 아버지 사이는 어색하게 변해버렸다. 딸은 아버지와의 옛적 추억을 떠올렸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기엔 많은 시간이 지났다. 딸과 아버지 사이에 공간을 만든 멈춰버린 6년의 세월은 장례식이라는 뜻밖의 시간에 들이닥친 조문객들이 보내어준 아버지와의 이야기 덕에 조금씩 좁혀져간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와의 띄워진 사이가 가까워질 무렵, 차디찬 침대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드디어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들을 저자는 쏟아내고야 말았다. 초반에 같이 웃었듯, 이 장면에서 나도 같이 울었다. 울컥하며 뜨겁게 올라온 신음을 휴지로 꾹꾹 눌러닦았다. 그제서야 웃음은 멈추고 누릉지를 맛있게 눌러주던 아버지, 나를 데리고 장에 데리고 가던 아버지, 다른 아들보다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버지, 내가 화장실에 던져놓은 담배꽁초를 모른 듯 치운 아버지가 보였다. 눈에 띄게 보이진 않아도 은근한 정과 배려가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네 그래요. 저는 저만 생각하는(제가 받지 못한 것만 떠올린) 그런 딸입니다. 아빠...
사람이 죽을 때 그의 업적과 공로를 보며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시대의 너무 아까운 인물이자 별이 떠났다'며 말이다. 대단한 사람의 죽음을 대할 때,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씁쓸해 했다.
그런데 기존에 읽었던 <튜브>라는 책에서도 그렇고, 이 책에서도 그렇고 모든 인생에서 작게나마 남긴 흔적이, 작아도 누군가에게는 큰 힘을 준 이의 자취가 더 값지게 느껴진다.
여러가지에서 실패한 인생을 보였다고, 죽음 직전까지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룩하지 못하였다고 인생의 성패를 논할 수 없는 걸 이 책으로 더욱 절감한다.
또한, 우리 아빠를 다시한번 바라본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나중에 남들이 알려줄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알려줄 아버지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그것은 데칼코마니의 접은 종이처럼 일치하고 있을까? 나는 아버지를 다 알고는 있을까?
이 책을 읽고 한바탕 눈물을 쏟아붓고, 얼마 전에 다녀온 친정을 한번 더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친정엄마의 생신을 축하해드리고 훌쩍 서울로 가버린 첫째딸과 대화의 시간을 넉넉히 못 가졌다고 친정아빠는 적적하고 서운해 하셨단다. (엄마한테 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오지 말란다. 엄마 일하느라 우릴 상대하기에 평일은 힘들다고... 친정은 조만간 가긴 글렀고, 아빠한테 전화나 한번 드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