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반지
즈덴카 판틀로바 지음, 김태령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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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상처 속에 한 힘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 참혹한 일상을 겪어왔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자전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그 어떤 효과보다도 인간 본연의 존엄성에 대한 중요성을 상기시키고도 남는다는 것을 여러 책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가까운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들 중 6.25 사변을 겪으신 분들의 이야기나 일제 시대 때 살던 이야기를 들어보더라도 악랄하다 못해 저절로 치를 떨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한 기억들은 인간이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코 영원히 그 뇌리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히틀러의 광기적이고 엽기적인 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도 그런 참혹함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역사는 기리어 새겨야 할 것이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선 끝까지 전쟁 당시 범죄자 처벌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나 책, 그리고 실제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이런 바탕은 박물관에 보전됨으로써 후세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충격을 다가오게 한 산 역사라고 생각한다.

 

1922년 생이니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도 장수에 속하는 93세의 주인공 즈덴카 판틀로바-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체코에서 터전을 삼아 살아온 유대인 여성이다.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 만에 찾은 고향에 대한 장소, 그 안에서 어울렸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며 자신이 직접 겪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들에서 접해 왔던 이야기들 못지않은 충격과 인간의 끊임없는 희망, 그리고 자신의 의지 관철 속에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가 감동을 일으킨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모두가 하나의 같은 체코인으로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1939년 3월 15일 수요일, 체코의 유대인 가정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녀의 가정에 광풍이 들이친다.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재산 몰수는 물론이요, 외국 방송을 들었다는 죄 하나로 아버지와의 생이별, 그 이후 엄마, 오빠, 여동생을 포함해 자신까지 테레진이란 곳에 설치돼 있는 강제수용소에서 살게 된다.

 

한눈에 반한 아르노와의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가까스로 수용소 안에서 짧은 재회를 나누지만 이내 아르노 가족이 형벌 수송선에 타게 됨으로써 이별 전야의 날을 맞이한다. 

수송선에 갇혀 떠나기 전, 아르노는 그녀에게 작은 깡통 반지를 끼워준다.

 

"이건 우리 약혼반지야. 널 지켜줄 거야.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내가 널 찾아갈게."

 

 

 

이 한마디로  그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테레진 안에서의 연극 출현이나 각기 다른 고통과 위험천만한 삶의 고난을 이어가는 즈데카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씀과 오로지 아르노를 만나야 한다는 의지로 꿋꿋이 버텨나가는 과정들이 영화에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사실성의 묘사가 압권이다.

 

수용소에서 다시 아무것도 모른 채 아유 슈비츠로 이송된 후 엄마와 이별하는 과정과 엄마의 죽음, 여동생의 임신과 고난의 행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 독일군의 지독하고도 악랄했던 도보를 이용한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가기까지의 모든 상황들은 인간이 같은 동종의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우리는 익히 히틀러가 전쟁에서 망한 날짜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극에 다다른 독일군의 만행을 좀 더 참아내야 돼! 라는 응원을 하면서 읽게 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일체 그 어떤 정보를 접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베르겐-벨젠 수용소 안에서 죽었거나 도착 당시에 이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같은 친구이자 동료였던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는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는 그 어떤 말조차도 허용할 수 없는 숭고함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랑은 모든 장애를 극복할 것이란 믿음, 수용소에 도착한 직후 밀려드는 후각적인 냄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순진해 보인다고나 할까? 정말 서글픈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장면 중의 하나다.  

 

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것에서 연기 냄새가 났다. 불에 그슬린 고기 냄새 같은, 좀 달착지근하고 알싸한 냄새가. 근처 도축장에서 소뼈와 내장을 태우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설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p 223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질 존엄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던 비굴한 심정을 만드는 머리 삭발서부터 온몸에 이르는 수색까지, 상해 가는 뼈마디에 붙은 살점 하나라도 서로 먹겠다고 달려드는 인간들의 행동의 묘사들은 헤르타 뮐러가 쓴 숨그네 그 이상의 처연함,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느끼면서도 못 느끼는 감각의 상실성, 연민,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들을 다시 느껴보게 되는 책이다.

 

아르노가 자신처럼 같은 수용소 안에  살고 있을 것이란 희망, 설사 못 만난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약속의 증표였던 깡통 반지는 그녀 자신의 삶을 오로지 지탱하고 생의 마감의 순간이 왔던 그 순간에도 굴복하지 못하게 했던 원초적인 생명이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행동 하나에 대한 결단성, 영국군의 도움을 받기까지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했던 그녀의 삶 자체는 한편의 역사란 생각이 든다.

 

전쟁이 끝난 후의 다시 도전한 새 삶에 대한 의지와 아르노를 잊지 못했단 사실, 사랑이란 이름하에 저자가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며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는 실로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이기에 더욱 아픔이 느껴진다.

 

결단력과 용기와 행운, 그것은 삶의 중요한 필수적 요소다.- p 305

 

모든 가족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후에 겪었던 인생의 방향 전환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사연도 점차 고령화 됨에 따라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그들의 애통한 심정과 역사 속에서 보전해야 할 기억의 소산적 가치를 이번에 다시 한 번 이 책의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느껴본다.

 

지금도 자신의 일생에 얽힌 홀로코스트에 대한 참상을 강연하러 다닌다는 저자의 노고와 그 의지력, 그리고 이를 보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허투루 버려질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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