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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울프홀 1~2 세트 - 전2권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평점 :

겉으로 보기엔 같은 두께의 얼음이지만 그 밑에 숨겨진 살얼음과 두꺼운 얼음 층은 쉽게 보이질 않는다.
이런 빙판을 걷는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가?
더듬어가며 신체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며 걷는 일련의 행동엔 뛰는 심장박동수마저 두려움과 경각심은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심리위축을 낳는다.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은 얼마나 위태하고 불안할지, 이 작품 속 주인공인 크롬웰을 대하며 든 생각이다.
영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간 인물 중엔 헨리 8세와 천일의 앤으로 불린 앤의 일대기는 그동안 다뤄온 매체나 역사서를 통해 알고 있지만 그들 곁을 보좌하면서 영국사를 다른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인물로는 토머스 크롬웰이 있다.
유년기의 뚜렷한 기록이 없는 인물, 저자가 상상을 덧대 그린 첫 장면은 친아버지로부터 폭행과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소년의 모습이다.
이후 집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익힌 인생 경험은 시간을 훌쩍 넘어 울지 추기경의 보좌관격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영국 정사에 발을 딛는다.

형의 아내인 캐서린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놓은 헨리 8세가 앤이 눈에 들어오면서 결혼 무효를 이루기 위해 행한 모습들은 영국 역사상 유명인물들과 부딪치며 종교계, 프랑스, 로마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울지 추기경마저 자신의 뜻에 부합한 동조를 보이지 않자 실각시키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울지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과 헨리의 눈에 들어 다시 그의 곁에 머물며 있게 된 크롬웰의 인생은 영국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로 남게 된다.
통상 역사소설은 사료를 기본으로 하되 빈 여백을 어떻게 절충하면서 엮는가에 따라 익히 알고 있던 인물에 대한 시선을 달리 바라보게 만든다.
저자가 다룬 인물인 크롬웰은 당시 헨리왕이 정사에 깊이 참여하기보단 울지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 형태란 점과 헨리가 왕위 계승에 비중을 두었던 이유가 당시 영국이 처한 정치적 불안감과 왕권강화의 필요성, 여기에 성경을 통한 권력유지를 애쓰던 성직자, 귀족에 대항한 개신교들의 성장세와 맞물린 교묘한 흐름들이 주 배경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복잡한 인물구도와 관계도는 첫 장을 열면서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런 가운데 권력의 중심인물이 아닌 변방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시선을 통해 그린 이 장편소설이 갖는 여러 가지 구도들과 대화들을 통한 진행흐름들은 1.3인칭으로 그려지는 진행방식들이 기존 작품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느껴졌다.
입지전적 인물처럼 성장한 크롬웰이란 인물이 왕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목요연한 행동들은 쉽게 나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채찍과 당근을 통한 주변인물 감시와 정보수집, 여기에 본처와의 혼인 무효 성공과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장령 공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그가 보인 주도면밀한 정치행보는 헨리의 마음을 충족시키면서 적을 만든, 언제 불어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그려 보인다.
앤과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자의 여유,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헨리의 뜻을 이뤄준 크롬웰의 행보는 특히 토머스 모어와의 대결에서 더욱 독보적이다. (적을 쓰러트리는 게 다가 아니라 논쟁에서 이겨야 한다.)

이처럼 저자는 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당대의 복합적인 역사적 현장을 씨줄과 날줄을 엮어 유연하게 흐르게 만들면서 크롬웰이란 인물의 권력지향적인 욕망과 그 와중에 교회와 성직자들이 갖고 있던 문제점들, 자신의 이익을 취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선의의 모습들은 상반된 인간의 모습이자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지닌 본성의 부분들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왕실의 가계도와 등장인물들이 많고 문장 자체가 초반에는 쉽게 읽히지 않는 점들이 있으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가속이 붙는 정치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암투들은 시종 긴장감을 드높인다.
제목이 암시한듯한 늑대들이 우굴거리는 정치소굴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 차근히 한 발씩 뜻을 이뤄가는 크롬웰, 여름휴가를 맞아 헨리가 맘에 두고 있는 제인 시모어가 있는 울프홀로 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 두 권의 여정은 크롬웰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는 과연 살얼음을 제치고 안전한 얼음판 위를 걸을 수 있을까?
정치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야심가 한 명을 만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