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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2월
평점 :
이 책을 알게 된 건 김영하 작가의 강연회에서였다.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한 강연 중, 김영하 작가는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어딘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케 하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원제는 <The Adventure of Homo Fictus>라 윤색이 많이 가미된 번역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책은 거기서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기대했던 것과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 책이 인간은 이야기를 왜 좋아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이 세계를 쌓아 올렸는지를 알려주리라 기대했다. 전자는 내가 기대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의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나치가 독일 국민들을 지배하여 거대한 학살 기계를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치가 만들어낸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스토리텔링의 힘 때문이었다. 21세기에 지구평평설이나 큐어넌 같은 극도로 비이성적인 음모론자들이 횡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건 바로 이야기가 갖는 ‘구슬림‘의 힘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평생 타인과 소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타인의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구슬리기‘ 위해서라고. 심지어 나에게 하는 독백도 내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서로를 단단히 구슬려 마음을 영영 돌려놓는 수단 중에서 인류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불합리한 맹신에 빠지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도 수없이 목격한다. 물론 이야기가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구슬려서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릇된 구슬림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게 문제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 Homo Fictus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마치 도구처럼 사용한다. 같은 칼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멋진 요리가 탄생하기도,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가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 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라고 이름붙여진 것이다.
플라톤은 이야기의 어두운 본성을 진작에 깨달았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구름>에서 삿된 궤변술의 달인으로 묘사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큰 반감을 사고 결국엔 독미나리차를 마시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저작 <국가>에서 이야기꾼이 아닌 철인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꿈꾸었다. 그리고 시인을 최후의 1인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국가의 권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이야기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힘은 고유한 매력 못지 않게 확산되는 속도에도 달려 있다. 20세기에 등장한 라디오, TV, 인터넷 등의 매스미디어는 이 속도를 급속히 끌어올렸다. 1994년의 르완다 대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에 8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후투족은 한 손에는 라디오를, 한 손에는 마체테를 들고 어제까지의 이웃, 동료, 친구였던 투치족을 살해했다.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방송이 송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어둡고 끔찍한 이야기, 사악하고 어리석은 속삭임에 이끌리는가? 이를테면 음모론 같은 것들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밝은 이야기는 지루하지만, 어두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이는 유튜브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극적인 사이버렉카 채널이 유익한 정보로 가득 찬 채널의 구독자 수를 압도한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를 쉽게 밀어낼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 더 힘있는 이야기가 진실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끝에서 그 적나라한 예시를 든다. 바로 트럼프의 당선이다. 대선 개표 당일까지도 힐러리 유력을 띄웠던 건, 다시 말해 트럼프가 과소평가된 건 언론들이 트럼프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초등학생 수준의 어휘로 이루어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연설을 하지만, 지극히 원초적이고 명쾌한 이야기를 미국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우리가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과학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이야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데 트럼프만한 상징이 있을까. 트럼프는 과학을 무시한다. 코로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당과의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했다. 당장 이번 미 대선만 해도 별다른 서사 없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했던 해리스를 암살의 총탄이 극적으로 비껴간 트럼프가 압도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 탈진실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과학이다. 과학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게끔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학이 권위를 되찾으려면 - 과학자들이 지구평평설 따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 진실을 말하는 제도, 즉 학계와 언론이 달라져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적 성향이 왼쪽으로 극도로 치우쳐진 미국의 학계와 언론 지형이 만들어낸 불균형이 결국 학문과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심각한 불신을 만들었고 음모론에 경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책의 분석과는 다르게 트럼프의 재선은 단지 트럼프가 꾸며낸 서사 만이 아닌 미국 민주당의 국민의 보편 정서와 유리된 정책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언론의 편향된 이념 지형이 과학적 진실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는 저자의 결론에 쉬이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에선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대중의 극심한 반발이 있어야 했다. 과연 그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힘은 인정하지만,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진실이 다 덮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AI의 시대에 딥페이크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자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