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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돼지, 소, 닭, 양, 개, 말,,,, 이번엔 보노보까지!
현실에 살아있는 12간지를 나열한 것 같은 이들은 최근까지 내가 읽은 책들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우연히 이러저러한 이유로 잡게 된 책들이 내 손을 거쳐 갔다가 이 책까지 드디어 다다르게 된 이유는 알 수는 없다. 신이 동물의 무언가를 내게 알려줘야겠다고 결심이나 한 듯 동물이 다뤄진 책들은 순차적으로 내게 왔다. 그리고 그 책들 안에서 연결고리들을 찾고 있다.
이 책의 시작은 한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도무지 의욕도 의식도 감각도 없게 느껴지는 한 청년을 보며 같은 무기력함과 어두움에 초반부터 김이 빠졌다. 그런데다 그 주변 인물들 또한 왜 그리 무력하고 암울한지, 가족마저도 생기를 잃은 듯 간신히 그 가족력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경험한 독특한 일들은 진이와 지니 사이에 끼어들 수 밖에 없는 동기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책에서는 “그냥 거기 가만있어. 뭘 하려 들지 말고”라는 주인공 민주의 간장종지, 즉 수없이 들으며 그의 내면에 깊이 박힌 목소리가 몇 차례 등장한다. 그 한 마디에서 나는 최근 개봉한 영화 <엑시트>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백수인 주인공에게 하는 말을 떠올렸다. “괜히 일 그르치지 말고 차라리 가만히 있어라!” 그 한 마디는 그나마 살아 보려고 자신을 단단히 하며 바르르 떠는 화분 가지를 똑 끊어버리는 행위처럼 무시무시했다. 동시에 보였던 그 한 마디가 현재 대한민국 청년이 기성세대에게서 듣는 유일한 말은 아닐까 싶어서 괜히 씁쓸했다.
또 한명의 청년은 진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 진이는 그 아픔 속에서 단단히 키워져 왔다. 어쩌면 민주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캐릭터일 지도 모른다. 퇴직 후에도 일을 내려놓지 못한 부모를 의지해 살아왔던 수동적인 민주와는 달리 자신을 지킬 이는 자신뿐임을 어릴 적부터 엄마로부터 들어왔던 억세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진이였다. 애쓰고 버텨서 지켜온 삶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퇴사일에 운명의 장난처럼 삶은 그녀를 모질게 거칠게 내동댕이 쳐버렸다.
내 삶이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니 지금 내 삶에서 죽음 이후 내 주변의 무언가가 되어 내가 살던 삶을 둘러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나는 옆집의 개가 되어 우리 아이들의 삶을 몰래 훔쳐보는 상상을 해봤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무기력함을, 내가 없는 아이를 보는 그 안타까움과 짠함을, 그리고 내가 처해진 것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정과 수용의 감정을 떠올리니 정말 두렵고 떨렸다. 지금의 삶에 대해 왜 그렇게 불만투성이고, 너그럽지 못했을까 싶다.
그런 여러 과정과 감정의 진행에 몰입되어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우리가 그저 바라보는 동물원 속의 동물, 그리고 음식으로 대하는 동물 즉 도구로써 대하는 동물들과 우리 인간을 서로 돌아가며 바라볼 때,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무자비하기까지 한지 그 깊은 속내를 진이와 지니를 통해 들춰낸다. 나 또한 진이,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살아야 하고,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린 얼마나 그걸 당연히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고통은 깡그리 무시한 채 나만 살아야 한다고 나는 그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강요하는가?
처음엔 단순하게 인간이 동물을 상대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동물을 약자로 확대해 대입시켜보았다. 동물 뿐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약자의 목소리에 대응했다. 그들의 봐달라는 행위에 우리의 구역이 침해당할까 되려 문을 닫아버렸다. 그들의 쓰러짐 앞에 우리의 안위와 안정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쓰럽지만 너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는 아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다. 드라마에서 연인에게 화가 나 뛰쳐나갔는데 택시가 기다렸다 듯 바로 잡힌 것 마냥 뭔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춘 듯한 상황들이 보일 때는 살짝 거슬렸지만, 영화 한편을 보는 듯 강렬한 상황과 그에 따르는 인물의 세밀한 사색의 절차와 내면의 내밀함을 꿰뚫는 것을 보면서 ‘그래서 정유정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젠 엄지와 검지를 총모양으로 만들어 빵! 쏘는 시늉을 내는 모습을 보면 진이의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다큐를 보며 열대 우림을 보게 될 때, 엄마와 동생을 보며 즐거워하던 지니의 모습이 생각날 것만 같다. 작가가 남다른 소재를 다룬 것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기억에 남을 소설이었다.
내겐 세상을 소리로 읽는 버릇이 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소리의 액면가보다 뒤에 숨은 감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낸다. 그런 만큼 시각의 통제도 덜 받는다.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타고난 특성이었다. 벌이 자외선을 감지하듯, 살무사가 적외선을 보듯, 나방이 야밤에 색깔을 구별하듯.
p.28-29
5분에 한 번씩 시계를 봤다. 볼 때마다 궁금증이 커졌다. 자판기 아저씨는 왜 이곳을 ‘갈 곳이 없을 때 갈 곳’이라 했을까. 정말로 그런 곳이라면 그다음에 대한 해답도 찾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갈 곳이 없을 때 갈 곳의 다음으로 갈 곳에 대한 단서라도. 혹시 있었는데 못 보고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p.31-32
짐작이지만, 나는 아저씨와 같은 코스를 밟아 이곳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아저씨가 그랬듯, 나도 갈 곳을 찾지 못한 자가 필연적으로 도착하는 곳에 이른 것이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골짜기 밑바닥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이었다. 흔히들 종착역이라 부르는 벼랑 끝이었다. 발을 떼버릴 것인지, 발길을 돌릴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p.35
“나는 네 친구야. 진이, 이진이.”
p.67
그게 어쨌다는 건데. 달려가 구조 활동이라도 벌이시게? 머릿속에서 이죽대는 목소리가 울렸다. 한 쌍의 젖꼭지처럼 모차르트와 나란히 붙어사는 ‘간장 종지’의 목소리였다. 종종 그래왔듯 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내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거기 가만있어. 뭘 하려 들지 말고.
p.82
화구가 닫힌 후, 나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깨달았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진실. 무슨 짓을 하든, 얼마나 후회를 하든, 해병대 노인의 부름을 듣던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뭔가를 하려면 그때 했어야 했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그때 그 순간에.
p.91
나는 아래쪽 가지에 발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순간 발로부터 이해 불가능한 정보 두 가지가 전달됐다. 하나는 나뭇가지의 축축하고 미끄덩한 표피가 살갗에 직접 닿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맨발이라는 걸 의미했다.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분명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추락하는 와중에 신발이 벗겨졌을까? 그렇다고 양말까지 벗겨진단 말인가. 그것도 공평하게 양쪽 다.
p.107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나 역시 내가 주인공인 상황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시점을 바꿀 만큼 주인공 선망증을 앓고 있지는 않았다. 오컴의 면도날 법칙에 따르면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내 꿈이 아니었다. 지니의 꿈이었다. 나는 지니의 머릿속에서 지니의 꿈을 관람한 것이었다. 가능하거나 말거나, 그게 정답이었다.
p.125
확신을 갖고자 애썼으나 나는 자꾸만 무너졌다. 확신은 애쓴다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확신의 필수 조건은 근거였다. 근거 없는 확신은 바람에 불과했다. 머릿속에선 답할 수 없는 질문만 빙빙 돌고 있었다.
p.126
무엇이 지니를 깨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니는 눈뜨는 순간 침입자를 감지했을 것이다. 침입자가 자기 몸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겠지. 지금의 이 세계는 차 안에서 던졌던 내 질문에 대한 지니의 답이었다. 지니가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는 질문.
지니는 잠들어 있던 마술 램프에서 뛰쳐나왔고 나는 지니의 램프에 갇혔다.
p.184-185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영혼에게 바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자유다.”
나는 늘 그래왔듯 내 영혼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서 버스 승강장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넋 나간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서 길 건너 병원 앞마당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내 문제는 사소하게 느껴졌다. 작아서 사소한 게 아니라 멀어져서 사소해진 경우였다.
p.205
내동 조용하던 간장 종지가 톡 튀어나왔다. 내 인생을 지배해온 금언을 환기시켰다. 괜히 뭔가를 하려들지 말고, 거기 그냥 가만있으라.
p.211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나는 이어서 말하라 보채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거울과 비슷하다. 원치 않는 진실이 명백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충분하게 알아들었다. 사실, 묻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내 꼴이 어떨지, 어떤 소식을 듣게 될지, 계량 가능한 단서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단서들의 총량을 구하지 않으려고 외면해왔을 뿐.
p.229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거야.
p.271
1차로 불려왔을 때, 나는 지니의 존재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2차 때엔 관찰자 시점으로 지니의 존재를 인식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후부터는 지니의 감정을 읽기 시작했다.
3차부터는 지니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책처럼 읽는 방식이 아니라 나 스스로 느끼는 방식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후에는 지니의 몸을 내면의 눈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다. 지니의 감정은 물론, 감정과 연계되는 사고까지 느끼고 있었다. 덕택에 지니의 몸 안 곳곳에서 울리는 두려움의 소리를 듣게 됐다. 귓속, 뱃속, 심지어 혓바닥 밑에서도 맥박이 둥둥거리고 있었다.
p.280
나는 혈관 속으로 새파란 불길이 내달리는 걸 느꼈다. 나를 향한 불길이었다. 지니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 나에 대한 분노였다. 지니의 행로를 예상했으면서도 예상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던 내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였다. 지니의 몸에 들러붙어 살길을 찾고 있는 몰염치한 내 영혼에 대한 분노였다.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느냐고 변명해봤으나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p.286
꿈속에서조차 나는 울지 않는다. 어머니를 부르지도 않는다. 어머니의 발자국이 끊긴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지런히 찍힌 이 세계의 발자국들을 돌아본다. 아무 흔적 없는 저편의 세계를 망연하게 건너다본다. 두 세계 사이로 정적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p.295
나는 정적을 잊고자 삶을 소리로 채웠다. 저 앞에 놓인 모퉁이를 향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내 발소리로. 잠시라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행여 틈을 비집고 정적이 끼어들까봐 두려웠다. 그 결과, 멈춰 서는 법을 잊어버렸다. 언제나 가드를 올리고 있으면 팔 내리는 법을 잊어버리듯. 킨샤사에서 지니를 만나기 전까지, 그로인해 삶의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쭉 그랬다.
p.296
절망이 덮쳐왔다. 격한 분노가 뒤따라왔다. 머릿속 압력이 높아지고 귀가 윙윙 울기 시작했다. 운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금의 상황과 내가 살아온 삶의 인과관계를 설명해보라 따지고 싶었다. 하다못해 허공에 대고 발차기라도 하고 싶었다. 의무실에 박 선생이 없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p.302
그중 가장 몰염치하고 가장 지능적인 약탈자는 바로 나였다. 지니의 몸을 무단 점령하고 정신마저 빼앗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내 처지만 돌아보느라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의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한 일이었다.
p.336
내게 돌아간다는 건 죽음을 택한다는 의미였다. 돌아가지 않겠다면, 지니의 삶을 훔쳐야 할 것이다.
이 냉정한 진실을 나는 냉정한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에 앞서, 무서웠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않느 ㄴ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쳐 와서 이성과 통제력을 한 손에 쓸어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미치광이처럼 철장 안을 굴러다녔다.
나는 사지로 밀어뜨리고 당신만 살아남은 스승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 왜 그랬느냐고.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운명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 왜 이러느냐고.
나는 운명도 어느 지점에선 공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다해온 자에게 비수를 꽂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비수를 꽂고도 모자라 비틀어서 숨통마저 끊으려 들고 있었다. 다른 꼴은 다 봐도 너 사는 꼴은 못 봐주겠다는 것처럼.
분노가 나를 활활 태웠다. 겨우 서른다섯 해를 산 내 인생을 생각하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중요한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곁길로 새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의 격랑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을 미루게 만들었다.
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램프에 불려온 후부터였다. 지니의 시점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내가 아닌 지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에 의해 인간들 속으로 불려 나온 후, 인간으로 인해 생사의 질곡을 넘나들고 인간을 위한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가 인간에게 자신을 통째로 강탈당해버린 지니의 삶을 , 지니 자신으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운명은 우리 둘 사이에서도 공평하지 않았다. 지니에겐 선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지니의 몸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지니의 삶에 쳐들어온 침입자였다. 지니에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있다면 나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너는 내게 왜 이러느냐고.
p.344-345
나는 내게 돌아가야 했다. 다음 교차가 오기 전에, 내 몸이 엔진을 완전히 멈추기 전에, 지니에게 지니의 삶을 돌려줘야 했다. 그것이 타당한 선택이었다. 나아가 지니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지니가 떠나온 곳. 나고 자란 자신의 세계, 밀림 속으로 이는 내가 수행해야할 삶의 마지막 의무였다.
p.345
그런데도, 알면서도, 겁이 났다. 이 세상에 내가 부재하게 되리라는 사실보다 작별이 무서웠다. 내 삶에서 유일무이하고 전적인 존재, 나 자신과 헤어지는 게 미치도록 무서웠다. 다시는 나로서 생각하고, 나를 의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p.346
내 인생이 행복했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래도 불운하지만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어쨋거나 전력 질주로 살 기회가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바람대로 이겨내고, 그런 다음에 또 이겨내려 기를 썼던 삶이 후회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만 이겨낼 때였다.
p.355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