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카르테 1 신의 카르테 1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작품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4시간 365일 대응이라는 모토로 운영되고 있는 , 시나노대학 의학과를 나온 후 대학에 머물지 않고 교외에 있는 혼조 병원에서 5년째 근무를 하고 있는 구리하라 이치토는 자칭 그 자신이 사악한 천사로 부르고 있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환자를 끌어당기는 의사'란  별명으로 불린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응급환자가 몰려오는 통에 간호사들 사이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근방에서 이 병원만큼 큰 곳이 없기에 온갖 증상의 환자들로 넘쳐난다. 자신의 주 전공이 내과계통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진료과목을 곁들여서 해야하는 처지는 그 옆에 무수히 많은 카르테(진료카드)가 이를 말해준다.  

어느 날 같은 학과 친구면서 대학에 있다 이 곳에 온 동료 스나야마 지로로 부터 대학병원에 한 번 쯤은 근무를 해봐도 좋을 경험이라는 말과 함께 시나노대학으로부터 소화기내과로 와 달라는 청을 받고 고민을 하게 된다.  

같은 시기 췌장암 환자의 급속히 나쁜 상태로 이별을 맞이함과 때를 맞추어 담낭암 환자로 대학병원에 추천서를 써 줘서 치료의뢰를 넘겼지만 대학병원으로 부터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은 아즈미란 환자가 다시 입원을 청하면서 더욱 그 고민은 커진다.  

아무런 가족도 없던 그녀는 항상 밝은 미소를 보여준 환자였으며, 그 자신은 계속 상태가 나빠짐에도 마지막 희망으로 일본의 알프스란 명칭으로 불리는 산 구경을 하는 것과 동시에 어릴 적 먹던 카스테라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힘든 병마와 싸우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구리하라는 병원 옥상으로 데려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하지만 이틀 후 그녀는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가고 그녀의 마지막 부탁인 남편이 사준 모자를 머리에 씌워줌으로써 그녀와 약속을 지킨다.  

작가 자신이 의과 대학출신이자 의사로서 현장에서 경험한 이야기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 책이다. 

오랜 현장의 경험상으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베테랑 간호사, 1년차 간호사로서 아직까지는 환자의 아픈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하고 치료를 해야하는지 방황하는 간호사 미즈나시 요코의 모습,  거구의 모습임에도 미즈나시를 짝사랑하다 자신의 뜻대로 데이트를 하게된 친구 스나야마의 모습은 촌각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의 현장에서도 피가 끊는 생생한 청춘들의 모습과 따뚯한 인간의 모습이 보여진다.  

구리하라가 살고 있는 주택에 같이 세 들어 사는 학자님이라 불리는 사람과 남작이라 불리는 화가와의 우정은 학자님이 떠날 때 보여준 눈 내리는 겨울에 온통 벚꽃이 만개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그들의 모습에선 우정과 사랑은 이별 앞에서 언제나 새로운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가벼운 말투속에 자신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더 나은 물로 들어가 좋은 시설과 함께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이 조그만 병원에서 열악한 환경을 견디면서 정 많은 나이 든 환자와 같이 보내는 것이 좋은 가를 결정하는 기로에 섰을 때, 그의 스승격인 왕너구리, 여우선생이라 불린 소화기내과 부장과 부부장의 견해는 주인공에게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에 대한 멘토가 되주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뭐니해도 눈물이 찡하게 흐르게 하는 장면은 아즈미를 살리기 위한 일초를 다투는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의사의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이 과연 이 환자에게 유익한 것인가? 하는 갈등이  찰나의 순간 속에서 구리하라가 생각하고 있던 말들은 일말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 

-약물이나 항생제 등을 이용하여 끊어지는 목숨을 연장한다는 건 오만한 사실이다. 원래 수명은 인간의 지혜를 벗어난 영역이다. 처음부터 운명은 정해져 있다.  

흙에 묻고 정해진 운명을 파내어 빛을 비추고 보다 나은 임종을 만들어 간다. 의사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의료 행위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사람들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전부 해달라"라고 울면서 소리치는게 미덕이라는 식의 생각은 슬슬 버려야한다.  

살아 날 가능성이 있다면 의사는 가족의 요구와 관계없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치료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살아나지 않을 사람, 즉 노환으로 누워있는 고령자와 말기암 환자에게 행하는 의료이다. 

-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감상적으로 " 모든 치료를" 하고 외치는 것은 이기적이다.  

환자 본인의 의사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가족이나 의료 담당자들의 자의적인 이기심만이 존재한다. 누구나 이 이기심을 갖고 있다.  

현장에서 근무한 의사로서 그간의 겪고 생각한 바의 일부를 아즈미란 환자를 보내면서 빌려 쓴 구절이기도 하지만 폭 넓게는 안락사라는 것도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의 존엄한 귀한 생명 앞에서 안락사를 주도하다 체포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구리하라가 말한대로 환자의 의사를 반영해서 그 행동을 실행했다 할지라도 생명이란 테두리 안에서 그것이 과연 허용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고통조차도 어떤 형태로 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기계적인 호수에 물리고 약물 투여를 해서라도 생명 연장을 해야만 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자신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의학도들이 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자신은 잠도 못자는 이 혼조병원에 남기로 한 구리하라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것은 비단 이것이 진료를 하는 의사로서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환자와 간호사  그 밖의 모든 것들에 소통을 하고 있었던 구리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또한 아즈마가 남긴 편지에 적힌 병을 않는다는 것은 정말 고독한 일이며, 병든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고독하다는 구절엔 환자를 보살피는 과정과 그들에게 어떤 따뜻한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가에 대한 행동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본의 유명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를 흠모한 나머지 그의 작품을 읽고 그 속에 빠져서 말투가 나스메 소세키를 닮았다고 표현이 되고 있는데, 그 뉘앙스가 어떤 것인지 알수 없기에 이것의 느낌을 같이 가지고 읽고 내려갔더라면 더욱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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