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유시찬 신부의 인생공감
유시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해에 이어 우리나라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난 사회현상 중에 ‘멘토링Mentoring)’라는 것이 있다. 모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멘토’라는 제도를 이용하고 모든 분야에서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설파[(說破)?]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멘토’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멘토링(Mentoring)라는 개념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여러 명의 멘티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또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날리는 것을 멘토링이라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에 부는 멘토링 바람은 마치 마케팅 기법의 하나처럼 느껴진다.



왜 멘토가 필요한가?

멘토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인물 율리시스의 친구였다. 율리시스가 트로이 원정을 나가면서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할 것을 예견하고 그의 친구인 멘토르에게 아들을 보호와 양육을 맡긴다. 잘 알려진 대로 율리시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후에도 그리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랜 세월의 모험 끝에 그리스로 돌아온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아내는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권력은 무너졌지만 아들만큼은 잘 성장했다고 해서 자녀(子女)나 후학(後學)을 양육하거나 지도하는 기법의 대명사로 쓰인 것이다.

우리사회가 멘토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젊은이의 청소년 시절에 대학입시라는 절체절명(?)의 목표에 매달려 다른 모든 것은 희생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준비로 거의 모든 것으로 포기하고 산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도 취업 내 맘대로 안 된다. 취업이 되었다고 해도 산 넘어 산으로 인생의 위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미 그 고비들을 넘기고 인생을 잘 살아간 선배들의 견인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도 이제 불혹에 접어든 사람이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대학입시도 치르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안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내 분야에서 최고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인생의 매 고비에서 10년, 20년 전 선배들에 비해 유난히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필자의 사무실은 학교 안에 있어서 출퇴근하는 버스 안, 구내식당에서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보이는 학생들의 행동을 자주 접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수준(?) 높은 부모 밑에서 교양 있는 분위기에서 배우고 자란 아이들도 많은데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자라던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거기다가 문제는 요즘 아이들은 꼽게 자라서 그런지 참을성도 없고 배우긴 많이 배웠는데 지혜가 없다. 미디어와 함께 자라 세대라서 그런지 미디어와는 엄청나게 친하지만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의 것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한마디로 수동적이다. 그러니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 마다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멘토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마케터(Marketer)들이 잡아내어 멘토 마케팅을 하다 보니 여기서도 ‘멘토’, 저기서도 ‘멘토’라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분명 멘토가 필요하고 요즘처럼 웃자란 버린 청년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나 에게 ‘멘토’인 ‘멘토’이거나 누구나 하는 말을 하는 ‘멘토’는 필요 없다. 멘티(Mentee)에게 꼭 필요한 멘토가 필요하다. 우선 주의를 살펴보자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부터 살펴보자. 사실 부모만큼 가장 훌륭한 멘토는 없다. 이전 세대들은 따로 멘토나 롤모델(Roll Model)를 만들지 않아도 부모와 식구들 지역사회의 어른들 사이에서 배우고 자랐다. 요즘은 다르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멘토와 멘티는 1:1 대면이 꼭 필요하고 주기적으로 만나야 적절한 멘토링이 가능하다. 저 멀리 있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나의 롤모델은 될 수 있어도 멘토는 될 수 없다. 




사족이 너무 길어졌다. 책에 대해서 돌아가자.

이 책은 로만 카톨릭, 즉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천주교 사제가 쓴 글이다. 따라서 글의 결론은 결국 예수로 결론이 지어진다. 혹시 누군가 그런 책을 왜 읽느냐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로 종교적 색채를 띤 책들은 아무리 믿지 않는 이들의 세속의 삶에 유리한 내용이라도 거부하곤 한다. 물론 혜민 스님 같은 경우도 있지 않냐고 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에는 인간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불교의 교리에 지극히 충실한 이야기라도 세속적 삶에 잘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은 간과하면 안 된다.

필자는 이 책을 잡고 한 시간 반에 내리 반을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화가 났다. 저자는 분명 카톨릭 사제인데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혜민 스님이었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 인생의 가이드를 제시하는 내용이지만 그 목적은 분명 영적 삶이다. 그렇지만 계속 범신론, 불교적 색채가 강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화가 났다. 책의 어디에도 그리스도교의 그 영적 삶은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죽음에 대한 꼭지가 나온다. 사실 이 꼭지가 앞에서 이렇다 저렇다. 이게 중요하다 한 이야기들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생의 선배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생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살다 죽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돌직구(?)를 던지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진정한 행복과 인생이 목적을 알 수 있지만 저자가 에둘러 멀리 돌려서 말했던 인생에 대한 조언들(마치 불자가 쓴 글 같은 느낌의 글)이 결국 예수가 생(生)으로 보여준 바로 그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써 책을 읽으며 느꼈던 필자의 답답함이 풀어졌다.

목적을 위해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은 세속의 방법이다.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분을 낸 필자 자신에 대해 잠시 반성해 본다.



세상은 점점 더 사람이 살기 어려워져 간다. 혹자는 사람 스스로가 만든 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세상은 인간이 살기 어렵게 변해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맏을 능력이 없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살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남들보다 더 부자 가 되어 남들 위에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을 차오는 배의 격실(隔室)안에서 조금 더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은 나 아닌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 코를 물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격실 안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단 몇 초 단 몇 분 공포스러운 상황을 연장할 뿐이다. 그 상황에서의 해결책은 격실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나 배가 수리가 되어 배에 찬 물을 밖으로 배수되고 배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혜안(慧眼)을 가진 누군가가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에 ‘이건 아니쟎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쉬면서 생각을 좀 해봐라!’ 한들 몇이나 그 간절한 외침에 귀 기울일 것이며 누군가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고 깨닫는다고 한들 그 역시도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세상이 앞 사람의 엉덩이만 쳐다보면서 몰려가는 그곳의 끝에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것에 귀를 기울려 멈칫 멈칫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조금은 그 행진이 더뎌질 것이다.
우리가 잡을 것은 1등, 부자, 권력 등의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한 단계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상대적이라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더라도 나보다 위쪽에 있는 누군가가 또 보일 것이다. 앞 사람을 따라 잡았다고 해도 그 앞에 또 누군가 있을 것이다. 잠시 주춤 거리기라도 하면 내 뒤에서 따라오는 거친 숨소리가 나를 긴장케 할 것이다. 이런 삶에는 결코 평화가 없다.  우리가 잡아야 하는 것은 필자의 표현대로 마음 너머, 마음 안쪽에 숨은 영의 세상 것이어야 한다. 


또또또 책 리뷰를 하다가 개똥 철학 질을 했다. ㅋㅋㅋㅋ, 난 이런 것이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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