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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하나의 역사
노먼 데이비스 지음, 왕수민 옮김, 박흥식 감수 / 예경 / 2023년 6월
평점 :
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다. 아무리 1,700 페이지 짜리 벽돌 같은 책이라고 해도 몇 달이면 거뜬히 읽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유럽의 역사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은, 그 장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알다시피 ‘유럽‘이라는 단어는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의 등을 타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로 간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에서 기원했다. 유럽은 그 시작부터 바다를 건너고 이질적인 문화가 섞이는, 끝없이 이동하는 운명을 타고난 문명이었음을 은유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스도 아니고 크레타도 아닌, 선사시대부터의 유럽에서 시작한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에우로페는 애초 호기심을 갖지 말아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고 했었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책의 늪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이 책은 너무나 방대하다. 역사의 지평 그 이전부터 구소련 해체까지 유럽사의 주요 사건들을 쭉 개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 사조, 미술, 음악, 문화, 생활사까지 손대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다. 슬슬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서핑해볼까 하면 느닷없이 시가 등장하고 악보가 나온다. 게다가 ‘캡슐‘이라고 해서 저자가 본문의 내용과 맞물리는 주제를 중간중간 서술해둔 게 있다. 이를테면 헬레니즘 문화를 서술하면서 [파피루스]라는 캡슐을 덧붙인다. [파피루스] 캡슐엔 파피루스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만을 연구하는 파피루스학이라는 게 있으며, 고대 그리스 만이 아니라 사해 문서 등의 초기 기독교 문헌에도 파피루스가 쓰여서 성경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캡슐이 301개나 등장하는데, 책 중간에 떡 하니 한 두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니 책을 읽는 흐름이 뚝뚝 끊기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그런데 정작 주요 사건들의 서술은 불친절하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유럽사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들 - 특히 중세~근대 영국, 프랑스 역사 - 이었는데, 이런 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 구글링을 해야 한다. 책 읽는 도중에 스마트폰을 쥐게 되니 독서가 지속될리 있나. 그래서 하루에 두 세 시간을 투자해도 많아야 4~50 페이지를 읽는데 그친다. 무척이나 딱딱한 번역도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데 한몫한다.
완독하는데 일년 하고도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읽다가 꽤 질리기도 했지만, 기왕 시작한 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숙제 마치는 심정으로 끝을 보았다. 살면서 이 정도 분량의 책을 다시는 읽을 일이 없으리라는 데서 위안과 보람을 찾는다. 수 천년에 걸쳐 퇴적된 유럽 역사를 고작 책 한 권으로 통달해 보겠다는 욕심이 무척 어리석었다는 반성도 덧붙여서.
이 책의 말미에서 역사학자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단락을 발견하여 옮겨 본다. 참고로 이 단락이 쓰여진 건 1992년 2월, 냉전이 끝나고 구소련이 해체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아직 EU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이었을 때이다.
“많은 것이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미국이 계속 강력한 힘을 갖고 비교적 풍요로운 상태를 유지해간다면, 서유럽의 현상태(status quo)가 급작스레 뒤바뀔 가능성은 낮다. 나토는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EC는 신중한 행보를 보이며 발전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위기 속으로 발을 들인다면, 유럽 국가들은 공동 방어를 목표로 내걸고 의기투합하게 될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대서양의 돌풍 역시 유럽 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못지 않은 위력을 가질 수 있다.”
트럼프 재집권으로부터 기인한 작금의 유럽 안보위기와 그 대응을 30여년 전에 예견한 듯한 문장을 보며 역사 공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