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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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반을 읽는 누군가가 말한 말은 맞았다.

"지금 읽고 있는데 충격적이에요."

이 책은 9편의 단편소설 묶음집이다.


1.어느 시인의 죽음

첫 소설 <어느 시인의 죽음>에서부터 나오는 첫 그림 즉, 동그란 모양의 그림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생택쥐베리 <어린왕자>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귀여웠다. 여기에서 내가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나 잠깐 멈칫했다. 설정에서부터가 신선하다못해 충격에 얼떨떨한데, 공포 자체인 외계인이 뱉어내는 말들이 가관이었다. 엄마 생일이라 가봐야 한단다. 인간이 먹는 청국장, 보드카, 햄버거부터 BMW, 아스팔트까지 다 먹어봤다며 인간이 가장 맛있다며 인간과 협상을 한다. 외계인 때문에 어처구니 없어 웃고 있는데, 지구 속 인간의 현실은 '좌절'그 자체다. 좌절과 파괴 속 인간의 삶을 읽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쓰려왔다. 흐름이 어디로 갈 줄 알 수가 없었다. 이 책부터가 시작이었다.


2.라하이나 눈

남을 위해 대신 운동을 해 준다? 가진 자는 먹고 싶은대로 실컷 먹고, 눕는다. 그리고 운동은 베타가 대신 해 주니 건강은 걱정없다. 설정은 SF적이지만, 현실은 지금과 지극히 맞아떨어진다. 약자가 달리므로 강자를 살린다. 약자는 달릴 수록 일이 부과되며, 일이 부과될수록 강자는 약자를 '물질'이자 '도구'로만 본다. 그 결과 약자에게 주어지는 최후는 죽음이다. 마치 소설로 마르크스 <자본론> 속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습과도 같다.


3.기린의 심장

꿈을 꾸고 나온 듯한 소설이다. 상상에나 있을 법한 세계에 다녀왔다고 말해주는 경찰의 말은 비현실적이지만, 꼭 그런 일이 있었을 것만 같다.

'왜 심장이 하필 기린 것이었을까?(길이로만 봐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크랜드 같은 존재여선가?)', '왜 소녀는 기린의 심장을 가져가지 못했나?(자기가 죽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죽여줄 누군가를 찾은 건 아닐지..^^;)'. 갖지도 못할 것(기린의 심장)을 왜 가지려하는거냐고 묻는 건가?

이해는 하나도 못하겠고 의문만 맴도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었다.


4.마왕의 변

정말 골 때리는 마왕이다. 마왕의 부하도 마찬가지다. 싸우러 왔더니 대뜸 "점심 먹었냐?"고 묻는다. 허이구 욕도 찰지게 잘한다. 용사와 주변인물과, 마왕과 부하들 사이에서 난 맘 다 내려놓고 웃었더니, 마왕이 갑자기 진지하다. 그런 상황을 이렇게 세 글자로 말하지! 갑. 분. 싸!!

현실과 이상 중 현실을 택하고, 공존과 독존 중 '독존'을 택하는 모습이 우리 어른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왕은 저 너머에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지?


5.허물

뱀이라 징그러웠다. 묘사 또한 징그러웠고, 이 책의 시작과 끝이 결국은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데에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전래동화같기도 하고, 단순히 스토리만 읽어냈는데, 문득 우리 인간이 꼭 '뱀'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몸은 꼭 허물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벗어나면 과연 다른, 새로운 개체가 될까? 우리에게 허물은 어떤 의미일까? 역시나 이 소설의 현실도 너무나 슬프다.


6.하얀 바다

이 소설에 나온 <야밤피라>라는 원주민의 곡이 꼭 실제하는 것만 같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당신입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진짜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둠이 삼키기 전에, 마음이 슬퍼지기 전에.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이 책도 하염없이 읽어대기만 했는데, 불임부부의 아픔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 생명의 존재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두 사람을 두렵고 혐오하고 멀어지게 할 수 있을만큼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조금이나마 헤아린다. 누군가에겐 간절한 생명이 오지 않고, 누군가에겐 기다리지도 않은 생명이 온 대조적이면서도 잔인한 현실에서 쓴내가 난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두 사람은 이젠 어쩌지?


7.경계

정년퇴임을 한 우민영은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우민영은 기억이 안 나지만, 상대로부터 기억 안 나는 이야기를 접한다. 우민영에게 잘 못한 듯이 죄책감 던져주는 사실을 말해 주고선, 편지 발신자는 다 이해한다는 식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는 일말에 고마움보다는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 그건 '당신(우민영과 같은 당신)'의 잘 못이 아니다. 그 경계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8.연극의 시작

무서운 일에, 두려운 상황이다. 내가 그 자리에 묶여 있는 듯 답답하고 무섭고 온 몸이 바르르 떨리는 듯 괴롭다. 칼날이 내게 향하는 것 같고, 불이 내게 이는 듯 하다. 나는 억울한 산재의 피해자인데, 그리고 내 미래도 도려져 나갔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다른 사고에서 내가 시작었고, 끝이 되었다.

극도의 두려움과 절박함에도 그 연극 속에 시작과 끝이 된 채로 남아버렸다.

왜 아무도 잘 못했다고 말하지 않죠? 왜요?


9.25분

25분의 의미가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사람을 울고 웃기고, 살리고 죽이는 그 생명이 단지 25분만이 필요하다니. 짧은 시간 같다고, 중대한 시간이다. 왜 딱 떨어지게 25분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 소설도 현실은 처참하다. 그리고 그 속은 잔인하고, 알 수 없는 그 속내에 공포감 마저 든다.


여러 감정을 대면하도록 내 영혼의 '공'을 이리저리 튕겨보는 것 같았다. 작품마다 갈피를 못 잡겠다 싶었다. 웃다, 갑갑하다, 의아하다, 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여러 공간에 이리저리 튕겼는데, 그 와중에 난 후루룩후루룩 잘도 읽어내려갔다.

어느 덧 끝이었다.

심오하고 함축적인데 이렇게 잘 읽힐 수 있다는 건 작가의 필력 덕인 듯 싶다. "어려우니 그만 끌고가세요 쫌!!"이라고 부르짖었는데 현실은 책을 꼭 쥐고 읽는 내가 보였다. 그리고 가차없이 끌려갔다. 작가의 의도는 분명이 있었고, 알아차리는 건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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