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ㅣ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빈 서판‘은 존 로크가 말한 Tabula rasa, 즉 인간의 마음은 당초에 하얀 백지와 같아서 어떤 물감을 칠하느냐에 따라 자유롭게 바뀔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 타인에 대한 배척, 감정과 편견 같은 인간 본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것들은 사회와 제도에 의해 개개인의 마음에 덧씌워져 전쟁, 학살, 인종차별 등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데카르트(기계 속의 유령)와 루소(고상한 야만인) 이후로 이 ‘빈 서판‘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각 학문 분야별 좌파 이론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었다. ‘빈 서판‘은 개인, 인종, 성별의 차이를 환경의 산물로 설명함으로써, 차별을 철폐하고 복지 제도를 마련하며 의무 교육을 도입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선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 사상은 현대 교육과 매스미디어 방법론에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인간은 교육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이걸 너무 진지하게 믿은 결과, 공산주의나 전체주의가 탄생한다.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공동체의 이익과 선(善)만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신념. 이 무서운 믿음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우스꽝스러우면서 처참했던 대약진 운동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이론이 맞지 않다는 것,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수많은 사례와 연구, 반박하기 힘든 논리로 무장하여 하나하나 논박하고 증명해 나간다. 이전에도 인간의 선천적 본성과 차이에 대한 심리학적, 생물학적 연구가 있었으나, 전부 우생학의 재림이라든가 파시스트적 발상이라는 비난에 파묻혔다. 과학적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덕으로 과학을 재단하려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 따위는 없다고 무조건 우기는 것보다(이렇게 되면 모든 범죄는 개인을 제대로 양육하고 인도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이지 범죄자의 책임이 아니다), 인간 본성을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다스리고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게 훨씬 합당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