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결혼을 한 몇 쌍은 평생토록 검은 머리가 팥 뿌리가 될 때까지 살아가라는 주례사의 말이 채 식기도 전에
이혼을 한다는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황혼이혼까지 생각한다면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폭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넓은 의미로 보자면 그만큼 사랑의 의미와
인내심 내지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점차 희석이 되어가는 풍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씁쓸하기도 하다.
청소년 소설로서만 대해왔던 김려령 작가의 이번 소설은 결혼과 사랑의 형태, 그리고 그 의미에대한
생각을 던진다.
처음 접한 공간적 배경이 마치 가까운 미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내 이름은 노인지, 올 해로 29살의
끄트머리를 향해가고 있는 결혼정보 회사 W&L에 근무 중이다.
입사 6년차로 이곳에서도 VIP 전담부서 NM 소속이고 직급은 차창이다
NM이란...명칭은 일명 (new marriage)의 약자로서 W&L의 비밀 자회사에 속한 은밀한 부서, 이곳에 소속된 직원들은 VIP 회원의 기간제 배우자로 근무하고 있다.
즉, 계약 결혼, 또는
위장 부부생활을 원하는 상대를 대상으로 일정 기간 동안 계약을 맺고 살다가 헤어지는 직업이다.
한 번의 노(no)만 하면 영향을 받게 될 상황에 네 번째 같이 산
남자로부터 다시 재계약이 들어오고 다시 이어지는 생활, 그런데 그녀 앞에 동창인 시정의 소개팅으로 나간
자리에서 만난 엄태성이란 남자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다.
법적으로 간통이란 제도가 없어지면서 찬성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나름대로 결혼제도란 것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두 사람 간의 조화로운 삶은 오랜 기간의 시간과 참을성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보이는 인지의 첫사랑의 동성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실패한 첫사랑의 반발로 엄마의 구속력을 피하고자 들어간
회사였지만 여기서도 진정한 사랑의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 철저한 고객 대응으로서의 부인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사랑의 실루엣만 보일 뿐인 상황에서 인지는 뜻하지 않는 시정의 고백을 듣게 되면서 동창 간의 우정과 사랑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픔의
과거를 잊을 수가 없게 하는지에 대한 의문점 해소, 그리고 재 계약한 사람에 대한 느낌이 좋아진다는
감정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말아야 함을 느끼게 되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는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길 거부하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작품이다.
결혼과 사랑에 대한 다소 파격적인 상황 설정과 동성애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라,
작가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계기를 , 그렇지만 각 사연들에 얽힌 사랑의 형태를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결혼이란 제도 때문에 이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과 여전히 나이는 들어가지만 젊은 오빠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옆집 할머니 식의 사랑,
엄태성의 스토킹 비슷한 행동 앞에 나조차도 싫어했을 캐릭터의 출현 설정들은 작가의 현란한 글 솜씨와 잘 맞물리면서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 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이 세계로 발을 들인 순간부터 느꼈던 결혼에 대한 회의, 그렇지만
언젠가는 시정의 사랑을 받아들일 날이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하는, 하지만 여전히 결혼 자체에 대한 통렬한
작가의 현실적인 글엔 제도권 밖에서의 사랑이 안전한 제도권 안에서의 사랑보다 더 견고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결혼을 하는 걸까요?"
"법적 결혼을 하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거든.
상대한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순탄하게 끝낼 수가 없어.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싫은데 더 큰 이유가 있나.
통통한 발이 곰 발로 보이기 시작하면 사는 게 괴롭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은 거야. 그런 면에서 합리적이긴 한데 끈끈한 정은 없지."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들은 사랑을 꿈꾸며 언젠가 나와 잘 맞는 상대가 나타나길 소망하면서 내일을 꿈꾸지 않을까?
여기저기 트렁크를 이끌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천천히 깨달아 가는인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