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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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지 스마일리(땅딸막하고 배나온 아저씨입니다)는 007 시리즈로 친숙한 영국의 정보기관 MI6의 중견 간부였습니다(시대 배경은 1960년대로 추정됩니다). 그의 상관이자 MI6의 수장 컨트롤이 주도한 체코에서의 스파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작전의 요원이었던 짐 프리도가 체포되면서 컨트롤과 그 아래 라인 전부가 MI6에서 강제로 은퇴당합니다. 스마일리도 당연히 은퇴하게 되었죠. 은퇴하고 아내와 별거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내무부 국장의 요청으로 홍콩에서 소련의 여자 스파이와 접촉한 리키 타르라는 요원을 만나게 됩니다. 스마일리는 리키 타르에게서 컨트롤의 라인이 제거된 현 MI6의 고위직에 소련에 꾸준히 영국의 기밀 정보를 제공해온 이중 스파이(두더지라고 부릅니다)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위의 작전도 두더지가 소련에 정보를 제공해서 실패하게 된 것이죠.

스마일리는 아직 MI6 내에 남아 있는 컨트롤의 유일한 라인, 피터 길럼의 협조를 받아 방대한 문서를 뒤지고 은퇴한 MI6 요원들을 찾아다니며 두더지를 찾는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 결과 스파이 혐의자는 네 명으로 좁혀 집니다. 컨트롤을 대신해 MI6 국장이 된 퍼시 앨러라인, 짐 프리도의 절친한 친구이자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한 인물 빌 헤이든, 붉은 머리에 큰 덩치, 뛰어난 지성을 가진 로이 블랜드, 비열한 감청 전문가 토비 이스터헤이스. 이 네 명은 컨트롤의 퇴장과 맞물려 MI6의 핵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이 소련 KGB의 수장 카를라가 수십 년 전에 포섭하여 MI6에 침투시킨 두더지였던 것입니다.

스마일리는 결국 끈질긴 추적 끝에 두더지를 찾아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이 책에서 누가 두더지인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인물 개개인에게 부여한 뛰어난 개성, 변변한 액션신이나 총격전 한 번 없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동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스토리라인, 런던의 안개처럼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 이런 것들이 전부 어우러져 이 스파이 소설의 걸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킴 필비 사건이 그것인데요. 캠브리지 대학을 나와 MI6에 투신한 킴 필비는 소련에 포섭되어 2차대전 전부터 소련에 영국의 기밀을 넘기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암호해독기 에니그마, 영국의 수에즈 침공 등의 정보를 소련이 미리 알게 되면서 영국의 작전은 번번히 실패하게 됩니다. 거기다 킴 필비 외에도 4명의 MI6 핵심 인물(모두 캠브리지 출신입니다)이 포섭되어 소련의 스파이 노릇을 합니다. 이들이 차례로 적발되면서 최후에 킴 필비도 그 정체가 드러나 소련으로 망명해버립니다. 소련에서 영웅 칭호까지 받으면서 호의호식하고 살게 되죠. 영국 정보부는 이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하고 영국 뿐 아니라 미국의 정보망까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존 르카레는 실제 MI6에서 근무한 첩보 요원 출신의 작가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실감을 작품에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가 이 작품에서 창조해낸 스파이들의 은어는 너무나 유명해져 나중엔 실제로 스파이세계에서 통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스파이 소설 치고는 너무 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재작년에 나온 동명의 영화를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게리 올드먼, 톰 하디,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나오지요. 다만 방대한 분량을 두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에 맞추다보니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을 위한 설명 따위는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상영되었을 때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관객이 되게 많았거든요.

이 책은 사실 쉽게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따라가기 힘들거든요. 그래도 한 번쯤 읽어보시면 007과는 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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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야기 2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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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조선국왕 이야기>에 이어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네 임금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책의 메인은 네 왕 중 단연 연산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극 속에서 변주되고 반복된 연산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합니다. 성종과 폐비 윤씨의 이야기도 그러한데요. 성종은 자신이 어진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상당히 강한 왕이었습니다. 대신들과 대간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정책에 적극 반영하였으며, 세조 때 만들어진 제도들을 차근차근 정리하였고, 나라 살림을 꽤나 풍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경국대전을 완성한 왕이기도 하구요. 여기까지는 어진 임금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요.

하지만 성종의 치세 옥의 티 한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폐비 윤씨 사건입니다. 성종이 대신들과 대간들의 의견을 너무 잘 들어주다보니, 세조 때까지 찍소리 못하고 억눌렸던 신하들이 사사건건 왕의 일에 참견을 하기 시작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왕의 덕이 모자란 탓이니 하늘에 사죄를 하라고 강요하고, 사냥을 하려고 하면 왕이 그런 잡기에 정신을 팔면 안 된다고 벌떼같이 일어나고. 하루는 성종이 중국에서 매를 선물받아 매사냥을 하려 하자 신하들이 극력 반대하여, 그럼 `궁궐 대청마루에서 매를 한 번 날려보는 건 괜찮겠지` 싶어 그렇게 하니 그것마저 잘못했다며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당연 성종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성군(聖君)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그토록 억눌린 삶을 평생 살 수는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종은 그 스트레스로 인해 좀 비뚤어진 여성관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폐비 윤씨 사건도 그 일환인 듯 하구요. 폐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여 성종이 후궁과 동침하면 바가지를 심하게 긁었다거나, 심지어는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피를 냈기 때문에 폐해졌다는 야사가 널리 전해지지만, 실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정파를 막론하고 윤씨가 폐해지는 것을 극력 반대했는데도, 성종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고 폐한 다음, 사약까지 내려 죽여버립니다.

우리는 연산군이 미쳐 날뛰게 된 게 폐비 윤씨 사건을 알게 된 것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이라구요. 하지만 저자는 연산군을 미치광이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산군을 냉혹한 전략가, 하지만 10대의 치기를 가진 철부지라 평합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끝없이 잔소리를 듣고 무시당하다시피 하는 것을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봐왔습니다. 당연 그는 관료들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되었죠. 왕이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하는 게 말이 되냐는 게 연산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되길 원했고, 하나하나 조그만 꼬투리를 잡아 훈구파, 사림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숙청해버립니다. 너무나 좌충우돌인 숙청이었습니다. 자기 편인 대신들까지도 참수해버린 경우가 많았거든요. 연산군이 철부지라는 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최소한 자기 편은 살려뒀어야 하는데 자신의 권력에 취해 철권정치를 휘두르다보니 더 이상 꺼낼 패가 없어진 거죠. 실제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당시 권력의 단물을 맛보던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의외로 느낀 인물이 바로 중종입니다. 중종 때의 유명한 사건은 단연 조광조가 얽힌 기묘사화입니다. 중종이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를 등용하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세력이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나뭇잎에 설탕물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는 글자를 조작하여 사화를 일으켰다는 게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연산군 직후에 즉위한 터라 당시 조선의 관료층은 국왕권 강화에 극히 민감했습니다. 당연히 중종 초기 그의 권력은 별 볼일 없었지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 기막힌 연극을 합니다. 유교 원리주의자인 고결하고 순진한 조광조에게 5년간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성리학교육을 받은 거죠. 아침부터 밤까지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항상 곧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듣고 싶지도 않은 유교 경전 학습을 억지로 한 겁니다. 자그마치 5년 간이나!

신료들은 이 연극에 깜박 속아 넘어갔습니다. 왕이 이처럼 성리학을 중시하고 원칙을 중시하니 신료들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실 정치와 행정이라는게 원칙대로만 될 수는 없는 것인데, 중종과 조광조가 매사 원칙을 들이밀고 따져드니 할 말이 없어지는 거죠. 조광조와 사림파는 그들대로 속아넘어갔습니다. 드디어 성리학의 원리대로 움직이는 이상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게 된 거죠. 중종의 연극인지도 모른 채.

중종은 5년 간의 연극과 사림파의 등용을 통해 권력을 야금야금 끌어모읍니다. 그러다 사림파의 득세가 극에 달하여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겠다 싶은 시점이 오자, 조광조 이하 사림파를 하룻밤새 숙청해버립니다. 사실 이 기묘사화 때는 훈구파들이 오히려 극력 반대했다고 합니다. 조광조는 젊은 관료들과 유생들에게 절대적인 흠모를 받던 인물이라 이런 식으로 숙청했다간 자신들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중종은 이를 이용해서 훈구세력을 `더러운 손`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는 싹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중종은 거리낄것 없이 절대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실제 연산군 때보다 중종 치세에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중종을 다룬 챕터의 제목인 `곰의 인내와 늑대의 지혜`가 더없이 어울리지요.

마지막 인종은 불행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두 살 때부터 유교 경전을 줄줄 읽고 시를 지은 보기드문 천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중종은 인종의 세력기반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오히려 인종의 배다른 동생 명종의 세력은 그대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인종은 즉위했을 때부터 독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밥도 거의 먹지 않아 나날이 말라갔고, 병이 걸려도 약에 독을 탔을 까봐 약을 먹지 않아 계속 쇠약해졌습니다. 그렇게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던 그는 즉위 8개월 만에 명종에게 뼈에 가죽만 남은 몰골로 명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승하해버립니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조선 시대 왕들의 인간적 면모를 상세히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평전에 가까운 책이라 아주 쉽게 읽히고, 사건 간의 연결고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여 역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해줍니다. 저자가 역사에 대해 뛰어난 통찰을 가졌기에 가능한 글쓰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14년 동안 후속권이 나오지 않는 게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조선 시대 사료가 워낙 많아 아직도 정리중이라는데요. 언제쯤 3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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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야기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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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표지도 평범한, 아니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책은 단연코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본 역사 서적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재미있는 책입니다. 조선 태조부터 예종까지 여덟 왕의 치세를 다루는 이 책은 저자의 뛰어난 통찰과 생생한 상황 묘사가 어우러져 그 어떤 사극보다도 드라마틱한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저자 임용한 박사는 비주류 사학자여서 그런지 교수 임용도 못 받고 계속 강사 자리를 전전했지만, 책 하나는 정말 기막히게 쓰는 분입니다. 사료(史料)의 행간을 날카롭게 꿰뚫는 시선, 사건의 궤적 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한 냉철한 분석,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인 흥미진진한 서술 등, 이 책의 장점은 대단히 많습니다.

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태조 이성계의 무훈이나 그의 인간적 고뇌, 조조에 버금가는 태종의 지략, 완벽한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의 정책 방향과 그로 인한 문제점, 능력에 비해 과하게 포장된 잘난척쟁이 세조. 우리가 기존 역사책에서 봐왔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는 그들의 모습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하나. 저자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종, 문종, 단종, 예종에 대해서도 꽤 지면을 할애하여 이들의 얼굴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들은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단명한 왕이어서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지요. 문종은 문약해보이는 이미지이지만, 아버지 세종을 닮아 우람한 몸집이었으며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결혼생활은 불행했지만요.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지만, 어린애 치고는 꽤나 대찬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예종은 시호만 봐서는 고분고분 말 잘듣는 예절바른 사람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세조를 능가하는 지독한 독재자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임금도 신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는데, 세조는 판서 정도 되는 신하도 함부로 곤장을 치고 머리채를 휘어잡았다고 합니다. 사육신 중 하나인 하위지도 한 번 간언을 했다가 이런 꼴을 당하고 세조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지요. 이런 세조보다 예종이 더했다니 오래 살았다면 꽤나 역사에 파란을 남겼겠지요.

어찌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서술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에게서 볼 수 있는 편견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시오노 나나미를 좋아하지 않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영웅중심적 사관에 너무나 경도되어 있고, <로마인 이야기>에서 일본 역사를 은근히 로마에 대입시켜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죠. 임용한 박사는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를 써내려 간다는 점에서 꽤 마음에 듭니다.

심심한 제목과 표지(1998년에 출간된 책이라 책 구성도 좀 촌스럽습니다)지만 내용과 재미는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기회되시면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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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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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과는 불급만 못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무시하고 `더 많이, 더 크게` 만을 드높이 외치는 이 시대를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읽어보아야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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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기는 먹지 마라? - 육식 터부의 문화사
프레데릭 J. 시문스 지음, 김병화 옮김 / 돌베개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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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꼭 채식주의자가 쓴 육식 반대 운동 서적 같습니다만, 실상 이 책은 채식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계 각 지역의 특정 육류에 대한 터부를 다루는 책이지요. 이를테면,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기피하고, 인도에서 소고기를 먹는 것은 천인공노할 범죄로 취급받는 것 같은 현상 말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저자가 인류학자가 아닌가 싶지만, 재밌게도 이 책의 저자 프레데릭 시문스는 지리학자입니다.

예전에 널리 읽혔던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아시는지요? 지금도 꽤 인기있는 문화인류학 서적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자 마빈 해리스가 이 책에서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를 싫어하는 이유, 힌두 문화권에서 암소를 숭배하는 이유를 분석한 바 있습니다. 대학생 때 읽고 그 명쾌한 논리에 감탄한 적이 있었더랬죠.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를 싫어하는 것은 덥고 습한 아랍의 지리적 환경 하에서 상하기 쉬운 돼지고기 섭취를 자연적으로 멀리 하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적 관습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합니다. 힌두교의 암소 숭배는 인도에서 중요한 노동력인 소를 함부로 도살하고 잡아 먹지 못하게끔 강력한 금기를 걸어 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물론에 기반한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논리는 헛점이 많습니다. 덥고 습해서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지만, 아랍보다 훨씬 덥고 습한 하와이 등 폴리네시아 군도에선 돼지를 잘만 먹습니다. 소가 중요한 노동력이라 못 잡아 먹게 한다지만, 몽골 등 초원 지역의 유목민들은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한 재산인 말을 잘도 잡아 먹습니다. 마빈 해리스의 논리로는 이런 문화적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프레데릭 J. 시문스는 이런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시문스는 이 책 <이 고기는 먹지 마라>에서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달걀, 말고기, 낙타고기, 개고기, 생선에 대해 한 챕터 씩 할애하여 각각의 터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문스가 제시하는 예시가 너무나 자세하고 방대하여 읽다 보면 굉장히 지칩니다. 옮긴이의 말대로 전 세계, 특히 아프리카에 이렇게나 부족이 많은 줄은 이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네요. 각 챕터마다 금기의 예시를 몇 십 페이지 씩 줄줄이 나열하고 그러한 금기가 만들어진 이유를 짧게 설명하는 방식이라, 나중엔 그 수많은 예시를 왜 다 읽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 됩니다. 물론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확고히 하고 싶은 건 어느 학자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건 좀 과하다 싶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 - 하지만 각주 및 찾아보기가 200페이지가 넘으니 사실은 450페이지 정도 됩니다 - 을 통해 시문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특정 육류의 종교적 금기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으로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도의 소고기에 대한 금기는 힌두교가 타 종교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수단, 즉 제례적 순수성을 확보하여 다른 종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힌두교 초기엔 암소 숭배 사상과 쇠고기 금지 조치가 없었다는 점을 통해 입증됩니다. 반면 아랍에서의 돼지고기 기피는 이슬람교가 발흥하기 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종교적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육식 금기의 원인은 종교적, 도덕적, 위생학적, 생태학적,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게 시문스의 결론입니다. 마빈 해리스처럼 육식 금기를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책을 읽다 중간에 그만두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거진 한 달 동안 읽었습니다만, 투자한 시간에 비해 얻은 게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아내가 이 책을 사 놓고 안 읽은 이유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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