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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기가 싫어. 피가 뚝뚝 듣는 새빨간 덩어리들이 무서워. 고기와 시체가 어떻게 다른 거지? 그 벌건 덩어리들이 정형되어 포장되면 순식간에 맛난 고기로 이미지가 탈바꿈해. 왁자지껄 즐겁게 고기를 굽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 하지만 내 손엔, 내 옷엔 아직 피가 묻어 있어. 나는 내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어떻게 이 덩어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 온 걸까?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어.
한강의 소설을 읽는 동안엔 그녀가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한다. 편히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밀도를 지닌 한강의 글에 짓눌려 며칠을 앓는다. 그래서 다른 작가와 달리 한강의 작품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읽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선 약간의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녀의 소설을 연달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그래서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참 전부터 집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몇 년 전 맨부커 상을 탔을 때도 차마 읽지 못했던 그 책을.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시선으로 쓰였고,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의 남편, 즉 형부가 사건을 이끌어 가며,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이다. 세 편 중 어느 것도 영혜가 주인공인 적은 없으나 우리 모두 영혜가 진짜 주인공임을 안다. 세 작품 모두 영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녀 주변 세 사람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이니까.
<채식주의자>는 소름끼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선언한 적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다. 어느 날 꿈을 꾸고 나서부터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죽음과 연결된다. 채식도 식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할 수 있겠으나, 고기를 먹기 위해선 생명에 대한 잔인하고 무도한 폭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으로 너무도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를 영혜는 그 꿈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마트 정육 코너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를 사기 때문에 그 폭력을 실감할 틈이 없다. 정육점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세로로 반토막나 커다란 갈고리에 매달린 돼지를 보며 끔찍함을 느낄 때를 빼고는.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았다는 영혜의 아버지는 폭력을 상징한다. 가부장제의 폭력, 권위주의 시대의 폭력, 남성우월주의의 폭력. 숨쉬듯 폭력이 행해지던 시대를 살았기에 그는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혜는 그 숨막힐 듯한 폭력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의 이미지를 연결한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에 저항하며 육식을 거부한다.
영혜의 남편은 어떠한가. 스스로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남자.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영혜와 결혼했다는 남자. 그가 원한 것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듣고, 아침 상을 꼬박꼬박 차려 주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는 아내였다. 아내의 의견, 취향, 개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아내에게 어떤 폭압으로 작용하는지는 관심도 없다.
영혜는 저항한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서. 가슴을 열어 젖힘으로서. 고기를 거부하기 전에도 집에 있을 땐 브라를 하지 않았다는 영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집에서 브라를 입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영혜는 이제 어떤 자리에서도 더 이상 브라를 하지 않는다. 급기야는 병원 뜰에서 환자복 상의를 벗어 버림으로써 그녀는 과거의 순종적인 그녀, 폭력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그녀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다.
<몽고반점>은 기괴하다. 영혜가 손목을 그은 날, 그녀를 엎고 정신없이 병원에 데리고 가느라 피범벅이 된 영혜의 형부는 그 후로 불가해한 이미지에 시달린다.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후, 문득 그의 뇌리엔 나신의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엉겨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예술가였던 그는 그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고 싶은 욕망, 그 주인공이 자기와 처제였으면 하는 욕망,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금기를 어기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라고 자책하면서.
인간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영혜는 몸에 꽃을 그려넣어 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에, 형부는 머릿 속의 강렬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체현하고 싶은 욕망에 결국 금기를 넘어 버린다. 둘의 관계는 각각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타인의 시선에서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추잡한 짓거리다. 그래서 영혜의 언니, 인혜는 구급대를 불러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
<나무 불꽃>은 비감하다. 인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자기 남편과 몸을 섞은 동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가족 모두가 연을 끊어버린 영혜를 그녀는 끝까지 보호한다. 입원비를 대고, 주말이면 면회를 가고, 점점 가라앉아 가는 영혜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아는 타고난 천성 덕분인지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영혜를 은밀히 미워했다.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식사 자체를 거부해 버린 동생을 보며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여섯살 난 아들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영혜처럼 변해 버렸을지 모른다고. 남편과 영혜의 그 사건 이후 지내온 수많은 불면과 고통의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아들이 지워준 엄마로서의 책임이었다. 이인성의 소설 제목처럼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인혜의 삶은 그 자체로 천형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견뎌왔을 뿐.
12년 전,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평을 쓰면서 한강을 ‘우리 시대 한국 문학의 마녀‘라 이름 붙였었다. 처절하고 여리고 가냘픈 모습을 하고 광기와 슬픔, 고통을 마력적으로 변주해 내는 마녀. 이제는 그녀를 마에스트로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강은 이제 어둠, 슬픔, 고통, 낯설음, 고결함을 개인을 넘어 사회와 시대의 차원으로 확장한 감정의 교향곡을 세심하게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