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1228/pimg_7136731163688851.jpg)
미국 주 중에서 네바다, 그 네바다에서도 면적이 35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핵실험장이 들어선 것은 자연적인 환경, 일테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장소, 드넓은 장소임에도 사막이 펼쳐져 있는 가치성에 비해 그다지 유용성이 없다는 점에서 핵무기와 비폭력 시민저항이라는 두 가지의 힘이 부딪치는 장소다.
⠀
⠀
⠀
저자가 반핵운동에 동참하면서 겪은 일련의 시선을 담은 1부의 내용들은 이런 배경적인 여건을 토대로 1950년대 미국 정부가 미국의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전에 이미 토박이처럼 살아가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인 쇼쇼족과의 대립과 시민 불복종에 대한 저항을 담아낸다.
⠀
⠀
⠀
당시 핵폭탄을 터트렸던 나라들인 미국과 영국은 그들이 말한 '실험'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가 아님을 말한다.
⠀
⠀
⠀
자연 초토화 방사성 낙진에 이은 인간들의 삶에 끼친 사례들을 통해 비판하는 그의 글들은 차라리 '리허설'에 가깝다는 말이 맞다고 말하며 냉전시대가 끝났음에도, 1990년 민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영국을 압박하고 동참 거부를 유도한 것은 실로 진정 무엇을 위함인지 묻고 싶어 진다.
⠀
⠀
⠀
반핵 운동가들이 네바다 사막에 들어가 핵실험 중단 요구를 한 이유와 여기에 더해 쇼쇼니족의 동참은 그들의 생존권이 달린 영토 소유권에까지 폭을 넓힌다.
⠀
⠀
⠀
가축 방목을 핑계 삼아 개인 소유의 소들을 몰아 가두는 행위, 솔직히 말하면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토착민으로서 삶의 터전을 이룬 이들은 현재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불리는 인디언들이다.
⠀
⠀
⠀
그런 그들에게 무법 자격자로서 영토 소유를 했다는 취지에 법적인 구속을 한다는 행위의 근거에 대한 증거도 없으면서 점차 그들의 터전을 억압하는 교묘한 방식은 무엇을 위함인지, 이는 결국 모두 이권 개입과 돈이 연관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
⠀
⠀
솔닛은 이에 멈추지 않고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하면서 산책 걷기를 통해 그들의 연구를 통해 핵폭탄에 개발에 이르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고민과 당시 핵무기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 전 인류를 위협하는 부분에 대한 경고와 미처 이를 인지하지 못한 부분으로 나뉜 부분들을 다룸으로써 핵 발명을 통한 소로의 시민 불복종과 아르카디아, 자연을 합리적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본 유토피아적인 흐름들을 읽는 내내 와닿는 문장으로 이끈다.
⠀
⠀
⠀
저자가 바라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삶,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의 일부란점, 하지만 핵폭탄이란 개발로 이어지고 이를 국가의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지금까지도 사후 문제 발생 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나치와 소련이 벌인 유대인을 다룬 방식과 미국의 현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
⠀
핵무기에 대한 경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인지는 하면서도 실제 그런 참상을 겪은 이들마저 함구하고 있다가 인생 말미에 드러내는 부분들, 생존을 위해 미국 법과 다투는 쇼쇼니족 이야기는 레이철 카슨이 쓴 '침묵의 봄'에서 다룬 내용보다도 훨씬 심각함을 경고한다.
⠀
⠀
⠀
인류의 평화는 중요하다.
⠀
⠀
⠀
다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보호와 인간의 터전의 기본 삶인 땅, 여기에 핵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요원한 문제로 남을 수도 있음을 다시 느껴보게 했다.
⠀
⠀
⠀
지난 줌 토크에서 솔닛만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들려준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게 한 소로의 산책과 물리학자들의 걷기, 여기에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핵폭탄 발명에 이르면서 결국 자연에서의 걷기가 철학적인 개인 사유에서 온 물음들이었다면 미국의 사막으로 들어간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는 핵폭탄으로 이어져 결국 한 곳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을 연상시켰다.
⠀
⠀
⠀
(참고로 양자역학에 대한 주된 학자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어보면 더욱 재밌게 다가올 듯하다.)
⠀
⠀
⠀
읽는 동안 솔닛처럼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목욕하는 상상, 로이 오비슨, 드와이트 요아캄의 노래가 솔닛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왔을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가 결국은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만의 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준다.
2부는 요세미티 공원을 중심으로 장소에 대한 폭넓은 내용을 펼친다.
장소란 개념이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그 장소가 지닌 터에 인연과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의 공존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사실들이 솔닛만의 관찰과 사유로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가 있다.
- 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은 친구나 연인을 알아가듯 그 장소와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더 잘 알아간다는 것은 그 장소가 다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낯설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으로 참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심오하고도 심란한 방식으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 P 447
요세미티 공원은 이미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지만 솔닛이 밟은 요세미티에 대한 역사는 원주민들에 대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삶의 터전인 곳에서 백인 개척민들에게 쫓겨난 상황이나 네바다의 원주민들이 자치권과 생존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모습들은 마치 쌍둥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허칭스와 사진작가 찰스 리앤더 위드의 손에 탄생한 최초의 사진은 오늘날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이을 수 있는 최초가 되었으며 이는 요세미티 밸리에서 원주민과 백인 간의 불가피한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음을, 그 속사정은 자연과 전쟁이란 두 상반된 이미지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듯보인다.
네바다에서도 그렇지만 요세미티에서도 허울 좋은 원주민 보호구역은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어하는 강제이주와 난민수용소란 개념과 다를 바 없고 그들의 삶은 이전보다 더욱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는 과정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그들의 삶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어있다.
문득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 당시 백인들을 공격하던 원주민에 대한 인식이 당시엔 이해할 수없었던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이 책의 내용을 읽노라니 거꾸로 그들의 삶을 빼앗겨버린 그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솔닛은 1부 네바다 핵실험장의 경험을 통해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전반부의 명암이 흑이었다면 2부에서는 희망을 품은 법을 풀어내고 있다.
즉 보호되어야 할 자연이란 공간적인 장소가 인간들의 관점으로 국립공원이란 개념으로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이러니와 그 속에서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같은 듯 다른 '자연'이란 의미에 대해 생각할 부분들을 던진다.
1.2부를 통해 저자가 밟은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와 현재의 삶은 자연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미래의 비전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네바다와 요세미티란 두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공존에 대한 의미를, 이제는 변화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일깨워준 책이다.
- 여전히 나는 자연을 경험하는 그런 방식에 애석하게도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보기(looking)는 사진의 영역에서는 훌륭한 행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연을 우리가 속하지 않는 장소, 우리가 살지 않는 장소, 우리가 침입하는 장소로 보는 관점이다. 관광객은 본질적으로 외부인, 소속되지 않은 사람, 낙원에 있는 이방인이다. - P 350
개인적으로는 '오웰의 장미'보다 이 책이 훨씬 가독성이 좋았다.
가장 근본이 된 솔닛만의 글쓰기의 맛을 느꼈다고 할까? 그녀가 지금까지 지향해온 글로써 다가설 수 있는 걷기, 사막의 침묵과 공허, 자연과의 관계...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분야의 글임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게 쓴 넓은 지식의 활용은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리베카 솔닛의 책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부터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 출판사 도서 협찬으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