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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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트루히요라는 남자가 있었다. 중남미의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을 1930년부터 1961년까지 철권으로 통치했던 독재자. 그는 박정희와 여러 모로 닮은 자였다. 공화국의 육군사령관이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장장 32년에 걸친 독재를 편다. 그는 야당 정치인들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억압과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면서도 도미니카공화국을 근대화시키는데 앞장서서 산업을 진흥시키고 사회 인프라를 확충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부는 트루히요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독점했다. 덧붙여 트루히요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호색한이었다. 그에게 여자를 상납하는 채홍사가 있었고, 그에게 있어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남미가 공산화될까 두려웠던 미국은 트루히요의 이런 만행을 알고도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던 그를 묵인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트루히요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미국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 책,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다룬다.

소설은 세 가지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때 트루히요의 총애를 받아 상원의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유도 모른 채 트루히요의 눈밖에 나 몰락한 ‘지식인‘ 아구스틴 카브랄의 딸 우라니아 카브랄. 항상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하고 완벽한 복장과 외모를 갖추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절대 권력을 쥔 그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요실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독재자 트루히요. 트루히요를 암살하기 위해 독재자가 여자와 밀회를 갖는 ‘마호가니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는 4인조.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대에서 펼쳐진다.

우라니아는 트루히요가 암살당하기 직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병들어 자리보전하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35년 만에 귀국하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트루히요에게 부역했던 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 트루히요를 추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트루히요는 당신들, 그러니까 침을 맞거나 학대당할 필요가 있고, 타락해야만 성취했다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마조히즘적 소명 의식을 일깨워주었던 거지요.˝ 도미니카를 떠나기 전,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라니아는 아버지에게 격정을 토로하고 있을까?

칠순의 나이에도 꼿꼿한 기세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빛과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고음의 목소리를 지닌 라파엘 트루히요. 공식적으로는 인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선가‘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을 영도하는 ‘수령‘으로 불리지만, 앞의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를 염소라고 부른다. 거센 정력과 악마적인 눈빛을 자랑하는 범접할 수 없는 독재자이지만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 자기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남자다. 화급한 소식을 전하러 온 장교의 군화에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넣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을 유지하는 그이기에 이런 자신을 참기 어려워 한다. 그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침대에서 만족시키는 것 뿐이다. 트루히요는 자기가 점찍은 열 일곱 소녀를 ‘마호가니의 집‘에 대령하라고 한 후 운전사와 둘이서만 그곳으로 떠난다. 암살자들이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어두컴컴한 해안가 한적한 도로 옆, 시보레 비스케인을 타고 도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네 명의 암살자들. 그들에게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 트루히요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그녀의 남동생을 죽여야 했던 트루히요의 경호부대원 아마디토 중위. 사랑하는 동생이 반(反)트루히요 인사를 처치하는데 이용된 후 살해당한 지역 유지 안토니오 델라 마사. 트루히요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에 트루히요 반대자들이 상륙하는 걸 막지 못해 추락한 전 주지사 안토니오 임베르트.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주교와 사제들을 탄압하는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 그들에겐 각자의 동기 외에도 독재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어떤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지, 젊어서 지금까지 어떤 정부를 위해 봉사해 왔는지 깨달은 이후, 그는 마치 포로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걸음, 행선지, 움직임이 통제되고 감시당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그런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어 마침내 트루히요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

˝아무도 모르는 그의 마음 후미진 곳에서 그는 트루히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트루히요가 살아 있는 한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도미니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불쾌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며,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 되어야 하는 형벌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즉 공적인 장소에서는 진실을 감춘 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상념에 빠진 그들의 앞에 마침내 ‘염소‘가 탄 차, 시보레 벨에어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암살자들은 시동을 켜고 도로를 질주하며 독재자를 추격한다. 마침내 독재자와 나란히 달리게 된 4인조는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차를 벌집으로 만들어 극적으로 ‘염소‘를 사냥하는데 성공한다. 트루히요가 죽어버린 지금, 2권에서 펼쳐질 미래는 기나긴 독재의 종말일까? 아니면 끝나지 않는 암흑의 터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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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비밀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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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과학 저술가 샘 킨의 또 다른 작품. 그가 이 책에서 소재로 삼은 것은 ‘공기‘이다. 그의 전작들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나 <사라진 스푼>처럼 진화론과 화학 같은 특정한 분야를 주제로 하는 게 아니어서 그런지, 훨씬 자유롭게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든다. 화산 폭발이 지구 대기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면서 지구 과학을 다루고, 마취 가스의 발명에 대해 서술하면서 의학을 등장시키고, 비활성기체가 주기율표에 들어가게 된 곡절을 통해 화학을 말한다. 수억 년에 걸쳐 산소가 급증하게 된 사건을 다루면서 생물학이 등장하고, 대기 중 요오드 농도를 핵물리학과 연관지어 설명하며, 일기예보의 역사를 말하는 도중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들이 공기를 매개로 다루어지다 보니 과학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서 책을 덮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덤.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로마원로원에서 반대파 의원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한 그 날,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그 날, 카이사르는 칼에 찔린 채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그의 폐 속에 남아 있던 약 1.0L의 공기, 270해 개의 공기 분자들은 바람을 타고 1~2년 안에 지구 전체에 퍼진다. 대기권 내의 공기량에 비해 미미한 이 1.0L의 공기를 과연 우리가 만날 일이 있겠나 싶지만,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면 놀랍게도 카이사르가 마지막 내쉬었던 숨에 포함되어 있던 분자 1개가 다음 번 내가 들이쉬는 숨에 포함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 벌어졌던 역사의 일부가 지금 내 몸 속을 드나들고 있다는 놀라운 상상! 비단 카이사르 뿐만 아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내쉬었을 숨결, 80년 오월 광주의 그 밤에 전남도청에 있던 사람들의 마지막 숨결도 지금 이 순간 내 폐 한 구석에 역사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샘 킨은 말한다. ‘우리는 한 모금의 숨결에 온 세계를 담을 수 있다‘고. 또 ‘우리가 단 한 번 들이쉬는 숨 속에도 세계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만약 우리 인류가 먼 훗날 외계의 어느 행성에 정착하여 그곳의 공기를 호흡하는 순간, 우리 폐 속에 있던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결은 그 행성의 대기에 섞일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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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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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속 에피소드에 등장할 법한 어린 여자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술을 마시는 여자’였다. 잠깐 요 앞 슈퍼에 간다고, 아니면 누굴 좀 만나고 오겠다고 사라졌다 며칠 후 술에 잔뜩 취한 채 어디에선가 발견되는 사람. 그럴 때면 그 아이는 교복을 입은 채 인사불성인 엄마를 건사하러 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척. 하지만 그 아이는 사실 엄마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 미움은 ’엄마가 저러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사랑받을 만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자기 혐오의 언저리까지 가닿는다.

처음 책을 내는 작가가 어찌 이렇게까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을까 의아했다면, 이게 그 답일 듯 하다. 작가 한시영에게 있어 이 책을 쓴다는 행위와 그 지난한 과정은 - 기독교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 엄마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초혼(招魂)이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씻김굿이다. 그렇기에 내 안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했으리라. 엄마가 만들고 내 안에서 곰삭은 그것들을 차분히 응시해야만 했으리라.

어린 두 딸들을 품안에 가득 보듬는 행복과 알콜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은 엄마를 돌보는 고단함 사이의 크나큰 간극. 나를 두고 왜 그랬냐고 엄마를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지만, 딸은 이제 엄마가 된 후 깨닫는다. 엉망진창인 것만 같았던 저 사람도 내 엄마가 되기 위해, 내 엄마로 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 거였구나.

한시영의 글에는 가만히 곱씹게 하는 힘이 있다. 문장 어느 하나도 건성으로 지나치지 못하도록 하는 힘. 괜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글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다양한 기억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와는 조금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았지만, 나 또한 유년의 시기에 겪었던 감정과 사건들이 말이다. 그렇게 소환된 내 기억들은 작가의 기억과 뒤섞이며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렇다 해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한창 의지해야 할 나이에 누군가를 돌보아야 했던, 그 신산했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될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사랑만 받아야 할 나이에 버겁기 그지 없는 책임을 어깨에 걸머져야 했던, 여리고 어린 아이가 품었을 복잡미묘한 감정을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감히 나는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한다. 직접 읽어 보지 않으면 상상도 공감도 할 수 없는 그녀들의 삶이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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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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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과거에 융성했던 사회들이 지금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도중에 붕괴했을까? 그가 정의하는 ‘붕괴‘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인구 규모, 정치, 사회, 경제 현상의 급격한 감소‘를 일컫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 국가가 이웃 민족에게 정복당하는 것은 붕괴가 아니라, 그 나라의 지배 민족이 바뀌는 정상적인 흥망성쇠일 뿐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이 책에서 붕괴의 예로 드는 것은 남태평양의 이스터섬, 북미의 아나사지 문명, 마야 제국, 노르웨이령 그린란드 등이다. 저자는 이 사회들이 붕괴하게 된 요인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환경 파괴, 기후 변화, 적대적인 이웃, 우호적인 무역국,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이다. 이 중 한 가지만으로 사회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최소 서너 개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붕괴가 발생한다. 하지만 마지막 요인, 그 사회에 닥친 문제에 대해 구성원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이다.

환경 파괴의 가장 극적인 예는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이스터 섬의 11개 부족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경쟁하듯 만들었다. 섬 안쪽 채석장에서 만든 석상을 해안가로 옮기기 위한 목재와 밧줄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나무들이 베어졌다. 900년 경 폴리네시아인들이 이스터 섬에 도착하기 전의 식생을 화분학(花粉學)으로 분석해 보면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진 숲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600년대 즈음엔 벌채로 인해 단 한 종의 나무도 살아남지 못했고 인구의 90퍼센트가 사라지기에 이른다.

미국 남서부에서 아나사지 문명을 발달시켰던 푸에블로족 인디언들의 붕괴를 이끈 결정타는 기후 변화였다. 3년 이상 지속된 가뭄으로 관개시설마저 물이 말라버렸고 영농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적절한 강수량이 보장되어 지하수가 풍부하던 시기에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외부의 충격에 취약점을 드러내게 되고 가뭄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적대적인 이웃이 결정적인 붕괴의 원인이 된 예로 마야 문명이 등장한다. 이스터 섬이나 아나사지 문명에 비하면 열악한 환경도 아니었고 광범위한 문자 기록을 남길 정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는데도, 마야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문명이 흥성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야 소왕국 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생산성이 낮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은 까닭에 전시에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없어 하나의 통일된 제국이 탄생하지 못한 게 전쟁이 끝없이 지속된 동인이었다.

우호적인 무역국의 부재 또한 붕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폴리네시아의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 그리고 망가레바 섬은 서로에게 부족한 자원을 활발한 교역을 통해 극복하면서 수 세대를 지속했지만, 결국 가장 규모가 작은 헨더슨 섬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망가레바 섬을 제외한 두 섬의 사회는 붕괴에 이르게 된다.

다섯 가지 붕괴의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은 척박한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린란드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린란드의 환경이 훨씬 가혹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유럽인의, 그리고 기독교도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이누이트족은 지금껏 살아남았지만 바이킹들은 이누이트의 생존 방식을 배우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고집한 삶의 양태는 그린란드의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현대 사회에서 붕괴의 위기에 다다른 곳들 또한 진단한다. 르완다에서의 대량학살, 같은 섬을 나누어 가진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의 차이, 중국과 호주의 위기를 말한다. 특히 르완다 대학살의 원인을 분석한 게 흥미롭다. 표면적으로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인종 갈등이 원인이었으나, 그 배후엔 인구 과잉에 따른 토지 분쟁과 기아가 있었다. 끔찍한 학살의 표적은 대부분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학살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인구 과잉을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맬서스의 이론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용 자원을 넘어서는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가 인류를 붕괴로 이끈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인구를 줄이고 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전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한국의 극심한 저출생을 ‘새로운 기회‘라고 극찬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또다른 저서 <제3의 침팬지>에서 인류의 현 세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길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 바 있다. 어쩌면 한국은 AI의 도움을 얻어 적절한 인구로도 국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인류의 테스트 베드가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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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하나의 역사
노먼 데이비스 지음, 왕수민 옮김, 박흥식 감수 / 예경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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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다. 아무리 1,700 페이지 짜리 벽돌 같은 책이라고 해도 몇 달이면 거뜬히 읽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유럽의 역사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은, 그 장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알다시피 ‘유럽‘이라는 단어는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의 등을 타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로 간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에서 기원했다. 유럽은 그 시작부터 바다를 건너고 이질적인 문화가 섞이는, 끝없이 이동하는 운명을 타고난 문명이었음을 은유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스도 아니고 크레타도 아닌, 선사시대부터의 유럽에서 시작한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에우로페는 애초 호기심을 갖지 말아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고 했었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책의 늪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이 책은 너무나 방대하다. 역사의 지평 그 이전부터 구소련 해체까지 유럽사의 주요 사건들을 쭉 개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 사조, 미술, 음악, 문화, 생활사까지 손대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다. 슬슬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서핑해볼까 하면 느닷없이 시가 등장하고 악보가 나온다. 게다가 ‘캡슐‘이라고 해서 저자가 본문의 내용과 맞물리는 주제를 중간중간 서술해둔 게 있다. 이를테면 헬레니즘 문화를 서술하면서 [파피루스]라는 캡슐을 덧붙인다. [파피루스] 캡슐엔 파피루스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만을 연구하는 파피루스학이라는 게 있으며, 고대 그리스 만이 아니라 사해 문서 등의 초기 기독교 문헌에도 파피루스가 쓰여서 성경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캡슐이 301개나 등장하는데, 책 중간에 떡 하니 한 두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니 책을 읽는 흐름이 뚝뚝 끊기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그런데 정작 주요 사건들의 서술은 불친절하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유럽사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들 - 특히 중세~근대 영국, 프랑스 역사 - 이었는데, 이런 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 구글링을 해야 한다. 책 읽는 도중에 스마트폰을 쥐게 되니 독서가 지속될리 있나. 그래서 하루에 두 세 시간을 투자해도 많아야 4~50 페이지를 읽는데 그친다. 무척이나 딱딱한 번역도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데 한몫한다.

완독하는데 일년 하고도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읽다가 꽤 질리기도 했지만, 기왕 시작한 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숙제 마치는 심정으로 끝을 보았다. 살면서 이 정도 분량의 책을 다시는 읽을 일이 없으리라는 데서 위안과 보람을 찾는다. 수 천년에 걸쳐 퇴적된 유럽 역사를 고작 책 한 권으로 통달해 보겠다는 욕심이 무척 어리석었다는 반성도 덧붙여서.

이 책의 말미에서 역사학자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단락을 발견하여 옮겨 본다. 참고로 이 단락이 쓰여진 건 1992년 2월, 냉전이 끝나고 구소련이 해체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아직 EU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이었을 때이다.

“많은 것이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미국이 계속 강력한 힘을 갖고 비교적 풍요로운 상태를 유지해간다면, 서유럽의 현상태(status quo)가 급작스레 뒤바뀔 가능성은 낮다. 나토는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EC는 신중한 행보를 보이며 발전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위기 속으로 발을 들인다면, 유럽 국가들은 공동 방어를 목표로 내걸고 의기투합하게 될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대서양의 돌풍 역시 유럽 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못지 않은 위력을 가질 수 있다.”

트럼프 재집권으로부터 기인한 작금의 유럽 안보위기와 그 대응을 30여년 전에 예견한 듯한 문장을 보며 역사 공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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