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 한글판
조지 오웰 지음 / 반석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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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후기작 '동물농장'과 '1984'가 최초로 번역된 것이 어느 나라 말인지 아는가?

 

 

 

 

 

 

 

 

 

 

 

 

 

 

 

 

 

 

 

 

 

 

 

 

'한국어'이다. 왠지 뿌듯하지 않은가? 

 

 

더더구나 이 두 작품은 영국에서 출판에 어려움을 겪은 책이다. 그런데 정작 해외 판의 번역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의 문제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확장이 가속화되고 세계에서 가장 심한 이데올로기 충돌이 일어나고 있던 한반도에서의 심리전의 일환으로 미국정부가 판권을 구입하고 번역 비용을 지원하여 한국어판 출판을 한 것이다. 이 후 다른 몇 나라 언어로의 번역도 미정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많은 책이 무상으로 지원된 까닭에 이 두 책은 우리에게는 너무 친숙한 책이 되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나라 내에서도 수 많은 다른 버전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2013년 올해 만해도  3권의 신간이 존재한다.) 아울러 유명한 작품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작가인 조지 오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일까? '1984'와 '동물농장'이 공산주의 독재국가를 비판하는 것으로 볼 때 작가에 대해서도 관재홍보(?)가 가능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이런 저런 다각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성향을 굳이 정의하자면 사색적 무정부주의자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보통의 경우 무정부주의자들은 우리가 아나키스트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불안정, 폭력적인 느낌처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사색적이라는 수식어가 말하듯 조지 오웰은 행동파나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순수한 의미에서 말하는 좌로나 우로의 편향을 보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시골(?)에서 밭에 채소를 키우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전혀 혁명적인 성향이 아님에도 반정부주의 성향을 가진 이유는 아마도 국가권력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이지 않았던 청년시절의 제국경찰의 경험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이 책의 내용은 영국의 장원 중에 하나인 매너농장에서 동물들이 각성을 하여 무능한 농장주를 몰아내고 동물농장을 경영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우화로 표현되어 접근성이 아주 좋은 작품인데다가 소설의 모티브가 볼세비키 혁명 전후의 실제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이 계급혁명이 허상 있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반공 교육용으로 아주 적절한 책이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농장에서 이야기 하는 바는 그렇게 단순히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로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반대는 무엇이며 사회주의의 반대는 무엇이냐 또는 자본주의 반대나 자유주의의 반대는 무엇이냐? 이렇게 원색적으로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확하게 구분하여 답할 수 있을까? 지금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방향이 다르다는 것과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역시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모호하기 그지 없고 여전히 관념적인 이야기이다.

 

만일 이런 흑백논리(黑白論理)로 만으로 동물농장을 본다고 해도 동물농장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만 나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실제 이야기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 정확히 표현되는데 그것은 돼지(동물농장의 지배계층)과 인간 농장주들(아마도 비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배층 일 것이다.)의 얼굴이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동물농장 밖의 농장주들을 현실세계와 그대로 대응을 하여 일부 사악한 농장주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물농장이 구소련(舊蘇聯)이라면 인간 농장 주는 영국, 미국 등의 서방세계의 대표적이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오웰은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소위 군사정권(문민정부 이전을 말함) 시절에 20~30대를 보낸 선배들이나 90년대 초 잠깐의 열정의 시기를 보낸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놀랄만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을 소위 운동권의 표현을 말하자면 '미제국주의' 정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웰은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 미국, 프랑스 같은 서방 자유주의 국가들 역시도 모양만 달랐지 동물농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런 의도로 씌어진 책을 반공 교육용으로 배포한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보여준 반세기에 걸친 코미디 같은 정책들(미국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제거한 사담 후세인은 사실 미국을 등에 엎고 성장한 세력이다.) 그리고 히틀러를 지원한 유대인들(미국 내 유대계 유력인 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계 국가 창설을 인정하게 하자는 의도에서 당시 신진세력이던 히틀러를 지원한 사실을 말 함.) 거기에 미국보다 더 위험했던 영국의 불장난들(현재의 아프리카, 중동문제는 대부분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결정했던 정책들에 기인한다.)을 보면 동물농장과 1984가 반공 교육용 교재로 보급된 것 고도의 전략이라기 보다는 이 작품들을 문자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아닐까 판단한다.

 

 

 

 

동물농장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부정적인 변화들은 결국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와 돼지라는 구별된 계급의 타락(?)에서 기인한다. 부르조아쥐를 몰아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다시 멘세비키와 볼세비키간의 갈등이 생기고 그 내부에서 또 다른 계급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사회주의의 철학적 바탕은 헤겔의 변증법에 기인하고 그 때문에 최초의 계급투쟁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었다고 해도 곧이어 다른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이미 이루어진 대로 또 다른 정반합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위 지도자 계층이 권력화 하면서 계급이 서열화 되었지만 권력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사유화 하면서 또 다른 부르조아쥐를 변질된 것이다. 농장의 권력이 소위 엘리트였던 돼지들에게 독점이 되자 돼지와 그들의 무력인 개에 의한 독재가 시작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일들은 소위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라는 다른 형태의 권력이 등장한다. 비교적 민주적인 분위기의 자유진영에서는 극단의 독재는 지속되지 않았지만 대신 돈이라는 독재 권력이 생성되었다. 이 권력은 정치적인 독재자 처럼 반대세력이 적고 심지어 이 권력은 사랑(?)받기 까지 한다. 더 큰 문제는 돈이라는 권력의 돼지는 외부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 안에 아주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동물농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몸이 아직 동물농장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는 이미 ‘동물농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거기서 거기’, ‘그 나물에 그 밥’이 되는 상황, 바로 돈 앞에서 변질되는 모습들이 너무 나 쉽게 발견된다.



 

내 안의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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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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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필자는 청소년 용으로 출판된 군주론의 설명서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두 전직 대통령, 노무현과 김대중이 서거한 시기여서 군주론에 대한 느낌이 더 특별했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국가운영방법을 당시 피렌체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젊은 메디치가 지도자에게 헌정하고 그 것을 기회 삼아 정계에 복귀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술된 일종의 ‘에세이’였다. 길게 편집해야 200페이지를 넘지 않는 책을 어째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읽지 않았는가는 개인적인 미스터리(?)이다. 2009년 12월에 관련 글을 쓴 것으로 보면 11월에 읽었고 2013년 5월에 제대로 된 텍스트를 읽었으니 4년 정도 걸린 셈이다. 2009년 10월에 유토피아를 읽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플라톤의 ‘공화국’ 이다. 그러면 소위 말하는 '3대 국가론'을 다 읽게 되는 셈이다. 웬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전투력(?)이 증가한 것 같은 심한 착각이 든다.

군주론은 고전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플라톤이나 모어 같은 지성들의 그것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 저작이 철저히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이 정치적 리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도덕적, 종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평가하고 이야기 하고 교육한다. 따라서 이상적인 리더, 왕, 권력자에게서는 보편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평가되는 어떤 요소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부연하자면 냉혹, 이기심, 폭력적, 반종교적 등이 그것인데 그러나 실제로 이런 특징을 전혀 가지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듯이 그것은 권력 주변에서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운 말 그대로의 이상적인 군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 내내 심지어 지금도 권력자에 대한 표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군주론은 정치, 권력, 지도자를 이야기 할 때 언급되어지는 책이다.




이상은 이상일 뿐

정치라는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이런 가르칠 것 같지 않지만 필자가 다닌 국민학교 시절에 사회시간에는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나마 정의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 기억을 꺼내보면 정치란 ‘정권 획득과 유지를 위한 일련의 활동’ 이었다. 어떠한 정의 보다 가장 정곡을 찌르는 정의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유형, 무형의 모든 활동이 정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 것에는 도덕적 관점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불철주야(不撤晝夜)의 노고(勞苦)'도 사회가 아닌 도덕이나 사상(아주 오래전 우리의 선배님들은 학교에서도 이런 과목을 공부했다.) 시간에 배워야 내용이다.  덕(德)에 의한 정치를 꿈꾸던 공자가 평생 자신의 뜻을 펼 수 있게 해줄 군주를 찾아 다녔지만 말년에 잠깐 그에게 실린 힘도 결국 현실의 권력자들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정권 즉 권력-'힘을 얹는다'는 의미 자체에는 어떤 형태이던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정권(그 것의 목적, 의미, 내용을 떠나 표면적으로) 획득 활동 자체에서 이미 수단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이상적 권력이나 이상적인 권력자는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아름다운 의미의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보기 좋게 하려고’ 이다.




‘군주’라는 이름의 직업을 이야기 하다.

군주론의 주제를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바로 ‘잘나가는 군주가 되는 법’이다. 군주가 어떤 방법으로 군주가 되었던 그 국가의 상황이 어떤가에 무관하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단 군주가 되면 군주로써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군주가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은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군주가 제 아무리 도덕적이며 선량하다고 해도 내외부의 요인으로 국가 전복되는 사태야 말로 군주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국가가 늘 전쟁이나 내란, 그리고 경제적 위기, 내부적인 정쟁에 휩싸이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바이다. 

물론 군주론의 주장을 다른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마키아 벨리가 살던 시대와 이탈리아라는 지역적 문제 때문에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군주론의 주장을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로 국한시켜 본다면 군주, 권력자의 실제적인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게 고찰한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왕, 독재자, 정치적 리더 등의 소위 권력자를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해보면 ‘군주론’ 적인 가치관은 꽤 쓸모가 있다. 





군주론의 가치와 한계

보통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삶의 수준이 퇴보하지만 않는다면 정치에 대해서는 일체의 관심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요순(堯舜)임금 시대에서 현대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이르기 까지 통용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데? 라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심과 의식을 구별해야 한다. 뉴스를 전혀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정치는 주요한 관심 거리이다. 그러나 관심을 가졌다고 또는 현실 정치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정치적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냥 궁금해 하는 수준으로는 설사 당시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고 불만이 끓어 오른다고 해도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는 공 염불(空 念佛)이 된다. 

따라서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이 도덕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철저히 실무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키아 밸리가 인식한 백성, 시민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현재의 삶이 지속된다면 설사 그것이 노예의 상황이라도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맞는 판단이고 이것은 현대에서도 틀렸다 할 수 없는 판단이다. 소위 소시민이라고 불리는 과반수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자신의 의지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들에는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현대의 일부 시민들이 현실정치 참여나 발달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실제 현장에 뛰어 든다고 해도 이들의 대부분 역시 당장의 생존문제에 직면하면 소시민의 특징을 드려내기 때문이다. 

군주론의 저자의 바램과는 다르게 그의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아마도 당시의 권력자들은 이런 생각을 지난 사람을 부리는 것 보다는 그가 쓴 책을 보는 것이 속편 했을 것 같다. ) 그의 사후에 지난 몇 백 년의 역사에서 군주들 권력자들, 독재자들,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는 이들과 그들이 되고 싶은 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교황청에서는 이 책을 금서(禁書)로 정하기 까지 했다. 그의 주장은 비도덕적이고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는 등의 이유였는데 실상은 교황청의 타락이 고스란히 기록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공자가 평생 자신의 정치실험을 지원할 군주를 못 찾았던것 처럼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딜레마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주장한 대의명분과 신의 등의 도덕적인 군주와 대의 정치는 보기에 무척 좋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군주의 실제 권력행사와는 많은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 방법이었다. 반면 마키아 벨리의 방법론은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적절해 보였지만 사람들에게 욕 먹기 딱 좋은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권력은 인자의 얼굴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공자, 마키아벨리 모두 참조는 할만하지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다.




군주론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

현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고도화 조직화 되고 체계화 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이나 군주 주변의 몇몇 인물들에 의해 국가나 국민들이 좌지우지(左之右之)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일부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고 있는데 전 인류의 흐름에 역행(逆行) 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시스템에서는 군주론에서 이야기되는 군주의 특성이나 능력 그리고 인성, 지혜등은 현대의 최고 권력자가 아닌 관료에게 적용될 것이다. 현대의 국가는 권력자가 아닌 관료와 시스템에 의해 운영이 되기 때문에 마키아 벨리가 주장한 방법론들은 관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관료가 아닌 관료시스템에 적용하는 것이다. 관료들도 군주론에 등장하는 군주들처럼 결국에는 실정을 한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덜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적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인다.

끝으로 우리가 군주론에서 찾아 낼 수 있는 위안이 하나 있어 소개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앞에서 줄곧 이야기 했듯이 도덕이 배제된 군주론의 시각은 현대인이 관점에서 보면 마치 전제군주나 독재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모든 논의에는 반드시 지켜야 군주의 의무가 하나있다. 국민, 시민의 지지위에 군림해야 하는 전제조건이다.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주는 아무리 선량하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어도 그 자리에서 반드시 내려진다는 것이다. 히틀러를 생각해보면 이 전제는 희망일 수 없다. 하지만 권력자 자신이나 주변인들 또는 정치인들 그리고 금권을 지닌 기업인들 모두 그 권력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반드시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마키아 벨리의 주장의 요즘시대에 와서 더더욱 위안이 된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자면 이상적인 군주는 실제로도 없지만 그것이 영원하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누가 누구 보다 조금 더 빨리 또는 조금 더 오래 기다리에 매달려있느냐의 차이를 이야기 한 것이 바로 군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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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승리의 과학 - 빅데이터는 당신이 무엇을 선택할지 알고 있다
고한석 지음 / 이지스퍼블리싱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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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승리의과학

 
소위 IT업계의 끄트머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래도 IT트랜드(Trend)에는 살짝 귀를 열어 놓고 신문조각을 읽듯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으로서 올해의 주요 이슈라는 빅데이터(Big Data)에 전혀 무관심할 수 만은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일만 해야 하는 요즘 상황에서는 빅데이터의 도입은 커녕 제대로 알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최신 동향을 귀동냥하는 동아리 게시판에서 빅데이터에 대해 누군가 흘려주는 조각들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빅데이터 활용에서 하둡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순간 빅데이터는 갑자기 프로그램이라는 큰 벽으로 가로 막혔다. 그리고는 그냥 그냥 문자 그대로 ‘올해의 키워드’로 돌아가 버렸다. 대충 감은 잡았으니 위안을 삼으며 말이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보통의 경우 책을 잡으면 한 달음에 읽어 나가는 습관 때문에 어떤 종류의 책이던 하루에 읽는 분량이 일정하지만 이상하게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었다. 내용은 어려워서도 아니고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알고 있던 것들을 지워버리자. - 빅데이터란?

1/3 정도를 읽은 후에 그 동안 알고 있던 조각의 지식들을 모두 버려야 했다. 빅데이터라는 것이 세상에 산재한 모든 자료, 즉 모든 콘텐츠들에서 특정 목적에 유의미한 것을 산출해낸다는 개념을 제외하고는 빅데이터에 대한 오해들을 모두 지워 버려야 했다. 가장 큰 오해는 바로 방법론에 대한 것이었다. 흔히 빅데이터가 어떤 기법이라는 식의 이해가 쉬운데 사실 빅데이터는 새로운 기법도 아니고 어떤 기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빅데이터는 개발자들이 다루는 솔루션만을 의미하지도 않다. 빅데이터가 산재한 모든 콘텐츠를 모아 분석한 후에 의미있는 콘텍스트로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통계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빅데이터의 방법론에서는 프로그래밍 보다는 통계분석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사실 협의에서 보면 빅데이터에서의 IT의 역활은 대량의 데이터를 다수의 방법으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화일시스템의 적용, 빠른 처리 능력을 가진 하드웨어와 대량의 데이터 저장을 위한 크고 안정적인 클라우디 컴퓨팅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실 오마바측의 디지털팀 책임자인 조로스파스의 회고에서 보듯이 그들이 새로 만든 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수행한 것은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것들은 적절히 배치, 연결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한 것이다. 따라서 ‘빅데이터=하둡’ 이런 식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어쭙잖은 지식과 무식한 추진력으로 IT에 대한 불신만 키울 수 있다.


사실 필자가 빅데이터를 공부해보자 했던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던 하둡도 알고 보면 빅데이터 용이라기 보다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FAT32같은 화일 저장과 호출 방식에서 진일보한 대용량 화일 시스템 방식 중에 하나일 뿐 이다.

그 동안 어설프게 알고 있던 빅데이터에 대한 지식들을 모두 모른체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

빅데이터라는 개념이 만들어진(사실 거의 모든 IT의 기반이 시작된) 미국에서도 빅 데이터를 적절하게 이용한 눈에 띄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빅데이터라는 개념에는 집단지성 같은 개념도 포함되어 있기(필자의 의견) 때문에 아마존 같은 사례를 빅데이터의 사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빅데이터는 자체 시스템 밖을 포함하고 고정된 형태의 데이터가 아닌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디지털 데이터를 모아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 쇼핑몰이나 다른 목적과 물리적으로 분리된 서비스라도 연동이라는 조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흐름을 빅데이터 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2012년 오마바 선거캠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기술적 실험과 진보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혁신이 어렵지만 효과는 폭발적 인…

일반 기업의 마케팅 활동에서는 제품의 특징을 정의하고는 일부터 마케팅 대상을 정하고 그들의 특징을 정의하여 소구점을 찾아내는 작업 그리고 실행과 실행 후 성과를 측정하는 일련의 절차에서 오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각종 통계치, 소비자의 성향을 분석한 이전의 자료, 선별된 소비자 그룹에 대한 인터뷰(FGI) 광범위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동원한다. 심지어 이 분야 최고의 베테랑의 감(?)까지도 동원한다. 모든 과정들의 목적은 당연히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의 판매 촉진이지만 한편 마케팅에 소요되는 모든 자원 대비 결과(ROI)을 높이자는 목적도 크다.

선거도 메커니즘을 보면 기업의 마케팅 활동과 동일한 원리가 적용이 된다. 다만. 그 규모나 중요성이 매우 높다 보니 자칫 기업에서는 흔하게 행해지는 마케팅 활동이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권은 어떤 권력자의 의지나 이익집단의 압력행사, 공공연히 퍼져있는 관료주의 등으로 인해 분석과 평가 없이 캠페인(Campaign)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2008년 오마바가 미국 대통령을 당선되었을 때 그의 당선이 SNS의 힘, IT의 힘 입은 바 크다고 한 적이 있다. 2008년 대선 때 오마바 캠프가 IT자원을 충분히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정치권은 여전히 일부 전문가라는 이들의 소위 ‘감’에 의해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라서 그 정도로도 획기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기술 그리고 리더


오마바 캠프는 대선 1년 6개월 전부터 캠프를 차리고 자신들의 방향성을 잡는데 이 때 가장 필요하다고 인지된 것이다. 유권자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일선 자원봉사자들(선거활동가들)에게 최적화되고 적중률 높은 예측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008년에 일부 시도는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들도 경험이 부족했고 민주당 내의 분위기상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2011년에는 달랐다. 2008년에 경험한 긍정적인 경험과 데이터를 통해 의사결정에 대한 신뢰 그리고 2억명이나 되는 유권자들의 상세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처리할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08년에 이미지 오바마는 기존 정치권에서 행해지던 권력자와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었었다. 또한 이번에는 캠프 책임자인 짐 메시나의 인터뷰처럼 ‘데이터를 통하지 않은 어떤 한 결정도 없다’고 라고 못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는 유래가 없는 엔지니어와 과학자 모집에 들어간다. 통계학자, 예측분석 모델링 기술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들이 대거 캠프에 합류한다. 오바마 캠프의 디지털팀은 300명이 넘었고 이들은 캠프 1년전에 이미지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롬니의 캠프는 시작에서 늦었고 예산도 비교가 안되었으며 롬니가 그 유명한 베인 컴퍼니의 컨설턴트 출신이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임에도 불구하고(어쩌면 이런 배경 때문에 당연 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을 주변에 배치한 후 해당 분야에 대해 그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모든 기술적 지원은 캠프에 입성(?)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자신의 회사에 외주를 주고 유독 서버들 만을 캠프 내에서 집중 관리하는 행태를 보였다. 보안 유지를 위해 데이터는 내부에서 관리하고 각종 서비스는 비용 절감을 위해 저렴한 용역 업체에 주는 전통적(?) 형태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오마바 캠프가 취한 몇 가지 혁신적인 전략

오마바 캠프는 키 데이터 일부만 자체에 두고 대부분의 서버를 전국적인 데이터 센터를 갖추 아마존에 맡겼다. 선거를 위한 시스템은 선거 막바지에 이르면 트래픽(traffic)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선거가 완료되면 대부분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자체에서 구축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엄청나다. 그리고 초기에 시스템을 구축하고 난 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시스템이 죽거나 예상치 못한 트래픽 폭주로 서비스가 먹통이 되는 경우에 원활한 대응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마존의 클라우드(Cloud) 서비스는 서버를 전국 단위로 분배할 수도 있고 트래픽이 폭주하면 자동으로 서버를 증설하거나 서버들의 성능을 조정할 수 있고 사용한 만큼만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비용 절감과 원활한 서비스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선거에 소용되는 소프트웨어와 APP, 웹사이트 등의 모두 디지털 팀에서 캠프 내 각 팀에서 요청하는 사양들을 정리하여 만들었다. 다만 기본적인 모듈들은 가능한 오픈소스(Open Source)를 이용하여 팀의 자원을 절약하도록 했다. 이 결정은 소프트웨어 운용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결정이다 상용 소프트웨어는 초기 도입 비용은 저렴하지만 조직의 요구에 맞게 바꾸는 작업은 상당히 비싸고 더욱 큰 문제는 변경하는데 시간이 어마 어마하게 든다. 거기다가 여러 가지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연동하여 사용하는 경우에 각 SW마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야 하고 자동화가 되지 않아 발생하는 업무 손실이 많으며 거기다가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외부 전문인력에 손에 맡겨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 소모가 심하다. 가장 큰 손실은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상용SW만으로 구성된 시스템의 경우 내부에 적절한 인력을 배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운용자체를 각각의 외주 업체에 맡겨야 한다. 거기다가 최악의 상황은 비싼 돈을 들여서 도입한 시스템에 대한 운용 노하우를 소유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팀을 구성하여 전문가들의 힘을 배가 시켰다. 오마바 캠프의 디지털팀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고 팀은 상위 조직이나 비 IT조직에 관리를 받지 않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관료적일 수 있는 캠프 분위기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충분히 발휘하여 캠프 각각의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최선의 툴들을 제공하고 때로는 적절한 선거 진행을 위한 제안을 할 수도 있었다.



빅데이터/ 빅리더, 누구의 승리인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캠프내의 디지털팀은 말 그대로 상종가를 쳤다. 그리고 오마바 캠프가 선거를 진행하면서 사용한 소위 ‘빅데이터’라는 전략(?)은 마치 승리 도구인 것처럼 유행을 하는데 필자가 결론을 지으면서 생각한 것은 과연 승리의 기술은 어떤 것이냐? 이다. 빅데이터인가 아니면 빅리더(보스)인가 이다. 빅데이터를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 사용된 기법이나 기술이나 서비스 모두가 성공의 중요한 요인들이었지만 그 이전에 리더(보스)의 올바른 판단과 추진력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빅데이터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빅브라더(Big Brother)의 문제는 쉬운 명제는 아니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오마바 캠프가 어떻게 데이터를 모으고 의미를 만들어 갔는지에 대한 소개에서 보면 개인정보가 제거된 채 우리의 일상 생활의 흔적이 묻은 거의 모든 데이터가 수집되고 거래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가공된 데이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다시 개인 식별 정보가 붙어서 사용된다. 자칫 개개인의 일상이 분석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이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은 개인, 기업, 국가 할 것 없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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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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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네뷰, 앙가주망, 레지스탕스 이들 프랑스 말은 저항, 분노를 말하며 불의에 대해 분노하며 저항할 것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요즘 젊은이들은 모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뭐지?)이 알고 있듯이 레지스탕스는 독재 즉 파쇼(파시스트)의 가장 극명한 예인 나치스의 프랑스 점령에 대항했던 저항세력을 말한다.

 

'분노하라!'라는 선동적인 구호가 제목인 이 책은 레지스탕스로 외교관으로 살아온 노 투사(老 鬪士)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호소의 책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특별한(작가와 예술가인) 부모 밑에서 독특한 분위기에 자라고 아울러 지금까지도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건강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철학적으로는 헤겔과 학교 선배인 폴 샤르트르에게 영향을 받았고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 활동과 나찌 치하에서의 수감생활 그리고 UN의 설립 과정에 참여 함으로서 누구보다도 역동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를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들이 선배들이 만들어온 자유와 박애의 역사를 뒤집는 것에 대해 분노를 감추기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서는 과거와 지금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소위 말하자는 반정부 학생운동에 연관 되 사실상 추방된 홍세화씨의 책, '파리의 택시 드라이버'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똘레랑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포용력' 과 자유(단 특별한 상황에서라는 제한이 붙은)정도로 말할 수 있는 단어인데 작가가 프랑스에서 유색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프랑스인들의 개방성, 따스함 등을 말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는 어떤 서방국가 중에서도 외국인들에 대해서 개방적인 나라였고 사회복지 제도가 잘 운영되던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똘레랑스 다소 낭만적인 단어와 부러움이 대상이던 프랑스의 분위기는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財政危機)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국가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지만 특히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의 변심은 특별한 위기 의식을 가지게 한다.

 

 

 

 

레지스탕스가 만든 사회보장 제도?

 

 

프랑스의 사회제도의 핵심은 바로 약자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생존에 대한 보장된 자유이다. 인종과 성별, 나이 그리고 국적에 상관없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든 약자들에 대한 생존 보장과 최소한의 인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서비스인 것이다. 이것은 2차대전 종전 후 레지스탕스의 정신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잘 만들어진 사회보장 제도와 레지스탕스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궁금해진다. 레지스탕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나찌 점령치하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반(反)나찌 운동을 말하며 그 협의로는 나찌 치하의 프랑스 반군을 말하기 때문에 레지스탕스 정신에 입각한 사회제도라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저자(著者) 스테판 에셀의 설명에 따르면 레지스탕스의 대척(對蹠)은 나찌였는데 나찌는 그것은 독재(獨裁)라는 가장 사악한 권력체제(權力體制)하에서 국가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 인종주의(人種主義)로 군중을 선동하는 악(惡)의 세력인 것이다. 레지스탕스가 봉기(蜂起)한 이유는 표면적(表面積)으로는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의 탈환에 있지만 그 정신은 권력의 부적할 사용과 그것을 통한 민중에 폭력과 착취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의 내부에 사회주의 요소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 정부는 권력에 기대어 힘 없는 자들이 개인 또는 조직(정부 또는 회사, 기타 이익 집단)으로부터 불이익이나 유/무형의 폭력을 당할 경우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자는 취지로 사회보장 제도를 만들게 되었고 그 기반은 레지스탕스 정신(반나찌운동, 노동운동을 포함한다.)에 두었다. 그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뿐 아니라 관료기업들도 독재권력이나 정치조직처럼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60여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이 존재했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 경이롭다. 앞으로 인류가 겪게 될 기업관료체제(企業官僚體制)의 위험성을 정확히 파악한 조치이다.

 

 

 

무관심의 문제

 

현대 사회는 여러 이유로 개개인이 세포화(細胞化)되어 간다. 어떤 집단에 소속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소속감은 희박하다. 그나마도 대부분 그 관계가 움직이는 힘은 바로 돈이다. 또 과소비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 경쟁’을 조장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각 개인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가치관(價値觀)도 미약(微弱)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매스 미디어, 즉 물건을 팔아 소비를 조장하는 기업의 논리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비라는 행위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귀찮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요즘 소위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것이 잘 이해가 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는 사람들의 권리나 생존권 등 중요한 사항들을 권력자(정치권력, 경제권력)들의 구미에 맞게 바뀌어 나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만일 사람들이 지금처럼 계속 소비하고 즐기는 것에 만 관심을 갖고 산다면. 쭉 '생각 없이 산다'면 인간들 모두는 그 들 중에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 들 중 가장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착취당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된 후 버려지는 악의 소굴로 변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간의 미래의 가장 사악한 죄는 '무관심' 또는 '무뇌충'이 될 것이다.

 

 

 

 

 

 

분노하라

작가
스테판 에셀
출판
돌베개
발매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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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벌어지는 사소해 보이지만 악한 것들 뒤에는 인류의 파멸이라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 또는 미래에 돈과 힘으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며 형제자매를 도구로 삼는 그들 자신도 그 욕심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나 정의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틀렸다 라는 식의 설교로는 까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행동으로 표출된 분노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곤 한다. 폭력으로 표출된 분노는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분노케 한 그들의 그 것과 다르지 않다. 분노에 대한 행동에는 어떤 형태이던 폭력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특히 물리적인 폭력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날지 모르겠다. 지금의 분위기로는 '밝은 미래 운운'할 처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역사는 인간의 힘을 바뀌기에는 너무 크고 그 움직임이 너무 곧다. 따라서 지구상의 어떤 국가의 정권이 바뀐다거나 어떤 제도가 어떤 지역의 상황을 바뀐다고 해도 전 인류가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진다고 단언해 말하기에는 어려워졌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바로 '지속 가능성(持續 可能性)'에 대한 부분이다. 즉 인류의 지속 가능한 역사/삶/내일 등이다.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가던 높은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구라는 작은 섬에서 어떤 형태의 자원이든 아끼고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 인간의 특성상 자신의 소유가 늘어나면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을 보이며 거기에 또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원이 편중은 자원의 고갈(苦渴)을 촉진 시킨다. 따라서 인류의 지속가능성 자원 적절하고 공정한 분배에 있다고 본다. 

 

젊은이들은 대학입시, 대기업 취업, 경제적 조건과 생물학적 조건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등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또 생의 목표를 어떤 것이 되었건 각각에서 일류가 되고자 한다거나 돈에 두고 오직 그것만 보고 돌진하는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것은 현대의 인류가 걸린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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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유시찬 신부의 인생공감
유시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해에 이어 우리나라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난 사회현상 중에 ‘멘토링Mentoring)’라는 것이 있다. 모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멘토’라는 제도를 이용하고 모든 분야에서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설파[(說破)?]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멘토’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멘토링(Mentoring)라는 개념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여러 명의 멘티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또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날리는 것을 멘토링이라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에 부는 멘토링 바람은 마치 마케팅 기법의 하나처럼 느껴진다.



왜 멘토가 필요한가?

멘토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인물 율리시스의 친구였다. 율리시스가 트로이 원정을 나가면서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할 것을 예견하고 그의 친구인 멘토르에게 아들을 보호와 양육을 맡긴다. 잘 알려진 대로 율리시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후에도 그리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랜 세월의 모험 끝에 그리스로 돌아온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아내는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권력은 무너졌지만 아들만큼은 잘 성장했다고 해서 자녀(子女)나 후학(後學)을 양육하거나 지도하는 기법의 대명사로 쓰인 것이다.

우리사회가 멘토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젊은이의 청소년 시절에 대학입시라는 절체절명(?)의 목표에 매달려 다른 모든 것은 희생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준비로 거의 모든 것으로 포기하고 산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도 취업 내 맘대로 안 된다. 취업이 되었다고 해도 산 넘어 산으로 인생의 위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미 그 고비들을 넘기고 인생을 잘 살아간 선배들의 견인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도 이제 불혹에 접어든 사람이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대학입시도 치르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안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내 분야에서 최고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인생의 매 고비에서 10년, 20년 전 선배들에 비해 유난히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필자의 사무실은 학교 안에 있어서 출퇴근하는 버스 안, 구내식당에서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보이는 학생들의 행동을 자주 접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수준(?) 높은 부모 밑에서 교양 있는 분위기에서 배우고 자란 아이들도 많은데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자라던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거기다가 문제는 요즘 아이들은 꼽게 자라서 그런지 참을성도 없고 배우긴 많이 배웠는데 지혜가 없다. 미디어와 함께 자라 세대라서 그런지 미디어와는 엄청나게 친하지만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의 것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한마디로 수동적이다. 그러니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 마다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멘토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마케터(Marketer)들이 잡아내어 멘토 마케팅을 하다 보니 여기서도 ‘멘토’, 저기서도 ‘멘토’라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분명 멘토가 필요하고 요즘처럼 웃자란 버린 청년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나 에게 ‘멘토’인 ‘멘토’이거나 누구나 하는 말을 하는 ‘멘토’는 필요 없다. 멘티(Mentee)에게 꼭 필요한 멘토가 필요하다. 우선 주의를 살펴보자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부터 살펴보자. 사실 부모만큼 가장 훌륭한 멘토는 없다. 이전 세대들은 따로 멘토나 롤모델(Roll Model)를 만들지 않아도 부모와 식구들 지역사회의 어른들 사이에서 배우고 자랐다. 요즘은 다르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멘토와 멘티는 1:1 대면이 꼭 필요하고 주기적으로 만나야 적절한 멘토링이 가능하다. 저 멀리 있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나의 롤모델은 될 수 있어도 멘토는 될 수 없다. 




사족이 너무 길어졌다. 책에 대해서 돌아가자.

이 책은 로만 카톨릭, 즉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천주교 사제가 쓴 글이다. 따라서 글의 결론은 결국 예수로 결론이 지어진다. 혹시 누군가 그런 책을 왜 읽느냐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로 종교적 색채를 띤 책들은 아무리 믿지 않는 이들의 세속의 삶에 유리한 내용이라도 거부하곤 한다. 물론 혜민 스님 같은 경우도 있지 않냐고 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에는 인간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불교의 교리에 지극히 충실한 이야기라도 세속적 삶에 잘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은 간과하면 안 된다.

필자는 이 책을 잡고 한 시간 반에 내리 반을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화가 났다. 저자는 분명 카톨릭 사제인데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혜민 스님이었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 인생의 가이드를 제시하는 내용이지만 그 목적은 분명 영적 삶이다. 그렇지만 계속 범신론, 불교적 색채가 강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화가 났다. 책의 어디에도 그리스도교의 그 영적 삶은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죽음에 대한 꼭지가 나온다. 사실 이 꼭지가 앞에서 이렇다 저렇다. 이게 중요하다 한 이야기들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생의 선배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생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살다 죽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돌직구(?)를 던지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진정한 행복과 인생이 목적을 알 수 있지만 저자가 에둘러 멀리 돌려서 말했던 인생에 대한 조언들(마치 불자가 쓴 글 같은 느낌의 글)이 결국 예수가 생(生)으로 보여준 바로 그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써 책을 읽으며 느꼈던 필자의 답답함이 풀어졌다.

목적을 위해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은 세속의 방법이다.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분을 낸 필자 자신에 대해 잠시 반성해 본다.



세상은 점점 더 사람이 살기 어려워져 간다. 혹자는 사람 스스로가 만든 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세상은 인간이 살기 어렵게 변해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맏을 능력이 없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살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남들보다 더 부자 가 되어 남들 위에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을 차오는 배의 격실(隔室)안에서 조금 더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은 나 아닌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 코를 물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격실 안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단 몇 초 단 몇 분 공포스러운 상황을 연장할 뿐이다. 그 상황에서의 해결책은 격실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나 배가 수리가 되어 배에 찬 물을 밖으로 배수되고 배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혜안(慧眼)을 가진 누군가가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에 ‘이건 아니쟎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쉬면서 생각을 좀 해봐라!’ 한들 몇이나 그 간절한 외침에 귀 기울일 것이며 누군가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고 깨닫는다고 한들 그 역시도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세상이 앞 사람의 엉덩이만 쳐다보면서 몰려가는 그곳의 끝에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것에 귀를 기울려 멈칫 멈칫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조금은 그 행진이 더뎌질 것이다.
우리가 잡을 것은 1등, 부자, 권력 등의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한 단계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상대적이라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더라도 나보다 위쪽에 있는 누군가가 또 보일 것이다. 앞 사람을 따라 잡았다고 해도 그 앞에 또 누군가 있을 것이다. 잠시 주춤 거리기라도 하면 내 뒤에서 따라오는 거친 숨소리가 나를 긴장케 할 것이다. 이런 삶에는 결코 평화가 없다.  우리가 잡아야 하는 것은 필자의 표현대로 마음 너머, 마음 안쪽에 숨은 영의 세상 것이어야 한다. 


또또또 책 리뷰를 하다가 개똥 철학 질을 했다. ㅋㅋㅋㅋ, 난 이런 것이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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