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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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나 애 둘 데리고 제주도 보름살기 하러 갈래!”

9월 아이들 어린이집 폐원을 앞두고 내린 결심이었다. 남들 그렇게 가도 부럽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리라 생각도 안 했었던 제주도였다. 이왕 데리고 주구장창 있을 거 까짓 제주도 한 번 가보면 어때? 라며 객기를 부려본다.

왜 하필 제주도냐? 돈도 많이 들고, 위험하고,,,” 이런 주변의 만류는 예상한 바다.

강원도도 좋아. 또 집에서 숙박비 안 들고, 주변 다녀도 되잖아?” 하지만 주변의 걱정 어린 말들에 나는 이렇다 할 이유를 내밀지 못했다. 그래 많고 많은 내륙을 두고 왜 나의 선택은 제주도였을까?

(남들은 유럽, 동남아로 한 달, 일 년 살기도 잘만 하는데, 내륙이냐 섬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게 조금 우습긴 하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경제 사정에 맞추는 거니 우스운 건 넣어두겠다.)

 

베스트셀러여서 반응이 조금 누그러들면 읽으려 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까봐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이런 독서 연기는 이 책이 이번 달 독서토론모임에서 읽을 책으로 선정되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첫 장을 읽으면서 훅훅 빨려들어 간다. 곧이어 그의 스토리텔링에 빠져든 나는 마치 파리지옥에 앉았다가 갇혀버린 파리와 같았다.

저자의 말처럼 사람은 소설, 글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나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왜 제주를 택해야만 했는지를 알아차렸다. 4년 동안 익숙해져버린, 꾸덕꾸덕 때가 묻어 벗겨도 떼어 지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그간 쌓아 놓은 내 옆의 가구, 가전, 옷 등 나는 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단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지 내 자신을 낯선 곳으로 던져보면 어떨까 궁금했다. 날 모르는 그 어딘가에서 쫓기는 삶을 벗어재끼고 나와 아이들의 발길 닿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좋은 곳에서는 오래 머물고 별로인 곳에서는 미련 없이 떠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노바디가 싶었다.

익숙한 사람과 환경에서 벗어나 노바디로 홀가분한 삶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내륙은 언제든 내키면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섬에 떨어진 삶은 어찌됐든 그 안에서 주어진 시간을 버티고 보내야 한다. 좀더 노바디다운 노바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멀리 떠나면 내가 의식하는 사람들이 적을 것이고, 해야 할 일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게 된다. 낯선 곳에서 나는 내 자신에 그리고 내 가족에 몰두할 수 있으며, 현재 내가 맞이한 것들에 모든 감각을 자유롭게 둘 수 있다.

 

여행이란 주제로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가지치기마냥 뻗고 뻗치며 그의 사유를 펼쳐나간다. 내안에 늘 갇혀 사는 나는 내가 전부라 여겼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그에 각종 지식들을 끄집어내어 그의 글을 더 탄탄해졌다. 그의 이야기보따리는 마치 마술사의 모자에서 갖가지 천조각과 비둘기가 나오듯 한도 끝도 없이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다. 같은 상황, 같은 이야기 안에서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는 그의 글 속엔 남다른 관찰력과 시각이 돋보인다.

특히 오디세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로마 무식자인 내게 생소해서 흥미로웠다. 그 안에 인간의 숨은 본성을 꿰뚫었고 드러내주어 나는 식겁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길 원한다. 유명한 사람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욕망같지만 일반인도 다르지 않다. 낯선 환경에 던져지면, 자신을 증명하고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유치함을 무릅쓰며 자신의 소속과 업적을 떠벌린다. 가령 학부모 모임에서, 어떤 커뮤니티에서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과시하려고 각자의 말만 늘려대는 모습은 오디세우스에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 예나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삶을 여행으로 우리를 지구의 여행자로 본 것은 여행이 단지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보게 한다. 삶이 여행이다! 그렇게 삶을 즐겁고도 여유롭게 본다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는 우리는 왜 그렇게 분주하고 치열하기만 한지. 그의 글을 통해 삶을 보다 너그러운 눈빛으로 본다. 그런 삶을 보다 너그럽게 누리기 위해 그렇게도 여행을 하나보다. 그게 바로 여행의 이유는 아닐지. 이제는 제주로 갈 가방을 꾸려야겠다.

 

 

... 멀미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 오는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즉 자동차나 비행기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즉 자동차나 비행기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어지러움을 느낀다면 뇌는 이것을 비상한 상태, 즉 독버섯이나 독초를 먹었다고 판단하고 소화기관에 있는 음식물을 토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자는 멀미를 겪지 않는다. 차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뇌가 그에 맞춰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멀미는 뇌의 에측과 눈앞의 현실이 다를 때 일어난다고도 할 수 있다.

p.49-50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과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살인자의 기억법 > 작가의 말

p.63

 

...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p.63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p.64-65

 

...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 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p.68

 

...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p.78

 

...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p.79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p.81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p.109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p.117

 

..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의 환대가 필요하고, 적절한 장소도 주어져야 한다.

p.127

 

... 만약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 그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 그림자를 소중히 여겨라. 하지만 만약 그것을 잃었다면,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면, 남은 운명은 방랑자가 되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p.129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

p.132

 

... 국내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해외에 나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아는 것 같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p.165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 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p.179

 

뉴욕에서 살던 어느 날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여행 가고 싶다.”

지금도 여행 중이잖아.”

아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이런 거 말고 진짜 여행.”

마치 꿈속에서 꾸는 꿈같은 것인가? 아니면,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밀어넣으며,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인가?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p.193

 

인간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대면한다.

p.197

 

이주와 여행의 관계는 마치 현실과 소설의 관계와 같다. 현실은 어지럽고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자잘한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그중 어떤 것으 ㄴ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의 사건들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ᄄᅠᆫ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p.199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

p.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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