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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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네뷰, 앙가주망, 레지스탕스 이들 프랑스 말은 저항, 분노를 말하며 불의에 대해 분노하며 저항할 것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요즘 젊은이들은 모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뭐지?)이 알고 있듯이 레지스탕스는 독재 즉 파쇼(파시스트)의 가장 극명한 예인 나치스의 프랑스 점령에 대항했던 저항세력을 말한다.

 

'분노하라!'라는 선동적인 구호가 제목인 이 책은 레지스탕스로 외교관으로 살아온 노 투사(老 鬪士)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호소의 책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특별한(작가와 예술가인) 부모 밑에서 독특한 분위기에 자라고 아울러 지금까지도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건강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철학적으로는 헤겔과 학교 선배인 폴 샤르트르에게 영향을 받았고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 활동과 나찌 치하에서의 수감생활 그리고 UN의 설립 과정에 참여 함으로서 누구보다도 역동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를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들이 선배들이 만들어온 자유와 박애의 역사를 뒤집는 것에 대해 분노를 감추기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서는 과거와 지금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소위 말하자는 반정부 학생운동에 연관 되 사실상 추방된 홍세화씨의 책, '파리의 택시 드라이버'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똘레랑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포용력' 과 자유(단 특별한 상황에서라는 제한이 붙은)정도로 말할 수 있는 단어인데 작가가 프랑스에서 유색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프랑스인들의 개방성, 따스함 등을 말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는 어떤 서방국가 중에서도 외국인들에 대해서 개방적인 나라였고 사회복지 제도가 잘 운영되던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똘레랑스 다소 낭만적인 단어와 부러움이 대상이던 프랑스의 분위기는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財政危機)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국가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지만 특히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의 변심은 특별한 위기 의식을 가지게 한다.

 

 

 

 

레지스탕스가 만든 사회보장 제도?

 

 

프랑스의 사회제도의 핵심은 바로 약자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생존에 대한 보장된 자유이다. 인종과 성별, 나이 그리고 국적에 상관없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든 약자들에 대한 생존 보장과 최소한의 인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서비스인 것이다. 이것은 2차대전 종전 후 레지스탕스의 정신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잘 만들어진 사회보장 제도와 레지스탕스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궁금해진다. 레지스탕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나찌 점령치하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반(反)나찌 운동을 말하며 그 협의로는 나찌 치하의 프랑스 반군을 말하기 때문에 레지스탕스 정신에 입각한 사회제도라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저자(著者) 스테판 에셀의 설명에 따르면 레지스탕스의 대척(對蹠)은 나찌였는데 나찌는 그것은 독재(獨裁)라는 가장 사악한 권력체제(權力體制)하에서 국가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 인종주의(人種主義)로 군중을 선동하는 악(惡)의 세력인 것이다. 레지스탕스가 봉기(蜂起)한 이유는 표면적(表面積)으로는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의 탈환에 있지만 그 정신은 권력의 부적할 사용과 그것을 통한 민중에 폭력과 착취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의 내부에 사회주의 요소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 정부는 권력에 기대어 힘 없는 자들이 개인 또는 조직(정부 또는 회사, 기타 이익 집단)으로부터 불이익이나 유/무형의 폭력을 당할 경우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자는 취지로 사회보장 제도를 만들게 되었고 그 기반은 레지스탕스 정신(반나찌운동, 노동운동을 포함한다.)에 두었다. 그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뿐 아니라 관료기업들도 독재권력이나 정치조직처럼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60여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이 존재했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 경이롭다. 앞으로 인류가 겪게 될 기업관료체제(企業官僚體制)의 위험성을 정확히 파악한 조치이다.

 

 

 

무관심의 문제

 

현대 사회는 여러 이유로 개개인이 세포화(細胞化)되어 간다. 어떤 집단에 소속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소속감은 희박하다. 그나마도 대부분 그 관계가 움직이는 힘은 바로 돈이다. 또 과소비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 경쟁’을 조장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각 개인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가치관(價値觀)도 미약(微弱)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매스 미디어, 즉 물건을 팔아 소비를 조장하는 기업의 논리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비라는 행위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귀찮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요즘 소위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것이 잘 이해가 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는 사람들의 권리나 생존권 등 중요한 사항들을 권력자(정치권력, 경제권력)들의 구미에 맞게 바뀌어 나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만일 사람들이 지금처럼 계속 소비하고 즐기는 것에 만 관심을 갖고 산다면. 쭉 '생각 없이 산다'면 인간들 모두는 그 들 중에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 들 중 가장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착취당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된 후 버려지는 악의 소굴로 변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간의 미래의 가장 사악한 죄는 '무관심' 또는 '무뇌충'이 될 것이다.

 

 

 

 

 

 

분노하라

작가
스테판 에셀
출판
돌베개
발매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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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벌어지는 사소해 보이지만 악한 것들 뒤에는 인류의 파멸이라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 또는 미래에 돈과 힘으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며 형제자매를 도구로 삼는 그들 자신도 그 욕심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나 정의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틀렸다 라는 식의 설교로는 까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행동으로 표출된 분노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곤 한다. 폭력으로 표출된 분노는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분노케 한 그들의 그 것과 다르지 않다. 분노에 대한 행동에는 어떤 형태이던 폭력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특히 물리적인 폭력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날지 모르겠다. 지금의 분위기로는 '밝은 미래 운운'할 처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역사는 인간의 힘을 바뀌기에는 너무 크고 그 움직임이 너무 곧다. 따라서 지구상의 어떤 국가의 정권이 바뀐다거나 어떤 제도가 어떤 지역의 상황을 바뀐다고 해도 전 인류가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진다고 단언해 말하기에는 어려워졌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바로 '지속 가능성(持續 可能性)'에 대한 부분이다. 즉 인류의 지속 가능한 역사/삶/내일 등이다.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가던 높은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구라는 작은 섬에서 어떤 형태의 자원이든 아끼고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 인간의 특성상 자신의 소유가 늘어나면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을 보이며 거기에 또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원이 편중은 자원의 고갈(苦渴)을 촉진 시킨다. 따라서 인류의 지속가능성 자원 적절하고 공정한 분배에 있다고 본다. 

 

젊은이들은 대학입시, 대기업 취업, 경제적 조건과 생물학적 조건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등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또 생의 목표를 어떤 것이 되었건 각각에서 일류가 되고자 한다거나 돈에 두고 오직 그것만 보고 돌진하는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것은 현대의 인류가 걸린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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