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 이야기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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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표지도 평범한, 아니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책은 단연코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본 역사 서적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재미있는 책입니다. 조선 태조부터 예종까지 여덟 왕의 치세를 다루는 이 책은 저자의 뛰어난 통찰과 생생한 상황 묘사가 어우러져 그 어떤 사극보다도 드라마틱한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저자 임용한 박사는 비주류 사학자여서 그런지 교수 임용도 못 받고 계속 강사 자리를 전전했지만, 책 하나는 정말 기막히게 쓰는 분입니다. 사료(史料)의 행간을 날카롭게 꿰뚫는 시선, 사건의 궤적 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한 냉철한 분석,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인 흥미진진한 서술 등, 이 책의 장점은 대단히 많습니다.

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태조 이성계의 무훈이나 그의 인간적 고뇌, 조조에 버금가는 태종의 지략, 완벽한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의 정책 방향과 그로 인한 문제점, 능력에 비해 과하게 포장된 잘난척쟁이 세조. 우리가 기존 역사책에서 봐왔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는 그들의 모습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하나. 저자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종, 문종, 단종, 예종에 대해서도 꽤 지면을 할애하여 이들의 얼굴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들은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단명한 왕이어서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지요. 문종은 문약해보이는 이미지이지만, 아버지 세종을 닮아 우람한 몸집이었으며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결혼생활은 불행했지만요.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지만, 어린애 치고는 꽤나 대찬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예종은 시호만 봐서는 고분고분 말 잘듣는 예절바른 사람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세조를 능가하는 지독한 독재자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임금도 신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는데, 세조는 판서 정도 되는 신하도 함부로 곤장을 치고 머리채를 휘어잡았다고 합니다. 사육신 중 하나인 하위지도 한 번 간언을 했다가 이런 꼴을 당하고 세조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지요. 이런 세조보다 예종이 더했다니 오래 살았다면 꽤나 역사에 파란을 남겼겠지요.

어찌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서술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에게서 볼 수 있는 편견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시오노 나나미를 좋아하지 않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영웅중심적 사관에 너무나 경도되어 있고, <로마인 이야기>에서 일본 역사를 은근히 로마에 대입시켜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죠. 임용한 박사는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를 써내려 간다는 점에서 꽤 마음에 듭니다.

심심한 제목과 표지(1998년에 출간된 책이라 책 구성도 좀 촌스럽습니다)지만 내용과 재미는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기회되시면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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