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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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이었다. 이 책을 산 건.
한강의 소설은 늘 힘들었다. 타협 없이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 마구 휘저어대는 한강 특유의 아름다운 비수 같은 문장 때문이었다. 8년 전 읽었던 <소년이 온다>는 그 절정이었다. 슬픔, 분노, 부끄러움, 아픔, 안타까움 같은 수많은 감정이 밀려드는 폭풍 속에서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서 책을 내려 놓고 괜히 하늘을 바라보기가 여러 번. 그래서 두려웠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그런 소설이 아닐까. <소년이 온다>와 쌍둥이 같은 소설이 아닐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환희로 가득 찼던 마음이 잔잔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이젠 한강의 작품이 주는 지극한 슬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느 기자의 말처럼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문학에 감염된 이들이 믿어 온 문학의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 거대한 경이의 순간이기에, 그 자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 감격스러움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었지만 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감정선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을까. 현실과 꿈(혹은 환상)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이 소설의 특징 때문이었을까. 작년에 읽었던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에선 4·3의 참상이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페이지를 넘기기가 두려웠었다.

사실 이 책의 초점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데 맞춰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한서림을 공유하고 서사로 남김으로써 치유 - 절대 화해가 아니다 - 를 모색하는 것이다. 혈육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 수 년에 걸친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승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잃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망자들을 묻어야 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더미 속에, 모래밭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 드센 밀물 속에.

하지만 그들은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한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짐승을 도축하듯 도민들을 학살한 무도한 국가를. 구제역이 유행할 때 소떼를 산채로 땅에 파묻듯이, 이승만 정권은 국가의 폭압에 저항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절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희생자 유족들은 그렇게 묻힌 이들과 작별할 수 없었다. 아니 작별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인선의 어머니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잤지만, 그 악몽은 유해가 발굴되고 진실이 규명되어야만 사라졌을 것이다. 오빠가 언제 죽었는지,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 채 조용히 늙어가고 죽음을 맞은 인선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책은 그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레퀴엠이자 어둠을 희미하게 밀어내는 작은 불꽃이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 경하가 간절히 켜냈던 성냥불처럼.

어린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던 나에게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제주 사투리는 새로운 차원의 추체험을 선사했다. 작중 할머니들의 ‘육지‘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머릿 속에서 또렷하게 재생하여 그네들의 단단히 묵힌 슬픔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요즘 유행하는 농담과 같이 노벨 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은 경험이랄까. 경하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새를 구하러 가는 길에 겪는 폭설도 제주의 중산간에 내린 어마어마한 눈을 보아왔던 나에겐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듯 선했다.

한강은 책 끝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썼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슬픔과 분노로만 4·3을 해석하지 않는다. 왜 이 책이 다른 한강의 소설에 비해 덜 힘들었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작별하지 않기 위해 힘껏 애썼던 이들의 사랑, 그 지극함에 대한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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