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들은 자신의 글이 어떤 분야에 더 잘 나오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 있게 내 작품다운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문학의 장르 중에서 어떤 특정 장르에 매이지 않는 다양한 느낌이 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태어난 곳과 상장하고 생활하는 곳이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국적에 한계를 느끼지 않는 이점, 즉  다양한 글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상적인 이야기 속에 어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 그리고 이번처럼 10 년의 공백을 깨고 나온 작품답게 기존의 작품의 한계를 또 하나 넘어선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을 내놨으니 하는 말이다.

 

읽다 보면 책의 선전 내용처럼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킨다.

동화 같은 여러 인물들의 등장이 다른 환경과 어울리면서 작가가 드러내 보이고 자 하는 묵직한 주제가 또 하나의 생각을 던져준다.

 

고대 잉글랜드의 어느 평원에 사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토끼굴과 같은 곳에서 산다.

그곳 사람들은 뒤돌아서면 방금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로 왜 기억력이 없어질까에 대한 의문조차 하지 않은 채 그날그날을 합동해서 살아간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간신히 초 하나를 발견해 가져와 쓰려 했지만 어린 소녀에게 빼앗기고 문득문득 생각날 듯한 어떤 이미지의 형상들이 액슬의 머릿속에 기억이 되곤 하지만 꿈인지, 정말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일들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못하는 금슬 좋은 부부였기에 그들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은 놀라움 그 자체다.

 

아들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이웃에 살고 있다는 가능성에 둘은 길을 떠나게 되고 이후부터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과 그 속에서 기억이란 것에 대한 인물들 간의 대화가  독특한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브리튼 족으로서 살아가는 노부부가 만난 사람들, 그중에서는 뱃사공도 있고, 이 뱃사공의 휴식을 방해하는 노파도 만났으며, 아내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들른 색슨족 마을에서는 위스턴 기사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도깨비에게 물린 자국을 가지고 있는 에드윈이란 아이와 함께 다시 수도원에 살고 있는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같이 동참하게 되는 사연들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저마다의 생각들을 지닌 채 수도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신부님의 말씀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암용 케리그의 입김이 망각의 안개가 되어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고 한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면서 이 암용을 제거하기 위한 임무를 갖고 나선 위스턴의 사연, 그와는 반대로 아서왕의 조카로 늙은 기사인 가웨인 경이 오히려 암용을 지킬 의무를 지니고 있기에 대립될 수 밖에 없었던 두 기사의 팽팽한 대결까지, 공상이 주는 무한한 세계를 마치 성인 동화처럼 느낄 수 있으면서 읽게 되는 책이다.

 

 

 

두 부부는 길을 떠나기 전  비어트리스가 마을에서 만난 한 여인을 말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재의 금슬 좋은 부부의 삶이 더 나았을까? 아니면 아들과 헤어진 사연과 그 후의 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아버린 기억의 되돌아옴이 나은 삶일까?

 

둘 사이의 문제는 없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살았던, 단지 기억만 없을 뿐인 삶에서 벗어나 왜 굳이 아들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하려 했을까?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좋은 것은 쉽게 잊혀도 아픈 상처들은 자신의 뇌 속에 자기방어제란 것이 있어 형편에 맞게 기억이 되어 왜곡되거나 망각이란 것을 실현시켜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 여인이 한 말은 비단 두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작가가 우리들 독자들에게 묻는 말이다.

 

때때로 자신을 기억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웨인 경, 위스턴의 눈길을 통해 액슬은 과거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기억을 찾게 되고, 부인과의 있었던 기억들이 되돌아오면서 괴로워하며 슬퍼한다.

 

읽으면서 차라리 진실이란 것을 외면하고 지금처럼만 살았더라면 두 부부 사이는 영원히 행복했을까? 아니면 집을 떠난 아들 생각과 그 원인에 대한 이유를 갈망하면서 고통 속에 살아갔을까?

 

모든 경우가 행복해 보이진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현 상황이 과거의 어떤 결과 때문에 초래한 결정적인 사실들이라면 무던한 사람들일 경우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가겠지만 원인을 모르고 살아가는 망각 자체의 삶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기억이 주는 한계성을 저자는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고 살아갈 수있었던 점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p 235

 

아무리 나쁜 결과가 온다 해도 비어트리스는 둘 사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뱃사공이 와서 아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려 했을 때 액슬이 느꼈던 것처럼 , 이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하는 대사들이 무척 가슴이 아파졌다.

 

신의와 사랑으로 다져진 부부-

아들이 있는 강 너머는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레테의 강은 아니었을까?

 

자신들의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이제는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하는 저 강,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뱃사공이 던진 질문에 답함으로써 이미 어떤 결과가 이어질지 알고 있었을 액슬의 마음이 느껴지기에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우리의 삶이란 것 자체도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면서 주는 이어지는 생활이지만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이란 것에 취해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은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들이 연신 떠오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p 48


 

슬픈 기억이 주는 인생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 그리고 기억의 진실이 주는 아픔, 망각이 주는 아련함이 모두 적절하게 보이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끝 종반 부는 물속을 헤치며 가는 액슬의 모습이  기억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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