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당시 악명높았던 드레스덴 폭격으로 연인과 가족 전부를 잃은 남자.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목숨을 잃은 그의 아들. 아버지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만의 여행을 떠나는 아홉 살 난 손자. 하지만 손자는 할아버지를 모른다. 아들도 아버지를 모르기는 마찬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충격으로 말을 잃은 남자는 뉴욕에서 죽은 연인의 여동생을 만나 서로를 보듬지만,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을 잃은 남자는 자기 존재와 실존에 대해 번민하다 끝내 여자를 떠난다. 홀로 남은 여자는 아들을 낳아 기르고 그 아들이 자라 결혼하여 손자를 낳지만 - 이 손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 우리의 꼬마 오스카다 - 오스카의 아버지는 911 테러 때 오스카에게 다섯 개의 전화 메시지를 남기고 죽는다. 오스카는 아버지의 유품 중 작은 열쇠와 ‘Black‘이라 쓰인 봉투를 발견하고, 열쇠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뉴욕에 사는 블랙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 모두를 만나러 작은 여행을 떠난다. 911 테러 현장을 생중계로 보면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는, 불에 타죽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확실하고 즉각적인 죽음을 선택한 희생자들. 드레스덴에서 폭격을 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대도 군수공장도 없던 오래된 도시는 단지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폭격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오스카의 말대로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야 하지만,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특별히 비극적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폭력의 제물이 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되나, 이들은 트라우마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힘들어한다(오스카의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이 트라우마의 치유는 역설적이지만 역시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오스카는 뉴욕의 모든 블랙을 만나면서 거꾸로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고 호들갑 떨만한 작품은 아니나, 역사의 비극에 매몰되지 않고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세상을 구하는 건 이런 따뜻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