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맨 -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고인류학자들의 끝없는 모험
커밋 패티슨 지음, 윤신영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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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최초의 인류 화석을 찾는 이들의 치열하면서 때로는 비열하고, 한없이 장렬하면서도 무척이나 격렬한 이야기.

팀 화이트라는 남자가 있다. 화석에 미친 남자이자 어마어마한 워커홀릭, 학계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걸 주저하지 않는 싸움꾼, 발굴 현장이 아닌 연구실에만 있는 학자들을 혐오하는 악담의 대가. 하지만 화석 발굴과 탐구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가.

근래 가장 유명한 고인류화석은 단연 ‘루시‘이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돈 조핸슨에 의해 발굴된,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직립보행 인류 화석의 애칭이다. 이 조그만 몸집의 화석은 인류가 아프리카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진화의 뿌리의 증거로 널리 알려졌다. 아직까지도 그 명성은 녹슬지 않아 대중적인 고인류학 서적엔 대부분 루시가 메인 타이틀을 차지한다.

하지만 팀 화이트는 루시보다 오래된 화석이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는 발굴단을 꾸려 쿠데타와 독재로 인해 극도로 불안한 정치환경에 놓인 에티오피아의 미들 아와시 지역을 샅샅히 훑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싸운다. 에티오피아 고고유물국 관료, 대학 행정 당국, 학술지 에디터, 그리고 저명한 동료 과학자까지. 이렇게 싸워대는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연구비를 만들어 발굴단을 조직하여 루시보다 오래된, 인류와 유인원의 분기에 더욱 가까운 화석을 찾는 것이었다.

1992년, 팀 화이트의 발굴팀은 미들 아와시에서 마침내 뭔가 새로운 걸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이를 학계에 발표하지 않고 오랜 기간 화석을 복원하면서 이 화석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견한 화석에 ‘아르디‘라는 이름을 붙인 채.

아르디 화석은 여러 모로 이상했다. 유인원처럼 다른 발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옆으로 퍼진 엄지발가락을 지녔지만(마치 인간의 엄지손가락처럼), 유인원과 달리 꼿꼿이 서서 직립보행을 할 수 있었다.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현생 유인원들은 직립 보행보다는 너클 보행(주먹을 쥐고 네 발로 땅을 디디며 걷는 보행)을 하기 때문에, 현생 유인원으로부터 우리 인류의 기원을 찾으려는 당시 학계의 풍조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옆으로 벌어진 엄지발가락을 가진 고인류가 직립 보행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원래 고인류는 직립보행을 했었고, 고인류와 갈라진 유인원은 나무를 타기 좋도록 쥐는 데 적합한 형태로 발을 진화시켰다. 아르디는 나무와 땅을 오가던 생활을 했으나, 루시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나무를 오르지 않고 땅에서만 살게 되었기에 엄지발가락이 지금의 인류와 같은 형태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침팬지의 엄지발가락은 아르디보다 몇 배나 더 길어서 나뭇가지를 발로 쥐기에 충분하다.

이 결론은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인류는 사족보행을 하던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와 직립보행을 하도록 진화했다는 기존의 이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디에 대한 연구 결과는 발굴 후 15년이 지난 2007년에 공개되었지만, 팀 화이트와 그의 팀이 그동안 쌓아온 학계의 수많은 적들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힘든 증거가 발견되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이 책은 말한다. 물론 아직도 가장 유명한 화석은 루시이지만.

이 책은 멋들어진 고인류학 대중서적이자 모험활극이며, 훌륭한 추리소설이면서 음험한 정치 다큐이다. 수많은 고인류학자들이 등장하여 암투를 벌이고, 아르디가 던지는 수천만년에 걸친 수수께끼의 베일을 흥미진진하게 벗겨낸다. 고인류학을 아예 접해보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이상희 교수가 쓴 <인류의 기원> 같은 입문서 정도의 지식이 있다면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책이다. 마침 <인류의 기원>의 공저자 윤신영이 이 책을 번역했기에 더욱 그렇다. 윤신영의 번역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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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30만부 기념 특별 리커버)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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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방일지‘일까.

주인공의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자수하여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전남 구례로 돌아간다. 그리고 같이 빨치산 활동을 한 아내와 딸 - 우리의 주인공 - 하나를 데리고 늙을 때까지 조용히, 그리고 서툴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치매끼가 돌기 시작할 무렵의 아버지는 어느 날 길을 가다 전봇대를 미처 못 보았는지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린다. 일세를 호령했던 빨치산 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혁명에 실패하고, 남은 생도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의 삶이 어떻게 해방과 연결될까.

머리가 커지면서부터 아버지의 좌파 사상을 비웃었던 딸.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과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에서 한 글자 씩을 따 ‘아리‘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딸. 그러나 혁명가 아버지를 닮아 ‘소도 때려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딸. 부모의 과거로 인해 장래도 막히고 혼사길도 막힌 딸. 딸은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했다.

하지만 딸이 보기에 허세만 가득찬, 보잘것없었던 아버지의 삶은 장례식장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독립한 후 대학 강사 자리를 전전하며 부모와 떨어져 살던 딸은 아버지가 구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차례로 모습을 나타내는 조문객들에게서, 그네들의 이야기를 통해 딸은 그녀가 미처 몰랐던 낯선 아버지와 만난다. 비록 아버지와 사상은 정반대였지만 매일같이 붙어다니며 허물없이 지내던 국민학교 동창, 아버지 덕분에 몸의 흠을 고치고 시집을 갈 수 있게 되었던 이웃집 동생, 여호와의 증인에 들어간 걸 들켜 다리몽뎅이가 뿌러질 뻔했다 아버지 말 한 마디에 살아난 오촌 조카, 미성년자이면서 아버지 담배 친구였던 베트남 혼혈 소녀까지. 아버지는 늘 마을의 머슴을 자처했고 이웃과 친지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였다. 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언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서서히 어릴 적의 아버지, 혁명엔 실패했지만 늘 민중을 믿었고 끊임없이 도우려했던 꼿꼿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복원된다.

그렇다. 아버지는 찰나의 혁명이 아닌 생활 속의 헌신을 통해 소소하게 본인의 신념을 관철시키고 전파해 온 것이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의 해방일지였다.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는 본문의 문장처럼,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아버지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구례마을에 바친 것이었다.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 구례에서 말이다. 그걸 알게 된 딸은 마침내 깨닫는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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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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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다. 저인망 어선 마냥 지구의 자원을 깡그리 수탈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 오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송이버섯이 어떻게 생겨나고 채집되며 상품으로서 유통되고 소비되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슬쩍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그렇게 보일 뿐이다).

저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지금부터는 애나 칭이라고 하겠다)은 인류학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인류학은 세계의 여러 문화를 비교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사실 인류학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인류학이라는 게 인류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광범위한 학문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애나 칭은 포스트휴머니즘에 기반한 문화인류학자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 즉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문화란 인간과 비인간, 즉 동식물과 환경이 함께 구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애나 칭은 인간이 아닌 송이버섯을 중심으로 이 책에서 논지를 전개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와 송이버섯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확장성은 다양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확장성에서 비롯되었다. 작물(사탕수수)과 노동(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을 소외시키고 획일화하는 모델로 대규모의 농장 확대가 가능했고 이는 곧바로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 똑같은 형태로 이식되었다. 성공을 맛본 자본가들은 지구상의 모든 것을 이러한 확장을 통해 시장가치로 교환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반면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것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송이버섯이 피어나는 숲에선 작물과 노동의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다. 송이버섯은 소나무와 공생하면서 숲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또한 송이버섯 채집인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처럼 틀에 맞춘 규격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즉, 소외되지 않는다. 애나 칭은 송이버섯 숲이 자본주의의 확장성에 의해 폐허화된 잔재에서 태어났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인간과 송이버섯, 소나무, 그 외의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엮어내는 ‘다종의 세계 만들기‘는 서로 간의 협력과 관계맺음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은 활엽수를 벌목하고, 그 자리에 소나무가 들어서고, 소나무의 잔뿌리는 송이버섯 균류의 집이 되며, 송이버섯 균류는 땅의 양분을 소화하여 소나무에게 제공한다. 이렇게 번성한 소나무 숲은 인간과 그외의 동식물에게 다양한 먹거리와 거처를 제공한다. 송이버섯이 다종의 얽힘에 기반한 ‘공유지‘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했듯 포스트휴머니즘에 기반한다. 따라서 인류를 작금의 위기에서 구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제시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송이버섯의 공유지는 확장성이 없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애나 칭은 자본주의의 확장성 대신 송이버섯으로 대표되는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송이버섯 모델은 전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본주의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자그마한 허탈과 가벼운 절망이 밀려온다.

이 책을 더욱 읽기 어렵게 하는 건 애나 칭 특유의 낯선 언술이다. 그녀는 오염, 교란, 번역, 구제 등의 용어를 원뜻과 아주 다르게 재정의하여 사용한다. 독자는 이 용어들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혼란스러운 숲길을 헤매야 한다. 인류학과 생물학의 언저리 어딘가 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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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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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소는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을 때 외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은 무엇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가의 통제 수단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디어드라 마스크는 주소가 갖는 이 모든 가능성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에서 주소가 상징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 초반에 저자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시골마을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1년까지 도로명 주소가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길을 찾는 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다름 없는 일. 주소가 없으니 내비는 쓸모가 없고, 길가다 마주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불편한데 주소를 만들어 주면 주민들이 기뻐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도로명을 짓기 위해 파견된 공무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들은 국가가 개인을 감시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주소를 부여하려 든다고 의심한다. 이는 최초로 도로명 주소를 고안하고 도입했던 18세기 유럽의 시민 반응과도 유사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통치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숙적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전쟁에서 참패하자, 더 많은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게 바로 주소 체계였다. 집집마다 주소를 매기고 거주자 명단을 작성하면 누가 어디에 사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으니 그만큼 징집이 쉬워진다. 국가가 개인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바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번호를 매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작업이다. 번지가 막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집에 번호가 매겨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부정당했다고 느꼈다.‘ 저자가 찾아간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주민등록증에 지문이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이니까.

하지만 18세기 유럽인들도 주소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금세 깨달았다. 언제든 우편물을 받을 수 있고,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요제프 2세는 주소를 배정하러 다니는 장교들에게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던 요제프 2세는 백성들이 처한 현실(지주의 학대, 낮은 교육 수준, 열악한 위생 상태)을 보고받고 농노제 폐지, 무상 교육 실시 같은 국가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또다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 보자. 콜레라가 런던을 휩쓸던 흉흉한 시기에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주소였다.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존 스노우는 아무것도 몰랐지만(You know nothing, John Snow), 콜레라의 원인을 밝혀낸 위대한 의사 존 스노우는 콜레라의 진원이 한 오염된 우물이었음을 잘 정리된 주소와 지도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데, 2010년 대지진 이후 아이티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지진 이전에도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구하기 어려웠던 아이티에서 콜레라의 진원지(놀랍게도 네팔 평화유지군 진지였다)를 찾는데 6년이나 걸렸다. 그나마 구글의 지원을 받아 환자들의 주거지를 지도로 만들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주소가 갖는 권력과 인종, 계급과 지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곳에 주소를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디지털 체계에 대해 논하면서 끝을 맺는다. 어느 대목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책으로, 주소 하나 만으로 이렇게 많은 논쟁거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ps.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 체계를 언급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사례가 등장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건물 블록 중심의 지번 주소를 사용하며, 서양은 도로가 중심이 되는 도로명 주소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는 서양 관광객들은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을 인식하는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도시를 구획으로 인식하고 서양은 선(도로)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 동양인은 구획부터 그리고 서양인들은 길부터 그린단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에 지번 주소가 도입되었다가 2011년부터 도로명 주소 체계로 전환되었는데, 그렇다고 공간의 인식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우리는 무슨무슨동에 산다고 말하지, 무슨 길에 산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면 우리의 사고체계에도 변화가 생길까? 호기심이 샘솟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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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바다 레이첼 카슨 전집 2
레이첼 카슨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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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은 바다를 사랑했다. 무분별한 살충제 남용이 불러올 무시무시한 미래를 예견한 책 <침묵의 봄>으로 세상을 바꾼 그녀이지만, 레이첼 카슨은 늘 바다를 고향으로 여겼다. 그녀의 저서 중 <침묵의 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바다를 주제로 한 책이라는 점, 미국 정부 수산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다는 점, 퇴직 후 뉴잉글랜드 바닷가의 웨스트사우스포트 섬에 자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집필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생 바다를 무엇보다도 사랑했다는 점에서 비록 바다와는 거리가 먼 펜실베이니아 서부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참된 고향은 바다라 할 수 있겠다.

이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에 출간되었다. 전작 <바닷바람을 맞으며>가 하필 2차대전 때 출간되는 바람에 참담한 실패를 겪었던 터라,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판권을 사려는 출판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출판된 이 책은 매스컴의 찬사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면서 카슨이 전업작가로 전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해양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은 대양의 아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달과 해의 만유인력이 바다의 조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양에 면면히 흐르는 거대한 해류로 인해 어떻게 지구의 온도가 조절되는지, 해저의 거대한 산맥과 계곡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해양 지각은 어떻게 움직이는지(지금은 당연한 상식이 되었지만, 이 책이 출간된 시점엔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아직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 망망대해에서 파도는 어떻게 밀려오는지, 천문학적인 숫자의 플랑크톤과 규조류, 그밖의 미세 바다 생물들이 억겁의 세월을 거쳐 어떻게 바다를 변화시켰는지. 카슨은 이 모든 걸 과학의 언어로 마치 시인처럼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담아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7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세월의 더께가 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고전의 참된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이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면, 지금 같은 기후재앙의 위기는 오지 않거나 한참 늦춰지지 않았을까? 그녀가 이 책에서 보여준 바다와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침묵의 봄>이 환경 정책에 미친 심대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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