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초승달 동맹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 이슬람 연합 전쟁사
이언 아몬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던 그 때,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세기적인 관심과 그 배후의 주도권을 쥐고 요리한 주동자의 인적사항이며, 뒤이어 세계를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시각과 공포를 몰아넣은 그 사건이 지금은 또 다시 오하마 대통령이 모스크 건립을 추진한다, 반대한다는 소리로 연일 외신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그  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쉽게 사사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안겨줬다.  

여러 책을 보자면 우선 이슬람이란 종교 자체에 대한 의견에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적다는 점이다. 일부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 교리를 이용해서  집중적인 과를 넘어서다 보니 그런 테러와 자살테러, 건물 폭파같은 그 유형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더욱 이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그런 생각을 더 해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르네상스의 정신이나 과학적인 토대를 획기적인 발전으로 이룬 근간에는 이슬람으로 부터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고 그것이 르네상스로 이어지느 계기가 되었으며, 근대 과학의 기초로 가는 아주 다양한 문물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상호보완적인 유럽과 아랍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란 두 종교가 언제부턴가 삐걱거리더니 이제는 지하드, 성전, 알자지라 같은 단어만 들어도 테러를 연상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위의 세태에 대해서 두 종교간의 뿌리깊은 반목이 종교라는 이름하에 이루고 있는 현 세태에 대해서 또 다른 사실을 내세워 실은 종교간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던 진정한 서로간의 도모하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병사안에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많았음을 알려준다.  

문명화된 기독교 유럽이라는 사고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쓰였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단결과 협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세기 별로 나뉜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알려준다. 

1. 11세기의 에스파냐 같은 경우는 북쪽으로는 기독교 왕국이 , 남쪽에는 무슬림 에스파니아가 작은 나라들로 소규모 영주들로 대립을 이루고 있을 때, 필요에 따라서 남쪽의 나라간에 분란이 일어나면 그 분란을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에 몰두한 기독교 왕국간의 계획이 보이고 여기에 이슬람의 도움 요청이 있을시엔 자국의 기독교 군사들을 보내 상대 진영과 싸우는 역사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로마 교황청 입장에서 바라본 에스파냐의 시국은 자칫하면 자신들의 종교인 카톨릭 몰락으로 이어질 걱정에 참견을 하게 되고 이는 곧 베르베르인이 세운 알모라비드 왕국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서로간의 이익에 반사하여 도와주는 역사의 현실을 보여준다.  

1072년 알폰소 6세의 톨레토 정복으로 인해 375년에 걸친 이슬람의 정복은 마침표를 찍게 되고 알폰소 왕은 무슬림들에게 유화정책을 실시한다.  

2.13세기의 이탈리아 무슬림의 도시 루체라 

시칠리아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아랍인들을 프란드리히 2세의 정치적 전략에 따라 이탈리아의 루체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이들은 자연적으로 노르만 정복에 자신들을 물건 취급하는 정책에 반대한 이슬람인들은 적개심을 갖게되고 이는 곧 프란드리히 2세의 개인적인 군사요충지요, 군사 보급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은 황제에게 무슬림 시위대, 정예브대, 궁수 , 경기병을 제공하고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도 교류를 맺고 살아간다.  

프리드리히가 이야기로써 예루살렘을 얻었을 때도 참여를 했으며, 롬바르디아 동맹에 맞선 군사행동에도 참여를 하게 된다. 이들은 끝까지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대한 충성을 했으며, 샤를 2세에 의해 전멸되기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간다.   

이 밖에도 14세기의 비잔티움과 투르크인들의 우정은 각기 다른 인종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위험에 대처해서는 서로 합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의 역사 중엔 비잔틴 공주와 술탄간의 혼사가 이어짐으써 자국의 침략을 막는데 일조를 겸했고, 티무르의 공격으로 인한 비잔틴 왕국의 어려움은 세르비아군대의 충성스런 군대로 인해서 어려움을 돌파하기도한다. 

유럽중 가장 험난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인 헝가리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실리에 따라서 분할되어 다스려지던 중 구교가 행한 신교에 대한 박해로 인한 과정에서 오스만의 지지를 얻고 이는 종교를 떠난 서로간의 이익과 호감에 따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150여년간 이슬람의 지배로 들어간 헝가리는 헝가리인들이 오스만 병합에 협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로 넘어오면 큰 전쟁의 하나인 크림 전쟁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따른 위협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오히려 적국이었던 오스만을 지지함으로써 자국의 실리를 잇고자 한 것이 발단이다. 영국안의 바시보쥐크, 프랑스 군대안의 무슬림인 알제리군대, 오스만 제국안의 다양한 기독교 병사들과 서유럽인, 폴란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이 섞인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은 발라클라바 전투, 퀴렉데레전투를 통해서 참여를 했으며, 이는 곧 종교와는 무관한 ,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군대로써의 싸움이었다.  

저자는 위의 여러 역사적인 군사 전투를 통해서 어디까지나 종교에 반해서 움직인 사람들은 없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종교의 분명한 선은 이 당시만 해도 없었단 사실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못으로 알고 있는 두 세계에 대한 반박을 열거해 놓았다.  

강대했던 이슬람 제국 오스만제국의 오만함은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우위에서 유럽의 나라들을 대했다면 크림전쟁에 들어서면서 부터는(19세기)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비로소 서구의 투르크인들을 빈 미개인으로 보는 시각으로 변했다는 점이 새로운 사실로 알게 해 준다.

종교에  열성적인 것에 비춘 결과가 아닌 이러한 배경에는 어디까지나 군사, 경제가 우위를 점령했으며, 이런 배경에는 동아시아의 농노가 군인으로 나서는 것이 일반화되어 차출된 것이 아닌 용병이란 제도가 활발했단 점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이들 사이에 종교를 떠난 협력심은 같은 테두리 안에 살고 있었고 서로 다른 언어를 알고 사용했을 만큼 다양성이 보장됬으며, 엘리트 사이의 친화성, 우정이 모두 포함되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단 설명을 곁들여 준다.  

역사라는 시대를 읽어 내려는 양심이 되어야 한단 저자의 일말의 양심고백은 그간 우리도 세계의 군사,정치, 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서구의 주장과 그 인식에 대한 한 치의 의심없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에 대한 생각만으로 그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속단하고 있진 않나 하는 반성을 해 보게 한다.  

유럽인의 눈으로 본 유럽의 이기심과 그로써  인정이 되어버린 생각을 보다 뛰어넘어서 자신과 자신의 사회를 과감히 비판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단 저자의 말엔 많은 공감을 얻게 한다.  

그라나다 공방전을 끝으로 이슬람이 아프리카로 물러가고  기독교의 세계를 열었던 스페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내내 복잡하게 엃혀있는 실타래를 풀어나가면서 읽기가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런 과정속에서 우리가 속한 현 시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갖게 되고 뭣보다 지금의 독립적인 나라의 개념이 아닌 도시 공화국 형태, 타이파라 불려서 쪼개진 국가들, 그 안에서도 파리아스란 명목으로 실리를 챙긴 알폰소 국왕의 정치스타일은 지금에 와서도 그런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라는 "만약"의 가정을 가져보게 해 준다.  

복잡하게 이루어진 상황속에서도 이루어진 건축의 양식이나, 문학의 쟝르,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인한 교류는 위의 종교와 인종을 개념치 않은 결과의 산물이며, 개개인이 직접 마주하는 현실이 십자군이나 성전사 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 , 자기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는 말엔 일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존의 단순히 이슬람종교의 전파의 결과가 유럽에 끼친 영향의 일환으로 발전된 정치와 학문, 과학의 세계를 이끌었단 책이 있었다면 이번의 책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 신선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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