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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시 - 제2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오사키 요시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사 / 2015년 6월
평점 :

기억이란 장치는 때론 유용하기도 하지만 망각이란 또 다른 장치가 견제를 해주기에 인간들의 삶은 장. 단점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어느 때가 어떤 것을 계기로 순간적으로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 이는 잊어버리려 하지만 내적의 깊은 심연 속엔 어떤 근간의 바탕이 되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책-
책 제목이 낯설다.
수족관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할뿐더러 가끔 마트에 가면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미니 바다 세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나오는 파일럿 피시란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역할에 대해 알게 됐고 이는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장치다.
다시 재개정되어 나온 책이라 시간의 흐름은 있겠지만 지금 읽어도 별 어색함이 없이 진행이 되는 것으로 봐서 상을 탈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에 올라와 어떤 뚜렷한 자신의 주관 없는 삶을 살고 있던 남자 주인공 야마자키는 여친 유키코의 주선으로 인해 월간 <이렉트>라는 포르노 잡지사에 입사를 하게 되고 세월이 흘러 편집장으로 살아가는 40대의 미혼남이다.
3여 년 간을 유키코와 사귀다 헤어지고 지금은 20대의 여자친구가 있는 몸-
자신의 집에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를 보다 전화를 받게 되는데,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바로 그녀, 유키코의 목소리를 대번에 알아듣는 자신에게 놀란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유키코는 그에게 한 번 만나자고, 같이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물음과 함께 이야기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억이란 소재가 주는 사랑에 대한 자존심, 연민, 후회를 보여준다.
“으음 그건, 파일럿 피시(pilot fish)라는 게 있는데, 건강한 물고기의 똥 속에는 건전한 박테리아 생태계가 있게 마련이지. 그래서 수조를 설치하고 제일 처음 넣는 물고기가 중요해. 건강한 물고기가 생태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물속에서 똥을 싸잖아, 그러면 약 이 주 후에는 건강한 물고기의, 즉 비율이 적정하고 상태가 좋은 박테리아 생태계가 수조 안에 만들어지는 거야.”
“파일럿 피시?”
“그래.”
“어감이 참 좋다.”
“하지만 조금 슬프기도 해.” -p35~36
제목으로 쓰인 파일럿 피시는 자신의 할 일을 다하면 수족관 상급자에 의해 버려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분양을 받게 되는, 일테면 어떤 기초공사의 가장 중대한 역할을 하는 물고기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 보는 두 남녀 간의 과거의 사랑은 유키코의 말처럼 자신의 어릴 적 자존심의 원칙 때문에 야마자키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없었고 결국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함으로써 또 다른 동창생에 대한 배신을 알고도 모른 척하며 살아가야 하는 여인이다.
상대방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들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면 좋았을 것이란 느낌을 받게 하는 이런 일련의 연속적인 두 사람 간의 사랑은 와타나베 씨가 깔아 준 파일럿 피시에 부응하지 못한 채 헤어졌고 1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여전히 두 사람 간의 저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연민은 안타까움을 준다.
서로 다른 전철의 노선을 마주하고 바라보는 두 중년의 남녀-
사귈 초창기엔 그대로 전철을 보내버렸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란 것, 이것이 마지막 만남임을 아는 두 남녀 간의 해후와 이별의 장면은 인생의 청춘시절에 보이지 않았던 파일럿 피시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이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현재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끼는 야마자키의 생각이 고요한 수족관의 물 흐름을 연상시킨다.
별 커다란 사건의 이변 없이 잔잔히 흐르는 인생의 파고를 넘나드는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현대인들의 기억이란 장치를 통해 작가는 사람은 한번 만난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다.라는 첫 문장의 주제를 시종 같은 흐름 속에 또 다른 시간의 배경으로 변주를 해내는 노련미를 보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