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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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이 시대의 필독서로 지정해야할 책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고도 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이 꼭 읽어야할 책이다 꼭!

한국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는 유독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왜 그때 그랬어? 왜 그런 행동을 했어? 왜 그런 말을 했어? 왜 그런 옷을 입었어? 왜? 왜? 왜?

 다른 범죄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부분은 정말 괴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 강도를 당했을 때 우리는 피해자에게 왜 시간에 그곳에 있었느냐고 묻는가?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엇느냐고? 왜 돈을 가지고 다녔느냐고?


 책을 사놓고 감정소모가 클까봐 도무지 첫장을 열어보질 못했는데 이번 박원순 사건을 보고 더이상 사실을 외면하면 안되겠다 싶어서 책을 손에 들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책 내용은 술술 읽히고 오히려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정치 캠프 내부의 상황에 대한 정보또한 담담히 알려준다. 위력은 있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는 말이 얼마나 개소리인지, 미디어에 비춰지는 이미지와 실제 인간은 얼마나 다른지, 그가 갖고 있는 권력이란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상사가 건네는 술한잔 거부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성폭력 피해자에겐 왜 거부하지 못했냐고 묻는다.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미 위력을 가진 이는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피해자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김지은 씨는 살기 위해 뉴스룸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일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범죄자 안희정에 의한 피해자도 여럿이다. 아직도 그 안에 있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 피해자도 있다고 한다... 비단 이 일뿐일까. 제가 저지른 짓을 자살로 대충 무마해버린 범죄자 박원순이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고 박원순을 추모하고 있는 이가 상당하다. 한국 사회에 정의가 있다면...이젠 정말 바뀌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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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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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저번 연수원 갔을 때 첫 페이지를 읽었었는데 중반에 흥미가 떨어져서 다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오늘 카페에 오면서도 생각을 했지만 나는 약간 금방 싫증을 내서 여태까지 읽다가 중간에 멈춘 책들이 몇 권 된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Jules가 자신이 산 책 목록을 보내주었고 그 사이에 이 책이 끼어 있는것을 발견한 걸 계기로 다시 읽기 시작하여 드디어 오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 내용 자체가 그렇게 흥미롭진 못했다. Jules 와도 잠깐 한 얘기이지만 책 내용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엔 이미 나는 Jules 와 일상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의 배가 되는 시간동안 스스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그동안의 나의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고 조금더 구체화하며 죽음과 연계된 다양한 사실들을 접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죽음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싶다. 아래는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된 책 내용 일부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연명치료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바 있었다. 가톨릭병원에 입원 후에 의사들에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미 신을 만나러 갈 준비가 다 되었고, 하느님을 만나는 게 기쁠 뿐이다. 그러니 내가 혹시 쓰러지더라도 애써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께서 실제로 폐렴 때문에 호흡이 딱 멈춘 순간 가톨릭병원 의사들은 반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숨이 멈춘 순간 살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하게 된다. 그렇게 추기경께서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깨어나셨고, "고맙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이제 안 해도 된다. 나는 하느님께 갈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 같은 태도야 말로 저자가 책 말미에서 말한 '품위있는 죽음' 아닐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의 죽음...참으로 절묘하게도 오늘 Jules 와 통화 중 우린 왜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야 하냐고 지겨워 죽겠다고 말했었는데 그 이유를, 그 잊고 있었던 이유를 책 말미에서 깨달았다. 나는 죽기 직전 '그때 ... 할걸...' 하며 후회에 점철된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고자 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가 남는 내 마지막을 위해. 요근래 무기력함에 그 이유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다.


...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 후 대척점에 있는 삶을 치열하게 끌어안은 인생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품위 있는 죽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한 사람만이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자신이 존엄하게 어떤 방식으로 사망할지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내러티브로 인생이라는 마지막 장을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늘 죽음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유한한 삶에 감사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짐가 죽음의 과정에서 선택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죽음이 곧 품위 있는 죽음이 아닐까...



 고독하고 외로웠던 수험생활 중,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 인턴했을 때 보았던 환자들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내가 (병에) 걸릴 줄은 몰랐다." 이건 정말 거의 모든 환자가 하는 말이었고 아마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이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일 것이다. 심지어 나까지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죽는데 내가 죽을 줄 몰랐다는 사실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낙타가 모래밭에 머리를 묻는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나는 매일처럼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자다가 숨을 거두고 싶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수목장을 했으면 좋겠다. 엄마도 자신이 죽으면 수목장을 해 달라고 했다. 구체적인 품종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예전에 나는 내가 죽으면 내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줬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왠지 그건 너무 춥고 외로울 것 같다. 그래서 땅에 붙어있는 쪽을 택했다. 


 이러저러한 일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죽음이란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사실 이 생각은 일상을 살가는데 꽤나 유용한데,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내 삶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좀 더 쉽게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들에게 감사하게 되고 내 일상에 좀더 충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죽음이 항상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대책없이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는 현실에 좀더 충실하게 된다. 죽음과 좀 더 나아가 사고나 불행 등의 질병은 언제나 내 앞에 들이닥칠 수 있다. 그것들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건 무엇일까? 이런 생각 끝에는 항상 현실에 감사한 마음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보내야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내가 끊임 없이 책을 읽고 사유를 갈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내 앞에 닥쳤을 때, 결국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나는 그 모든 상황을 최대한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나에게 닥친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 스스로가 괴로운 감정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더 자주 공공연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나 또한 십분 동의하는 바이다. 죽음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휩쓸려 보내기엔 삶은 너무나도 찬란하고 소중한 것이다.


Memento Mori!


-더 읽어볼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Atul Gaw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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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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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1. 연수원 첫날


남작가가 남독자에게 전하는 이야기이며, 그가 설명하는 미국남자들은 놀라리만치 한국남자들과 닮아있다.

남작가임에도 불구 성차별 문제를 굉장히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도 이런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구나 하고 놀라웠다.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이 90퍼 이상이지만 이를 남자의 시각에서 풀어낸 것이 나름 신선했다. 이전에는 성차별 문제를 마주하면 분노하기 바빴는데 아무래도 남작가가 남독자들에게 특별히 '애정어린' 마음을 담아 전달하고 있어서 감정소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읽다보면 여성차별의 문제를 깨닫고 나아가 변화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데 솔직히 정말 이런 남자들이 한국에는 있을까 싶다. 과연 역사깊은 여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는 한국 남자들이 있기는 할까..?


책이 나에게 남겨준 것은 분노와 비난으로는 그남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긴 입장바꿔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잘못한건 하나도 없는데, 난 살면서 혜택은 커녕 군대까지 끌려가서 희생당한거 밖에 없는데 세상의 절반이 저에게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마치 어른이 애를 달래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애정을 담아' 조금씩 현실을 알려주는 수밖에... 분노가 묻어 있는 주장은, 최소 이 분야에서는 남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가녀리고 연약한 영혼을 가진 그들의 정신이 받아들일 수 있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선 '애정을 담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래는 책 구절 발췌.


...폭력적인 남성은 우리 같은 평범한 남자들로부터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다. 남자들이 '나쁜 놈'들을 용서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나 신경쓰는 것이 이에 속한다. 남자들이 남의 가정폭력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저변에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그 사람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남성들이 침묵을 지킬 때 그 침묵은 폭력적인 남성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하고 결과적으로는 남성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방해물로 작용한다...



...여성들은 맨박스에서 비롯된 남자들의 허세가 이런 갈등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안전과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상황들을 말하지 않고 속에 담아둔다. 심지어 여성들이 내게 털어놓기로는 만약 자신들이 성적 대상으로 취급된 경험을 전부 다 고백하면 자신의 남자 친구나 남편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이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성의 규범을 엮어놓은 맨박스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접착제는 호모포비아라고 할 수 있다.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게이처럼 행동하지 말고 성적을 끌리는 여자를 제외하고는 관심 갖지 말라는 논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남자다움의 정의란 '여자들이 할 법한, 여자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자들과 최대한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외적으로 관심을 허용하는 건 오직 성적인 목표가 걸려 있을 때로 한정된다..



...남성의 손으로 자행되는 여성 폭력을 여성들 스스로가 초래한 면이 있다는 주장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종종 들려온다. 여성이라면 남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남자의 자존심이 상처 입지 않도록 맞춰서 행동해야 한다는 발상은 남성들이 매우 자주 언급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이 힘없는 피해 집단에 강압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성들이 강압적인 처사에 반기를 들거나 평등을 주장한다면 그 결과로 발생하는 반작용(폭력)은 스스로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잘못된 시각을 반영한다...


*여성들을 학대하는 발언이나 폭력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남성들이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 방법은 남성이 저지른 폭력에 대처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대처할 책임을 여성들이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 하에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대응책이었다. 남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우리의 의도는 이번 강간 사건을 비롯한 각종 교내 성폭력 문제를 남성들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초점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맞춰졌다. 셔틀 차량으로 이동하게 된 남학생들은 더는 피해 여학생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그녀가 그 시간에 거기 있었는지, 그녀가 강간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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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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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7. 아마도 잊지 못할 제주도에서 읽음.



개인주의자 선언.

침대에 굴러다니고 있는 이 책을 보더니 어머니께서 한말씀 하셨다. '이런 책'좀 그만 보라고-.
'이런 책'이라는 표현에서 비치는 다소간의 못마땅함과 우려야말로 이전세대의 집단주의자들이 현대의 개인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아닐까. 하하.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일지 몰라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개인주의자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한국사회의 거대한 흐름 아닐까 싶다. 난 작가가 책에서 그 자신을 표현했던 것과 같이, 회식자리에서 술을 안 먹는 것보다 주목받는게 더 싫어 억지로 먹는, 그런 소극적 개인주의자다.

소극적 개인주의자의 입장에서 읽은 '개인주의자 선언'은 정말 구절구절 밑줄을 치고 싶을 만큼 공감가는 내용 투성이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재밌고 웃길 수가 있나.
오늘도 직장에서 느꼈지만 나는 사람이 싫다. 아니 좋으면서도 싫다. 아니 싫으면서도 좋은 건가?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의 온기는 어느정도 필요로 하면서도 어느 순간 타인이 내 공간에 한 발 들여놓으면 흠칫 놀라서 두 발 물러서는 그런 인간이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크면서 그렇게 변했다. 사람 대하는게 피곤하고, 기빨리고. 남들이야 어쩌건말건 그냥 나 혼자 내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그런 인간으로 컸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주의자의 일원으로서 변명을 하나 해보자면, 그래도 싹퉁머리 없고 지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되진 않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편이다. 책의 마무리 부분이 참 와닿는다.

Anyone can be cynical
Dare to be an optimist

실제로 하는 일은 없으면서 불평만 하고, 소위 평가질만 하는 사람을 볼테면 항상 들던 생각이다. 그럼 네가 해결책을 제시해봐. 그래서 네 주장은 뭔데? 뭘 하자는 건데? 그런 인간들의 공통점은 해결책 없이 그저 불평불만만 구구절절 뻐기면서(이부분이 중요하다. 자신이 불평할 줄 아는 영장류라는 데에서 벅찬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늘어놓는다는 점이다. 어떤 것에 대해 평가하고 깎아내리는 건 쉽지만 그것을 쌓아올리는 것은 어렵다. 이런 면에서 문유석 작가의 표현이 넘 웃기고 통쾌하다.

(중략)...노력이라도 해보려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안한다. 어짜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다 쇼일 뿐이라며


책과는 상관없는 내용일 수 있는데 나는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유는 약간 다르다. 사람은 혼자 있을때 내면으로 침잠하고 사유한다. 그러나 여러명이 모여 집단을 이루게 되면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각성상태에 접어들어 생각이 급히 짧아지고 어떠한 동물적 단순함에 생각이 매몰되는 것 같다. 집단주의에 돌아버려서 뭐만 하면 단체행동을 하려는 직장내 인간들(특히 40 50 대 아저씨들..)을 보고있자면 '멋진신세계' 속 인간상이 떠오르곤 한다. 소설속에서는 인간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그들이 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사유하지 못하도록 항상 집단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혼자 있으면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벌어진 양 취급하고 항상 집단에 속해있도록 강제한다. 마치 현대 사회의 모습같다. 우리는 직접 육체적으로 집단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손안의 핸드폰 덕분에, sns라는 것 덕분에 거의 매 순간 하루종일 집단과 동화상태에 있다. 아니 오히려 sns 때문에 구시대적 집단주의로부터 탈피한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더 편향적이고 흑백논리가 난무하는 온라인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좀 혼자 있을 필요가 있다. 구시대적이든 온라인이든 집단주의와는 이별을 고할 때도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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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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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9. 잔잔한 경악 속에서 어찌저찌 끝까지 읽음



이해가 갈듯 말듯한 채식주의자를 지나 충격과 경악의 연속이었던 몽고반점, 정신적으로 피로해 사흘 정도 쉬었다가 읽어내려간 나무불꽃은 담담히 가라앉아 삶의 지친 무게를 찬찬히 짚어보는 길이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를 건넨 것은 '나무불꽃'이었다. 아 솔직히 '몽고반점'은 내용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이라 읽으면서도 너무 피로했다. 그런데 한 사흘 쉬고 나니 마치 인혜가 다시금 기억을 회상하며 느꼈던 감정처럼 뭐 좀 무뎌졌다고 해야되나 덤덤해졌다고 해야되나. 인물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채식주의자'부터 찬찬히 되짚어 보자면 영혜는 어느 순간 문득 착취자의 입장에 선 자신을 깨닫고 스스로를 부인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 그렇게 꾹꾹 자신의 마음을 속으로 쌓고 인내하고 견뎌내다가, 그렇게 평생을 살다가 징그럽고 잇속에 밝은 남편을 만나고, 또 그때까지 살아왔던 것 처럼 삶을 인내하고 견뎌왔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그저 이렇게 견디고 숨죽이고 고분고분 살아오는 것만이 삶을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다 문득 제 지나온 궤적을 인식하게 되고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의식중에 꿈속에서 고깃덩어리로, 피로 나타나게 된 것이고.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남편에게 철저히 맞춘 삶을 살면서, 자신 스스로가 고깃덩어리라고 느껴진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순간 냉장고에 가득 쟁여둔 실제 고깃덩어리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더이상 그것들을 먹을 수 없었겠지. 아마 자신의 모습이 동일시 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순종적인 삶의 형태는 일순 유혹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타인에게 순종하고 내 목줄을 남에게 맡긴 채로 사는 게 오히려 외롭게 두발로 서서 인생을 맞는 것보다 더 마음이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특히 여자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런 삶에 대한 유혹이 육식을 향한 욕망과 혀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침으로 분출된다. 육식을 끊었지만 평생 육식을 해온자, 그래서 고기의 그 달콤한 맛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자의 고통...그 욕망에 고통스럽게 번뇌하는 그 모습이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 아닐까.

몽고반점. 그런 생각이 든다. 어짜피 사회의 규범따위 인간이 세운 규칙인데 좀 어겨서 뭐 어쩌냐 싶은. 제사상 홍동백서와 다를 점이 뭐냔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버텨내기만 하다가 파국을 맞이한 커플.. 이렇게 말하니 더없이 가벼워 보인다. 처음에 그 예술가행세하는놈이(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아예 나오지 않았던가?) 제 아내를 숨막혀했을때 정말 복에 겨워 똥을싸는, 정말 감사할줄 모르는 고오약한 새끼라고 생각했는데 더 읽다보니, 저를 사랑하지 않고 그저 견뎌내는 아내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잡아내고 그런 감정을 느꼈구나 싶다. 꽃그림..나비가 꽃에 끌리듯 그도 점점 식물이 되어가는 영혜에게 무의식적으로 끌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온갖 날개달린 것들을 가슴에 담았고 특히나 나비를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내 느낌상 그렇다) 몸에 꽃 그림을 그려준다는 그의 제안은 영혜에게 정말 가뭄 속 빗줄기 같은 제안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마지않는 식물의 삶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 둘이 몸을 섞을 때도 영혜는 행복했을 것이다. 진정한 식물이 된 것 같은 기분..그런걸 느꼈겠지..

나무불꽃. 가끔 드는 생각이 있다. 사람은 결핍 상태에 있을 때 더 창조력이 높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 결핍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더 예민하고 풍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딘가 지나가는 말로 철학자는 고난? 고통? 속에서 탄생한다고 했던 것도 같다. 고통과 우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지난한 삶에 대한 지침 속에 허덕였던 기억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조각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싶지 않다.

사실 난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를 다음 구절 때문에 좋아했다.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삶은 참 지난하고 지치는 것이다. 가끔 보면 삶은 견뎌내는 것 그 자체같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것...
요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평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잔잔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인혜의 사고가 절절히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힘겨운 삶의 문짝이라도 두들겨 본 기억 때문에 '나무불꽃'은 약간의 허무함과 무상함 그리고 다소간의 울분을 내게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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