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17살인 레오는 1945년 소련에 의해서 끌려간다. 간다는 자체가 좋아서, 동성애자로서 오리공원에 자신의 본명을 숨긴채 행동을 하는 목에 두른 침묵을 알아볼 리 없는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가축용 열차에 승차한 뒤에 얼어붙은 염소 두 마리가 두 쪽으로 갈라져 던져졌을 때 땔감의 연료로 사용하면서도 그 때까지 배고픔의 천사가 내 등에 올라탈 줄을 몰랐다.  (몸 안의 이는 피를 빨아먹는 동조자로서 한 몫을 한다.)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동네에서 같이 온 사람도 있었고, 다른 동네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진 다문화 공동체였다. 그 곳에선 석탄이 유일하게 풍부했고 석탄을 팔아서 필요한 소금과 설탕으로 바꿔서 먹곤하는 생활을 영위해간다.  

시멘트를 나르는 일을 하다가 가벼운 성질로 인하여 바람에 나부껴 날아가는 시멘트의 양이 점차 줄어들면 반동분자. 파시스트, 태업자, 시멘트 도둑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이는 배고픔의 천사와 공범이 되었다. 하지만 시멘트는 사라져 없어지지만 자신들은 왜 사라지지 않는지에 대한 노동의 고달픔을 절규한다.  

배고픔에 주린 배는 서서히 남자와 여자의 성 구분조차 할 수 없는 그저 한 마른 몰골의 인간들로만 보이고 유일한 낙이라곤 아침에 일정한 비율로 달아서 주는 빵을 아껴 먹다가 베개 밑에 숨겨두고 두고두고 확인해가는 일이었다. 저녁이 되면 빵 바꾸기가 시작되는 유혹에 빠지게 되고 나의 빵보다 타인의 빵이 더 커보이는 현상까지 번져서 후회하는 일도 생기고 , 빵을 바꾸고자 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얼굴 형태를 관찰해 오래 못 살것 같은 사람의 얼굴(볼빵이라고 부른다.)을 보고 교환이 이뤄지는 일이 생긴다. 

그 와중에 빵 도난사건으로 인해 빵을 훔쳐 먹은 동료를 패고 토해내게까지 해서 그 현장을 보존하고 그 주범은 아무말도 못한 채 치료한 부은 얼굴로 다시 막사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고 그 또한 침묵속에 이루어진 하나의 규율이었다. 다만 정신 이상자인 키티의 것만은 건드리지 않는데 이는 서로에게 저지르는 나쁜짓을 그녀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무마해 보려는 자신들의 정당방위 같은 행동으로 여겨진다. 

배고픔에 대한 처절한 심정은 스프를 먹는 것에 대해서도 아껴 먹고자 서두르지 않고 삽질 1회= 빵 1g이라는 성립이 되는 현실에서 삽질은 유일하게 배고픔의 유혹을 잠시나마 이길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곤 하지만 이마저도 그 기예를 빼앗아간다.   

어느 날 외출증을 얻어서 장터에서 필요한 것을 바꾸는 과정에서 러시아 집에 있는 어는 여인으로 부터 따뜻한 스프 대접을 받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자 그 여인은 자신의 아들 또한 전장에 나간 사실로 인해서 동정을 느끼고 아마포로 만든 손수건을 주면서 가져가라 한다. 끝까지 배고픔의 유혹에서 모든 것을 바꾸고서라도 이것만은 건드리지 않고 가져오는데는 오직 하나! 할머니의 너는 다시 돌아올거란 말 한마디로 그 희망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부부간에도 예외는 없어서 부인이 죽어가는 동안 식사시간에 남편이 숟가락을 넣게 되는 과정엔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를 말해준다.  

소식도 없던 가족에게서 어느 날 엄마로부터 동생이 탄생했다는 단 한줄의 소식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간의 소식조차도 궁금해 하지 않는 엽서의 긴 공백을 보면서 동생에 대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생기고, 비록 수용소라 할지라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철사로 나무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털장갑실을 풀어서 철사에 동동매어서 트리처럼 만들고 빵 두 개를 각각 걸어놓음으로써 잠시나마 분위기를 누린다.  

자신의 스카프를 팔아달란 요청을 못본 채 하고 관리인인 투어가 매고 있는 것을 본 레오는 그것에 대해 따지게 되고 어느 날 대농장에 가서 그 곳에서 감자 273개를 갖고 오는 허락을 받게된다.(절대 영감 온도이기 때문에 그 갯수에 맞춰서 갖고 온다.) 외상으로 갚고도 두 달여 정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에 감자 인간이란 생각을 해 보게된다.  

수용소 마지막 해 임금으로 받은 돈으로 점차 뼈에 살이 붙고 남.녀 구분이 생기면서  그 안에 유행이 생기게 되고 오랜 여행 끝에 집에 돌아오게 되지만 식구들은 묵언하에 수용소의 생활을 물어보지 않는다. 자신 또한 밤새 불을 켜 놓고 자게되는 생활이 이어지고 동생을 대하는 자신의 맘 속엔 여전히 차가운 감정만이 자리 잡는다. 삼촌의 소개로 상자 공장에 다니게 되고 어느 덧 못질이 익숙하게 되자 콘크리트기사 양성소에 입학하면서 에마란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애적인 자신의 기질로 인해서 거리를 헤매게 되고 동성애자 몇 명이 체포되자 오스트리아에 사는 고모의 초청장을 받아서 가게 되면서  부인에게 나중에 만남을 갖자는 거짓으로 둘러대고 엽서로 이별을 고한다. 도처에 유혹에 빠지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배고픔에 약탈당한 세월의 보상을 기대했으나 삶은 아무도 다시 만들어 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수용소에서 내 보물들은 나 거기 머문다/ 나 거기 있다/ 나 거기 있었다로 였지만 레오는 오직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로 구분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노동강박이었고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 뇌를 타고 올라가 강박이라는 마법을 걸기에 자유의 몸으로 살아가지만 소파에서 떨어진 포도 송이와도 춤을 추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헤르타 뮐러의 작품인 숨그네는 같은 동향 출신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자전적인 생활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다.  

그간 여러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재로 각기 다른 쟝르에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이 있지만 이 작가만큼 언어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접했다는 것이 실로 간만에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 즐거움을 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스산함과 연민, 눈물의 기본형태를 깔고 시작하는 수용소내의 생활은 때론 덤덤하게 관조적으로 보여지는 일관된 시선으로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울림이 크게 느껴진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보면 오랜 수감생활로 자유의 세상에서 나갈 수 있는 죄수가 여전히 감옥을 고집하고 생을 마치길 바라는 심정엔 오히려 자유의 세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감이 도사리고 있고 내 스스로도 어떤 일을 해 보지 못했기에 ,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졌기에 두려움이 앞서지 않았나 하는 것처럼 레오도 배고픔의 처절한 기억이 뇌리에 타고 올라간 그 시절의 강박감 때문에 자유의 몸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하루에도 수용소에 끌고 갔던 가방을 열어젖히고 물건을 꺼낵보고, 길거리에서 만난 동료들조차도 서로 외면하게 되는 행동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무너짐을 느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가족들간의 무심한 침묵속에 오히려 드러내 보이질 않길 원하는 시대에 대한 레오가 겪은 인생의 황금기인 시절에 있었던 5년은 그래서 보상받고자 했음에도 여전이 자신이 수용소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해 준다.  

살기 위해서 , 배고픔에 대해서 대항하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버텨내기를 해 온 레오가 받은 자유의 몸이 사회적응에 실패한 것은 어찌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대가 낳은 , 나라간의 이해 타산에 한 개인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삶을 이어가고자 했는지에 대한 인간 경외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기존의 실존 경험을 토대로 한 얘기보다는 한층 성숙되고 깊이를 주는 문학을 오랜만에 접해 본 것 하나만으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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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2010-08-0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편집부의 고우리입니다.
이번에 제작하는 소책자 <헤르타 뮐러 스페셜북>에 독자님의 리뷰 일부를 게재하고 싶어 사용 허가 요청 드립니다. ^^ 보시는 대로 답글 또는 메일kupsch@naver.com로 허락 여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용하려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보다는 한층 성숙하고 깊이 있는 문학을 오랜만에 접해본 것 하나만으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