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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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를 아는가?

백범 김구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있을까독립운동가이면서 대쪽 같은 민족주의자로 평생을 자기 목숨과 자기영위(가족의 생계와 목숨까지…)를 돌보지 않고 평생 옳은 일에 매진한 고집스런 분으로 알려져 있는 그 분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이 우매(?)해 보이는 질문에 아니다’ 라고 답하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필자나 필자의 선배들 그리고 동년배들은 자세히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워서 알고 있었다다소 왜곡되고 누락된 부분은 많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고 그의 개인사나 성품을 보아도 어느 누구보다 본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윤리(도덕), 역사(국사세계사과목은 소위 선택과목이라 분류해 두고 아이들에 시간되면 들어봐!’ 이런 식으로 방치해 두고 있으니 김구 선생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하기 애매해졌다.

 

역사는 변하고 변하여 어느 사실이나 인물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하지만 우리의 근대사는 어는 민족의 역사 못지 않게 파란 만장하였고 더구나 아직도 친일이니 반일 하는 테제들이 우리와 가까이 있고 근대화 이후 우리와 앙숙에 가까운 경쟁관계가 된 일본에 대한 의식이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시기와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젊은이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마당에 50여 년 전 일을 옛날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더라’ 할 정도로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가아니면 그저 돈과 권력만 추구하며 사느냐를 생각해 보자후자를 경우를 희화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쳇말이 있다. ‘ 아무 생각 없어….~’ 세상은 점점 더 고도로 조직화된다심지어 물건을 팔거나 어떤 조직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인의 사고까지도 조정하려고 하는 사회이다권력이나 이익집단은 물론 개인들도 상대보다 우의를 점하기 위해 고도로 조직하는 사회가 되었다이런 사회에서 무 개념(?)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결과는 입에 담기도 무섭다.

앞으로 우리는 점점 개념(?)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 있게 산다는 것

 

개념이란 무엇인가개념이란 단어를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워낙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인데앞의 단락에서 말한 생각이 있고 없고 와 연결해 보면 의외로 쉬워진다.

평소에 늘 행동보다 생각을 더 먼저더 많이더 깊게 하며 사는 것이다우리는 TV를 보면서 엄청난 광고에 노출이 된다.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의 중간에 그냥 입 벌리고 멍청히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광고에도 고도의 생각조정 개념이 들어가 있다광고를 보고 나면 그 내용이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 광고에서 본 제품을 사게 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엄청난 효과이다하루에도 몇 십 건씩 보는 광고에도 이런 엄청난 조작이 들어가 있는데 직장정치권 등에서 오죽할 것인가?

 

벌써 오래(?) 전 이야기가 된 홍수아의 개념시구을 생각해보자 그녀의 시구가 개념 시구가 된 이유를 이해 한다면 개념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이면 왜 중요한지 보다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이전의 시구는 그 사람이 누가되었건 간에 그냥 공을 포수 쪽으로 던지는 것이었다평소 야구공 한 번 안 만져본 사람이 시구 10~20분전에 야구장에 와서 몇 번 연습을 하고 던지니 공이 포수의 캐처미트에 도착할 리 만무하다그런데 그녀의 시구는 동작에서 부터 달랐다무게 중심이동을 위해 하게 되는 다리를 하늘로 올리는 동작부터 이전의 시구 자들과 달랐다.  공이 높이 뜨긴 했지만 캐처미트까지 정확히 도착했다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평소 야구를 전혀 하지 않는 심지어 야구경기를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인 그녀가 시구를 위해 꽤 많은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녀는 몇 주 전부터 지인을 통해 야구 선수에게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이 건 매우 중요한 변화인데 한 번에 시구를 위해 몇 날 몇 일을 연습했다면 다른 일에서는 어떨까?

 


진지한 삶에서 배운다.

 

백범 선생의 삶은 개념있는 인간이란 이렇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당시 상황이 사람들을 강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열정만으로 살아간 삶도 아니었고 젊은 날의 미숙함과 노년의 완숙함까지 다양한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가운데 평생 하나의 신념을 지니고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살아온 선생의 삶을 조명해 보는 가운데 우리가 남은 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지금은 몸을 내어 던져 민족을 위할 일도 없고 그럴 사람도 없는 시대이다다만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일에 열심히 일하거나 타인을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양보하면서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갈아가는 사람마저도 귀한 세상이다.  개인화된 사회의 특성으로 관심의 범위가 내 주위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이런 시대에도 자기 목숨을 내어 타인이나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가치는 매우 소중하다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런 희생은 매우 드물고 그것에 대한 파급효과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감동하지만 그 것뿐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작지만 꾸준히 하는 어떤 것들이다.

 

사회국가세계가 주는 대로 받아먹고 남들이 하는 데로 살면서 그냥 돈이나 펑펑 써보자!’하며 산다면 나 자신 스스로 뒷걸음 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워 진다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동물과 다르기 때문이다먹고자고싸는 것즉 본능 중심으로 살다 보면 그것이 동물의 삶인 것이다보다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삶의 모든 순간에 진지해야 한다이건 머리 아프다’, ‘복잡하다라며 간단히 무시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가 위인들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들의 불꽃 같은(고난까지 포함한삶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그것을 딛고 일어선 후의 성숙이다.

 

 

백범 선생을 단순히 독립투사임시정부 주석민족주의자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그가 왜 어려운 삶을 택하고 늘 괴로운 자리에 서있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았기에 늘 당당하며 무서울 정도의 강건함을 지닐 수 있었는지 안다는 것은 더욱 험난해 지는 사회를 살아갈 우리에게 작지만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 국사시간에 얼핏 들었고 위인전(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위인전이 그 분들 하나 하나를 제대로 알고 쓴 것이 거의 없다차라리 위인 프로필’ 전집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을 통해 알던 것을 제대로 고쳐 알게 된 기회가 되었다.

 

최근에 여러분(‘사담 후세인’, ‘체 게바라’ …)의 평전을 읽었는데 이렇게 본인 스스로 쓴 회고록이 있다는 것은 남다르다.선생 스스로 이렇게 기록을 남겨두시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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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을 이기는 큰 비밀
조엘 그린블라트 지음, 이상건.이승아 옮김 / 알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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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 대한 비밀은 없다 소신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래 전부터 걱정하던 저성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이미 지난 세기부터 산업사회의 몰락을 예언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방법으로 도 이전의 고도 성장이 이루어 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필자는 대학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접하고는 잠시 두려움에 떨었었다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면 나 같은 소시민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느냐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 없이 그냥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자원혁명산업혁명 시기에 인류의 성장을 수치화 한다면 놀래 자빠질 만한 대단한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그 성장의 결과로 대공항도 겪었고 대륙규모의 전쟁도 겪었다그리고 소위 지식 정보사회라는 이 시기까지 인류는 줄 곳 진보를 했고 더 많이 생산하여 더 많이 소비하는 삶을 살아왔다그런데 이런 방향으로의 발전/진보라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문제(빈부격차사회병리 현상)를 발생 시키더니 급기야 전세기의 대공항과는 다른 양상의 심각한 문제가 터져버렸다바로 금융위기이다고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서는 생산만으로는 사회의 요구(욕망)를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다그래서 공장산업을 뛰어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금융업을 고도로 발전시켜서 잉여가치를 만들었다하지만 이 잉여가치라는 것이 그 가치에 해당하는 실물 즉 자원생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가상으로 만들어낸 잉여 가치만큼을 언젠가는 채워 넣어야 한다그런데 그것을 준비하지 못하였고 그 것이 결국 사회 문제라 폭발해 버린 것이 금융위기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부가가치가 높았던 산업을 꼽으라면 단연 금융업이다물론 금융업이라는 개념은 중세에도 존재하던 것이고 금융회사 시스템이 도입되고 많은 부를 창출을 했던 18세기도 있었지만 전세계 모두가 금융업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던 시기는 단연 20세기이다산업생산의 증가뿐 아니라 소비에 폭증은 금융업의 부흥의 원인이었다이제는 어느 누구도 금융과 연결이 되지 않고는 정상적(?)인 사회구성으로 사회를 살아갈 수 없다또 이 시기에는 주식투자가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치부(致富)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까지는 주식을 발행하는 일이나 발행된 주식으로 획득하는데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다따라서 주식/채권 등의 발행과 투자는 국가나 국가주도적 산업(식민산업)체 그리고 귀족신흥부호들에 국한된 것이었다많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일단 진입을 하고 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금융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지금에서 보면 오히려 이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80년 중반 (포스코가 대표되는)소위 국민주라는 것으로 일반인들이 주식시장에 직접투자가 가능해졌다미국영국 같은 선진국가들에 비해 많이 늦은 것이긴 하지만 80년대 이후에는 땅부자 못지 않게 주식부자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식을 투자하면 필수로 듣게 되는 것이 바로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우면 이 원칙이 세기가 바뀐 지금도 통용이 될까필자도 오래 전 닷컴버블’ 시절에 개미로서 초 단타 까지도 도전해 보았었다. 1년 반에 직접투자의 결과로 25배의 수익을 남겼는데 수익을 낸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샀다가 1년 후에 보니 30배가 된 모 닷컴 기업의 주식이었다회원 가 5000원의 공모주가 30원대에 거래가 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팔라고 권유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사두고 1년간 있는지 없는 몰랐던 주식이었다그 때 29배의 수익을 챙기고 약 6개월간의 단타를 하면서 이전에 난 수익에 얼마를 잃었다초반에는 약간의 수익이 나길래 꽤 열심히 했는데 결국 쪽박을 차고 말았다그 주식은 그 후10년간 구입가의 1/10로 가지고 있다가 그 후에 휴지가 되 버렸다필자는 개인투자로 대박을 이루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무척 어려운 것임을 판단하고 그 후로는 일체의 직접 투자를 하고 있지 않다필자가 오래 전에 그런 좋은 경험을 하고 원칙이 생긴 것에 비해 필자의 지인들은 최근 3-4년 전까지 직접 사고 팔고를 하면서 꽤 많은 손해를 보았다.

한편 펀드라 불리는 간접투자의 경우에는 지난 5년까지는 큰 성장을 했다. BRICS라 불리는 브라질러시아이탈리아중국스페인 등의 신흥 시장 대상 펀드가 큰 인기를 누렸고 나름 이익을 본 투자가도 있었다또 중국 경제가 과열되면서 차이나 펀드에 대한 과열 투자도 있었다그러나 금융위기의 위험과 각 국가의 경기과열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서 이들 주식은 곤두박질 쳐서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차이나 펀드의 경우에는 필자 주위에도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은데 현재 -20~-30%의 데이터가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들쭉날쭉 하는 시장에서 대부분의 일반 투자가들은 많은 손해를 보았다하지만 이들 펀드들도 과열 시기 까지는 25%가 넘는 고수익을 내고 있었다그것이 거품이었지만 만일 누군가 사람들이 이들 펀드에 몰려들기 시작할 무렵 과감하게 펀드를 환매했다면 어떨까?그 들은 브릭스/차이나펀드를 통해 20% 이상의 순수 이익을 챙겼기 때문에 이들 펀드에 대한 투자는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요즘처럼 주식이 불안한 상황에서는 투자도 위축될 것이고 주식투자에 대한 수익률 자체가 매우 낮아 은행이자 수준도 안 되는 펀드들이 많다그러나 그럼에도 10% 이상을 내는 펀드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주식시장의 엘리엇 그래프를 심하게 그리며 요동을 칠 때 만일 채권에 투자했다면 주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그 예로 국내 10개 우량종목에 투자하는 채권(비 위험등급 채권)의 경우 1년 전 수익률이 6%를 넘지 않았다그러나 이 펀드의 현재 수익률은 10.5%로 코스피 지수가 1900선을 넘어서 시장이 복구되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수익률이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시장이 어렵다고 해서 투자자가 무조건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기관 투자자들은 반드시 자금을 운영하여 이익을 내야 하고 그 가장 적절한 대상이 주식/채권 등의 시장이기 때문에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여 투자를 멈출 수 없다현재 아무리 비교를 해 봐도 가장 믿을 만한 투자처는 역시 주식시장이다그러니 이 상황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관투자가금융기관전문투자가들은 투자 종목의 선택을 할 때 일정한 원칙과 지침을 따른다투자가 규모가 커질수록 선택이 폭이 좁아지고 잘못된 투자로 인한 위험 부담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회사나 팀또는 자기 스스로의 매뉴얼을 세우고 그 것을 원칙을 삼아서 투자를 하는 경우가 많다특히 펀드 매니저의 경우에는 수익률을 일별로 확인하여 따지는 고객들이 많기 때문에 투자 원칙을 정확히 세우고 이를 고객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프 보다는 미래가치

개미의 특징 중에 하나는 몰려다니는 것이다그것도 손해 보는 쪽으로 다 같이 몰려 다닌다는 것이다개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들은 응집력이 없다그런데 응집력이 없으면서도 몰려 다닌다투자 종목에 대해 정보력이 부족하고 분석능력도 떨어져서 남들이 알려주는 정보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한다응집력은 없고 정보에 대한 갈망이 크다 보니 어떤 정보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다또 정보의 진위를 파악할 능력들이 없으니 대규모 투자자나 소위 ’ 들의 작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

또 주가 변이 그래프에 집착하는 투자자들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그래프는 현 시점으로부터 과거의 기록이다과거에는 엘리엇 곡선이라고 해서 일정한 패턴으로 등락을 하고 그에 따라 일정 시점이 되면 어느 정도 과거의 상황이 회기 한다고들 말했다과거 그래프를 분석해 보면 10년 주기로 회기 한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그러나 오늘의 불투명한 경제 상황에서는 이 것 역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이제 투자자가 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업에 투자하여 얻게 되는 미래의 가치가 얼마인가?’ 이다.

 

큰 비밀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미래가치를 평가하고 현재 시점에서 저평가된 종목을 사들이는 것이 투자의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이 말 어디서 물어 본 것 같지 않은가그렇다 투자의 귀재이며 세계 5대 재벌 안에 드는 워렌버핏도 비슷한 말을 한다저자의 계보를 따져보면 워렌버핏과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둘은 같은 강의실에서 한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미래가치를 보고 투자 대상을 정하라는 것은 장기적인 관심에서 기업의 주가는 결국 그 기업이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여 인류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을 근거를 둔다단기 투자의 경우에는 이런 것을 따져 볼 여유도 없거니와 기업의 가치 실현은 단 기간에 이야기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기 투자의 경우는 투자 규모나 수익률을 떠나서 현재의 주식시장의 구조상 장기 투자보다 큰 수익을 낼 수 없다특히 단타 같이 자주 거래를 함에 따라 수수료 부담이 커지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어떤 종목에 장기간 자금을 투자한다는 것은 해당 자본의 동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투자를 유지할 정도로 기업이 건실한가를 따져봐야 한다건실한 기업이라면 결국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기회가 많고 결국 살아남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또 저평가된 종목을 골라낸 다는 의미는 혹시라도 미래에 수익률이 예상 치에 못 미치거나 중간에 큰 손해가 있더라도 초기에 저렴하게 구입함으로써 그 위험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럼 기업의 가치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나기업가치에 비해 저렴한 종목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사실 이 건 개인 투자자에겐 능력 밖의 일이다결국 이러고 보니 저자의 큰 비밀은 여전히 개미들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남겨진 영역이 된다다만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 것은 주식 투자에서 가장 큰 무기는 투자 대상의 내재 가치를 알아내는 능력(그것이 어떤 학습이나 정보력을 통한 것이든 통찰력이던 간에…) 느긋하게 기다리는 인내력이라는 것이다비록 큰 비밀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떤 전문 투자가자도 장기적으로는 개인 투자가의 소규모 투자 만큼의 수익률 내지는 못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오해 말기를 바란다규모에 의한 수익금의 크기는 명제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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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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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이 차례로 서거하면서 진보진영과 다소 진보적인 시민들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이유가 상식을 넘어서는 방법을 동원한 보복이라는 점과 30년 가까운 민주화 운동이 1-2년 만에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4.19의거’,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등의 우리나라 역사의 굵직한 시민민주화의 결실로 세기가 바뀌면서 진보민주정권을 이루었고 시민운동에 의해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초유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던 이 들에게 보수정권이 등장한지 1년도 안되 일어난 일 들의 맥 빠질 일들이었다.

 

그리고 줄지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전 정권을 나름 진보적인 민주정권으로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응집력이 전혀 모래, 자갈, 진흙이 제각각 흩어진 빈 땅 위에 얼기 설기 이것 저것 잡히는 대로 주워다가 붙여놓은 정체 모른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번지르르하게 지은 상징 탑 같은 것이었다.

 

사상누각(沙上樓閣) 이라는 말이 있다. 모래 위에 건물을 지었으니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대통령은 잘 세웠는데 정부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들이 가득 차 있고 정권말기에는 대통령을 밀어주던 정권 마저 서로 자기만 살아보자고 오합지졸 분당을 일으켰다. 우리 정치사에 가장 극적이며 민주적인 사건인 대통령 탄핵기각때를 제외하고는 국민들도 정권에 등을 돌렸다. 표면적으로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선두로 경제정책 전반에 걸친 무능력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제 다음 정권말년에 이르러 전 정권을 돌아보면 이것이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사상누각

다소 진보적(우리나라에 과연 진보가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보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자면…)인 성향인 필자는 노무현 정권에 가장 치명적인 정책실패라는 부동산 정책과 외환 문제에 대해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사실 당시에는 그냥 헤매고 있고나~ 하는 정도이니 그걸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경제관련 책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 그리고 외환, 거시경제 정책이 어느 순간부터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근대에 우리가 가난을 탈출하면서 사용한 수출지향적 정책은 분명 우리가 20세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가장 큰 공신 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OECD에 가입하는 시점 이후 우리의 수출주도적 경제정책은 수정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수출에서 이익을 얹을 수 있었던 것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지위 때문에 받은 여러 가지 국제사회의 양보와 국내의 저축에 힘입은 것이었는데 우리가 선진국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의 혜택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사회 분위기 등으로 국민의 소비(지출) 증가로 수출은 외화벌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뿐 아니라 국부유출이라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은 지금도 80년대와 동일하다. 또 세기가 바뀌면서 인류는 거시(巨視)보다는 미시(微時)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런 영향들은 경제정책 수립에서도 이제는 무시 못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정책은 소위 케인즈 학파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파라 불리는 문하의 경제학자(또는 경제관료)들에 의해 세워진다. 최근 비주류(또는 야인) 경제꾼들의 책에서 이 문제는 적나라하게 지적 질 당하고 있는 것인다. 사막 위에 서 있는 망루에 앉은 왕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백성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아니 사막 위 망루에서 소리 지르는 왕을 보는 백성들은 왕이 한심해 보인다.

우리가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면서 홍보했던 문구가 있다 풀 뿌리 민주주의이 말은 민주주의란 어떤 모양을 가져야 하는 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작은 뿌리 하나부터 민주여야 한다. 나무 위에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나무는 물을 주고 가꿀 때만 아름다울 뿐이다. 그 손길을 거두면 오래 버터지 못한다.

 

앞에서 경제관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딴 이야기를 조금 했다. 전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 실패라기 보다는 사실 몇 십 년을 지배해온 우리나라 경제시스템의 실패이다. 정권의 수장이 시스템 탓을 하면서 책임 회피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시스템 특히 정책부분은 우리 경제의 걸림돌임에는 확실하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게 3 정권 동안 그 정도는 달라도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은 동일하고 동일한 실패를 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들여다보면 경제관료 때문이다. 3정권 내내 경제정책을 세우는 관료들은 자리만 바뀌어 앉았을 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분들 그대로이다. 또 이분들의 이력들을 살펴보면 신경제학파라는 같은 문하를 제외하고도 개인적인 성향이나 내력이 비슷한 부분들이다 시쳇말로 끼리끼리 놀고 있는데 그러니 정권이 바뀌었어도 노는 판이 그대로 인 것이다.

 

관료사회 전체를 예로 들자면 복잡하고 필자가 그럴 능력도 안되고 하니 과학기술 부분을 예로 들자면 일반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관료 사회에서는 다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전 정권에서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실무진이 대거 자리를 이동하거나 해임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새로운 정권과 줄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낙하산이라고 해도 나름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니 전혀 엉뚱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물갈이가 되고 나면 문제는 이전 정권에서 작업 중이던 프로젝트도 그 성과나 진행 정도 여부를 떠나서 모두 사라져 버리고 설혹 프로젝트가 유지된다고 해도 관련 인력이 바뀐 상황에서 제대로 진행될 일이 만무하다. 성과가 없으니 중단된 것이 아니냐 할 수 도 있는데 4년 만에 성과를 낼 만큼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라면 사실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더 쉽게 이해 되도록 실제 예를 들어보면 와이브로가 그 적절한 예이다. ‘와이브로는 김대중 정권 때 무선네트워크가 차세대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라며 진행하던 프로젝트로 노무현 정권 초에 어느 정도 보급이 되었고 필자는 3년 넘게 사용하던 기술이다. 이 방식은 이동형 무선 네크워크 기술로는 거의 최초 사용한 된 기술이며 기술 수준으로도 1~2위를 하던 것인데 이 좋은 잘 만들어진 기술을 두고 4G 이동통신 서비스는 생뚱하게도 유럽에서 만든 LTE를 채용했다. 와이브로를 세계 표준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3G 3.5G 시장을 독식하던 CDMA 방식을 대체하려던 시도는 엉뚱하게 LTE채용을 결론이 났다. 그 배후에는 바로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에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인력들이 현 정권이 들어서면 물갈이 되면서 와이브로를 활용한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 프로젝트에 투여되던 자금도 끊겨서 KT 혼자 이 기술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와이브로가 4G 서비스의 표준이 되면 이 기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한 KT가 원천기술을 가지고 시장을 흔들 가능성도 있어서 경쟁사들의 막후 로비가 있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듯 관료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없다면 정칙적인 변혁, 특히 정권 수장들의 변화가 국가의 변화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신대로 뛰어 가다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형국이 바로 노무현 정권의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 : 전혀 움직이지 않는 국민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면 관료들의 모습이 바로 국민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관료들은 원래 보수적이고 복지부동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국민까지 싸잡아 욕을 할 생각이냐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말기에 국민이 보여준 모습들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게 퇴보한 원인이 과연 현정권의 실세들과 늘 그래왔던 관료주의의 문제뿐 아니라 바로 국민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명박 후보는 사실 정치적으로는 매력적인 후보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는 단 하나 그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경제라고 말하니 그 광범위한 뜻은 다소 고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적나라하게 까보면 바로 이기적인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경제라는 것은 바로 부자로 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토건으로 이름을 날리고 서울시장 재직 당시 재건축 사업으로 인기를 얻었던 이 후보야 말로 침체된 부동산 경기를 살려서 내 배를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우리의 부동산에 대한 신념에 대해 부정적이던 필자도 이 사람이라면 적어도 경기는 회복 시키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다. 물론 이 것은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기대였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았지만 이 기대감에 투표를 했던 많은 비주류(소위 강부자로 지칭 되는 주류 국민에 반대되는…) 국민들에게 나타난 정신병적인 현상에서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한 이해와 의지 박약을 여실히 볼 수 있다.

 

6월 항쟁 이후 줄 곳 민주화의 길을 가던 대한민국은 국민의 의지로 세운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이후 내리막을 걸었고 소위 민주화 세력(?)’의 노력(?)이나 최근의 국민들의 각성된 민주의식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체에 퍼진 무관심과 보수적 생각과 행동들은 스스로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민주화의 급격한 후퇴라는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말을 한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도 피부로 느낄 만큼 상황이 악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여전히 뒤로 걸어가는 분들이 있어 참 안탑갑다.

 

 

무지와 무책임에 대한 고백

 

고인이 되신 두 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민주주의는 거저 얹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그 떡고물이나 받아먹겠다는 소극적인 자세, 나 같이 힘없는 사람이 무슨 정치를 바뀔 것이며 무슨 능력으로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냐며 스스로를 묶어 둘 때 우리사회는 후퇴하는 것이다.

 

그저 하루, 그날 그날을 보내고 오늘도 무사히~’ 이러면서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만 묻히거나 나와 나 가족만 잘살면 되지 하며 당장의 상황만 피하려는 태도로 소극적으로 사는 동안 우리는 더욱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로부터 나온 권리를 남에게 맡겨 놓고는 그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인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은 더욱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민주화 하고 진보시키려는 움직임은 이제는 진보적인 학생이나 야권 정치인들, 진보적인 지식인, 종교지도자들 만의 몫이나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세기 민주화 과정에서는 그들의 피와 땀의 매우 소중하게 뿌려졌으나 우리가 이 정권에서 후퇴하는 민주화의 가장 큰 원인이 국민들의 의식에 민주라는 개념이 깊이 인지 되지 못하고 주권자와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있음을 생각 할 때 이제는 국민들 하나 하나가 삶에서 민주와 진보를 실천하지 않으면 무서운 속도로 후퇴하는 우리 사회를 구해 낼 수 없다.

 

지난 세기의 민주운동은 참 어려웠다. 소위 말해 시위현장에서 최루탄 가스 한 번은 마셔보고 눈물, 콧물 쏟아봐야 그래도 내가 민주화에 조금 기여했다 말 할 수 있었다. 이러 저러한 상황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분명 여러 가지로 지난 세기와는 다르다. 많은 부분은 보편화 되고 쉬워졌는데 민주화라는 개념과 그 실천에 대해서도는 매우 쉬운 접근을 하고 있다.

 

지난 광우병 파동에서 시위 현장에서 보여진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시대에서 반영이 되는 가를 보았다. 그들은 굳이 민주화니 진보니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관심도 없는 단어이다. 그 들이 말한 것은 그런 상징성이나 개념이 아닌 바로 생활에서 느낀 불편함에 대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말이던 춤사위였던 간에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자신들이 느꼈던 불편함을 이야기 했다.

 

SNS를 통한 투표 독려,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며 그것 때문에 겪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연예인들, Podcast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직설적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들일일이 열거하기 어렵게 많아진 다양한 매체와 방법, 각각의 개성대로 생겨먹은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또 남의 말을 받아 들여서 자기화 한다.

 

부에 대한 삐뚤어진 생각들(돈과 권력에 대한…)부동산 불패신화라는 망국적이고 치욕적인 국민 정신병을 일으켰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교묘히 이용하는 세력들은 전국민이 부동산에 미쳐있을 때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배를 불렸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보다 높은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더 먹고 더 먹고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도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병이다. 거식증이라는 병이다. 국민 전체가 돈에 대한 거식증에 걸렸던 것이다. 정신병에 걸렸으니 의사가 이건 병이다. 치료해야 한다. 해도 무시했던 무서운 병이다. 많은 국민들이 무서운 병에 걸려 인생을 허비한 후에야 ~ 이건 좀 아니다 싶다라고 하는 판국이다. 기왕 지사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이제라도 눈을 떠서 다행이다. 라며 이제 생각을 판을 바꾸어야 한다. 다음 끼니 걱정을 하던 시대의 생각을 틀을 가지고는 마냥 그 타령으로 의식주 생각을 하며 뒤로 후퇴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기계조차 학습을 하는 시대이다. 하물며 인간이 엄청난 학비를 내고 배운 것을 잊는 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식민시기를 겪으면서 급격한 사회 변혁이 일어났다. 식민시대 바로 직전의 봉건사회에서 불과 40년의 기간 동안 근대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식민해방 이후 바로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갑자기 현대사회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가 아닌 외부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변화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스로 이런 변화를 만들 나라는 없을 만큼 이것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봉건사회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데 100년이 안 걸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사회에는 봉건사회의 의식이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겪은 봉건사회와 근대사회의 의식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에 대한 종교와 같은 믿음이다. 사실 강남 부동산 문제가 이 강한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지금 우리가 겪은 학교와 학생들의 문제는 신분상승이 생존의 문제였던 시대의 소산이라고 보면 과대망상에 침소붕대일까?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고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를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창의력이 무기인 시대인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들어 좀 다른 교육을 하는 학교와 부모들 그리고 색다른 시스템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가 늘고 있다. 소위 대안학교니 홈 스쿨링이니 하는 것들과 또 다른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느냐를 다 떠나서 보도에서 보여진 아이들의 공통된 모습에서 아~ 이것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도 해보자. 어른들의 민주만 생각하고 아이들은 무시한다면 그것부터 비민주요 역사에 대한 뒷걸음질 인 것이다.

 

필자는 최근 그 유명한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읽고 있다.

소설에서 회색사나이들은 시간을 저축하라며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그들에게 유혹된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 같이 시간이 없다며 모든 즐거움을 저당 잡히고 살아간다. 늘 바빠서 시간에 허덕이고 늘 괴롭고 화난 얼굴을 하고 산다. 남보다 더 돈 많고 남을 부리는 위치에서 살겠다는 바르지 못한 생각에 생의 즐거움과 가족의 행복을 저당 잡혀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닮지 않았는가?

 

정말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회색사나이들에게 우리의 생을 빼앗겨서 자신의 삶을 제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런 암울한 미래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 줄 수도 있다.

정말 무엇이 선이지 파악하며 늘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권력의 핵심이고 정치인들은 우리의 대표이다. 정치인들은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맡겨서 대신 우리의 의지를 대표하는 이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지금은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의사 권이 국민들이 빌려준 것이라는 것을 잊고 국민의 이름을 팔고 엉뚱한 것을 위해 또 엉뚱한 이들을 위해 일한다. 따라서 선거권은 이들에게 우리가 주권자임을 보여줄 귀한 기회이다. 그들을 바로 보고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귀한 선거권을 헛되이 쓰지 않을 수 있다.

또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대화와 의사표현의 수단을 이용하여 주권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시류에 매우 민감한 정치인들은 SNS같은 의사소통 수단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작은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압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시민모임이나 정치관련 세미나. 교육에 참여하여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은 좀 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 뿐 아니라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 봄직도 하다.

 

다시 한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그리고 예수의 말을 생각해 본다.

 

움직이지 않으면 가진 것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움직인다면 다수의 힘은 위대한 것을 해낼 것이다. 작은 실천 하나가 결국에는 변화를 만들 것이고 나 하나의 헛된 수고가 모이면 대세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은 2011년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들을 편집한 것이다.

초반 부에는 대한민국의 정치상황, 민주화가 퇴보한 원인 등 정치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한다. 중반부에는 부동산, 경제 문제들이 어떻게 정치와 연관되어 움직이는 가를 이야기 한다. 저소득층이 왜 보수적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필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늘 이해가 안되던 부분이었었다. 그리고 후반 부로 가면 교육과 사회복지 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민주화는 거창한 부분이고 하면서 일상화적인 것들이 모인 혼합 결과이다. 내가 나에 대해 더 나아가 가족관계에서 민주화될 필요도 있고 내 신념을 대외적으로 피력하여 힘을 결속할 필요도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교육 현실을 개탄하면서 암담한 미래에 대해 걱정이 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이 잊혀질 무렵 작은 실천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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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름 2012-03-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무관심했던 정치에 대해 조금식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던 한해입니다. 나 하나쯤 하는 식으로 외면한 결과가 현 정권을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훌륭했던 작고하신 두분 전 대통령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던 한해였습니다. 적어도 관심을 갖고 올바로 보려하는 노력만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되는 요즘입니다.

파스 2012-05-10 13:4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살아가는 한 대한민국에 살아가는한 정치와 특히 대한민국의 정치상황과 별개로 살 수 없죠. 관심이 필요합니다.
 
10대들의 사생활 - 부모가 놓치고 있는 사춘기 자녀의 비밀
데이비드 월시 지음, 곽윤정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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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불혹에 접어든 필자도 분명 10대를 지나왔다. 필자의 어렴풋한 현재 기억으로는 무척 조용했던 필자의 10대의 시절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부모님과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기억이 잘 안나니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동안 보아온 십 대들의 공통적인 특성을 생각해 볼 때 필자의 10대 시절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내 기억도 불분명한데 그 때 느꼈을 부모님의 아픔은 더욱 알 수 없을 것이다.  30대가 지나고 세상에 대해 또 나에 대해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 한 발 물러서 보게 된 이후 생각해 보니 내 스스로 얌전하기 보냈다는 나의 10대에도 부모님에게 대들고 짜증 부리던 모습들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물론 20-30대 에도 그런 행동을 했었으니 10대에는 오죽 했으랴~)  또 눈에 보이는 말썽은 없었다고 해도 꿍하니 화난 사람처럼 지냈다면 그것 역시 누군가 에게는 갈등 상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대의 문제 - 그들도 피해자이다.

 

10대의 문제에서 가장 난감한 부분은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심리상태이다. 그들은 과도하게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며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려 한다. 또 과도하다 생각될 정도로 즐거워하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져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고 상대가 부모에게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대들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손 씻고 밥 먹으라는 정도의 일상적인 부모의 요구에도 자주 화를 내며 세상의 짐이란 짐은 다 진 것처럼 고뇌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거부하고 가족의 작은 요구에도 반항을 한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태도는 아무리 인내심 많은 부모라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한다. 내 아이니까 받아줄 수도 그렇다고 매번 강하게 제어를 할 수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대 부분의 부모 들은 상황 파악은 고사하고 10대 자녀 못지 않게 덩달아 분노를 터트리며 인내심을 잃고 만다

 

그러나 이런 어처구니 없고 대처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은 부모가 느끼는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 10대 자녀, 그들도 그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만 읽어보면 이해 되기 싶지 않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화를 낸 본인도 자기가 화를 낸 것에 대해서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상황을 이처럼 잘 표현 말도 느물다 싶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화를 내 놓고 화를 낸 스스로를 질책하고 원망한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이 낸 화가 왜 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어서 혼란스럽기 까지 하다. 견디기 힘든 현재의 상황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니 내부의 갈등은 더욱 커진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은 스스로 분해해서 작은 조각을 낸 후 해결해 나가야 하는데 10대에는 그것이 매우 어렵디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는 결국 외부로 표출하여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 대상은 가장 만만한(?) 가족, 특히 부모인 것이다. 요즘에는 주위의 또래나 심지어 다른 어른들에 대해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갈등은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표출이 된다. 10대의 이런 방황은 가족들에게도 전해지고 악순환으로 돌고 돌게 된다.

 

 

 

덜 자란 뇌가 문제

 

이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는 이들의 심리 상태를 매우 불안정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전전두엽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청소년기에는 이성 보다는 감성, 감정이 앞선다. 전두엽는 뇌의 발전 단계에서 비교적 후반부에 형성이 되기 때문에 이미 어른에 가까워진 다른 뇌조직들이 빠른 동작을 하는데 반해 이성적 판단이 그것을 따라 가지 못해서 이 시기는 소위 말해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움직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청소년기의 신체적 변화, 사회적 변화는 호르몬의 작용을 비약적으로 증폭 시키는데 이 때 증폭된 호르몬들은 비이성적인 행동이나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생겨 괴롭고 혼란스럽더라도  결국 이성적인 판단으로 최종 결정을 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만  하지만 청소년의 미성숙한 전두엽은 매우 느리게 작동하여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하고 난 다음에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판단하게 된다.

 

 

 

여전히 인내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이상 행동이 이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징표라는 것을 잘 이해한다면 자신들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따스해지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잘 이해를 하고 나면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적 특성을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이 시기를 함께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무한한 사랑을 감싸라는 말은 이래서 하게 되는 것 같다. 자녀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고 이해하고 신뢰해주어야 한다. 부모의 사랑과 신뢰는 자녀가 이 시기를 잘 견디어서 어른이 되는 것을 도와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부모 또한 평소보다 더욱 자신의 언행에 주의를 해서 자녀에게 나쁜 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랑과 신뢰에 더불어 자녀의 어긋난 행동은 과감하게 제지하는 의지력이 필요하다. 어른이니 아이보다 낫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자칫 자녀를 물론 가족들 까지 위험에 처 할 수 있다.

 

 

 

이 책은 책 읽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쉽게 읽혀질 만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10대 자녀와 갈등으로 힘든 부모들이라면 머리가 아프더라고 읽어볼 것을 권한다. 막연히 알고 있는 것과 왜 이런 것인지 세세히 설명하고 자신과 비슷한 고통의 시간을 겪어본 다른 가족의 예를 보면서 용기를 가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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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10도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엘리자 그리즈월드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종교가 구원이 되지 못하는 곳 위도 10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에게 종교를 선택하고 믿는 것은 개인 신념의 문제이고 자신의 밖에서 겪게 되는 문제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받는 비난이나 따돌림 정도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선택한 종교에 따라 그들의 삶이 달라지고 심지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되는 곳이 존재한다. 

 


타인의 시선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좋았던 탓에(우리의 할아버지 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는 나름 고난의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생존과 죽음에 대해 다소 낭만(?)적으로 보는 것 같다. 이런 시각은 신념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죽음을 막연히 미화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무엇인가를 거부했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나 다른 종교인끼리 이단으로 몰아 죽이는 일은 오래 전의 일이다. 물론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군대에 복무하지 않아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남아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문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안정된 상태이다 보니 타국의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극화하여 보는 경향을 보인다.


 

이슬람이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은 여러 면에서 익숙하지 않은 종교이다. 일반인이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이슬람 문화는 테헤란 로 어딘가에 있다는 이슬람 모스크와 이태원 언저리에서 보여지는 이슬람 식 제품을 파는 가게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는 흔히 보게 되는 머리에 두건을 쓴 말레이시아인들 조차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 이슬람= 테러 이런 식의 등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셔먼호 사건 후 맺어진 조미통상 조약으로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아 조선에서 활동을 한다. 지금도 개신교 선교에서는 교육, 의료, 생활개선 프로그램이 사용되는데 근대 우리나라 사회는 이 프로그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한국전쟁 시기에 우리나라 사회에 큰 도움이 된 개신교의 구호 활동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현재 활동 중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많은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가 미국에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로마교황청의 영향을 받고 있고 초창기의 박해 이후 많이 현지화 된 로만 카톨릭(천주교)그리고 개인의 성불이 목적이면서 토착 신앙화된 불교와는 다르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종교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 받게 된다. 여기에는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세계제일, 세계의 경찰, 형님을 자처하는 PAX America)까지 포함한다.
현재 미국은 냉전 이후에 제1의 적을 테러조직에 두고 있고 대 부분의 테러조직이 이슬람 무장세력이니 우리나라에서 이슬람 과격분자니 이슬람 테러조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잘 각인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과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규정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요인들에 의해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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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속적인 문제이다

이슬람, 기독교 간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종교간의 문제들은 신념의 문제 못지 않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중세 십자군 전쟁으로 두 종교가 표면적으로 종교전쟁을 시작(사실 이 충돌도 세속적 문제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한 이후 이 두 세력은 서로의 확장에 대해 매우 민감해진다.

 

두 세력간의 분쟁이 본격화 된 것은 소위 제국주의의 시대로 불리기도 하는 17세기부터 라고 본다.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은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에도 손을 데는데 특히 모든 면에서 취약했던 아프리카에서는 문제는 심각했고 그 후유증도 여전하다.  에티오피아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를 제외하고는 종교가 각 지역 부족의 특성을 대표하리만큼 수 많은 종교특성이 존재했고 종교가 바로 그들일 만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반면 국가의 통제와 보호에서 소외되어 생존문제에 취약 하였던 그들에게 종교와 함께 제공되는 교육, 의료, 기본생활 지원 등은 매우 절실했다. 이슬람 노예 사냥 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방 기독교 선교사의 그늘이 필요했고 지금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본질은 그 들이 믿는 여러 신들과 밀접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기독교나 이슬람 신들을 알고자 하기 보다는 그 날개 아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믿는 다고 하고 기도 자리나 예배 자리에 나가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선물들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인 도움을 얻으려는 잠재적인 새(?) 신자들의 욕구와 상대 종교, 심지어 같은 종교내의 다른 종파들과의 경쟁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신자 수를 늘려 상대종교, 상대종파와의 숫자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 하려는 참말로 세속적인 경쟁에서 상대 부족. 상대 종교인을 죽이는 것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자신들의 개 죽음을 순교로 치장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소위 문명화 되었다는 지역에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종교지도자라도 상대 종교를 원색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 이런 사례는 요 몇 년간 일어났다. 이슬람을 비하한다는 이유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처형의 위협을 당한 복음주의 목사는 자국민(미국)들에게도 도를 넘지 말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구상의 많은 부분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살해를 당하거나 상대 교인을 죽인 후 자랑스러워 하지 못한다.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에 반하는 반인륜적 파렴치한이나 자신의 종교에 과도하게 빠져 현명한 정신을 잃은 광신자로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각 종교를 경전의 문자대로 해석하거나 지도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교조적인 시선에서 보면 사악한 세력에 물든 세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대부분의 유일신을 모시는 종교에 따르면 다른 종교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있어 종교는 많은 세상의 일 중에 하나가 되었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늘 세속과 성스러움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욕망과 성스러움 속을 저울질 하고 그 저울질 속에서 최선(?)을 찾으면 산다. 그러니 아무리 성전을 외친다 해도 그 동인에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개입이 안되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공존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마무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공존이 과연 인류에게 있어서 최선의 가치인지 아니면 그것 역시 허상인지 필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의심스런 부분이다.

누구나 자기의 신념에 따라 살 수 있다. 그것이 세속의 그 어떤 것(그것이 기본적인 생존의 위한 욕구라고 해도 종교의 순수성에서 보면 역시 욕심이라는 필자의 생각이다.) 아무리 핏대를 세워서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외치며 나아가도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 크다. 산속 암자에서 면벽 수도를 하는 선승도 공양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야 할 것이다. 세상의 종교는 선교(대부분의 인류의 구원을 위한)을 위해 반드시 세속 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효율성을 위해 점점 세속화 된다. 여벌의 옷이나 먹을 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빈 몸으로 전도를 다녔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큰 성전이 필요하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해야 하는 현대의 교회들이 이해가 될까? 박해를 피해 피신해 다니면서도 형제에 대한 용서를 말하던 모하메드가 지하드 라면서 불특정 대상으로 자행되는 학살에 대해 뭐라 할까?

 

필자는 기독교 신자이기에 조심스런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 신자라 함은 종교문제에 대해서 뭐라 꼬집어 지적 질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을 위해 공존을 생각하는 이 책을 보면서 필자는 공존은 매우 요원한 일이고 과연 공존이 최선의 방법일까 하는 이렇다 할 대안도 없는 의구심만 든다.

 

마치 이슬람과 기독교 양대 세력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쟁이라고 세뇌 받아온 것들의 실상이 자원 분쟁이라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이 책에서도 저자가 알아낸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형국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지 의심스럽다. 사실 상 공존을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판이라고 본다. 필자가 앞의 결국 세속적인 문제이다 라는 단락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공존이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들 처럼 ‘위도 10’의 낙후된 지역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평화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날까? 일어난다고 확정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상황을 우리의 수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꿈 같은 일 아닌가?

 

저자가 간간이 이야기 했듯이 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본질이 종교적 신념 보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같은 여호와를 신을 믿는 종교들, 또 같은 알라를 믿고 같은 코란을 읽은 이들 사이에도 분쟁이 소지가 충분하다. 간간이 폭발하기는 하지만 잠잠히 수면 아래에 축적된 잠재된 위험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있어 종교는 많은 세상의 일 중에 하나가 되었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늘 세속과 성스러움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욕망과 성스러움 속을 저울질 하고 그 저울질 속에서 최선(?)을 찾으면 산다. 그러니 아무리 성전을 외친다 해도 그 동인에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개입이 안되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사족 – 그냥 지껄여 보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본류를 가진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오래 전에 갈렸다. 유대교에서 바라보는 예수는 선지자 중에 하나이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예수는 선지자 이긴 하지만 존경의 대상도 아니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시선은 이슬람교와 같다. 하지만 그것이 같다고 해서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계성을 찾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모하메드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공부했던 것은 사실 이었던 것 같다. 또 당시 한참 세력을 확장하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호감과 우려감이 교체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족을 기독교 중에 하나였던 콥트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 망명 시키고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전한 것으로 보면 이 점에 대해 고민해 볼 만하다.  


현대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는 그 옛날 초기 교회들에서 보여주던 순수한 열정은 남아있지 않다. 그 동안 세상을 두루 다니고 여러 사람들이 이에 섞이면서 그 수순성은 사라졌다. 심지어 모두가 읽은 각자의 경전에서 금하거나 우려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세속적인 이익을 정당화 하기까지 한다.
 

종교의 순수성에 의심할 여지가 있으니 그것에서 인류의 구원이나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이 헛되다고 말하거나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거나 신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며 신념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정당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의 종교라는 이름을 일어나는 반 인류적인 테러나 분쟁은 분명히 사라져야 할 죄악들이다. 또 그것이 종교의 이름을 자행된다는 점에서 종교인들의 각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 종교인들이 더욱 주목하여야 하는 점은 바로 그 동인이 바로 세속적인 욕심들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광적인 집착으로 종교가 변질될 가능성이 크지만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몇 가지 문제로 종교에 함부로 돌을 던질 권리는 없다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지 하고 있듯이 종교가 비 종교보다 더 인류애 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따르고 종교가 있어 인류의 삶이 윤택해진 것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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