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알고 있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꿈꾼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연애를.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는 대개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온 주인공들이 마침내 결혼하여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될 결혼 이후의 삶은 보여주지 않는다. 결혼 뒤엔 지독히 ‘현실적인‘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인생은 행복한 한 순간의 토막이 아니라 수많은 연속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다. ‘Happily ever after‘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위한 환상일 뿐이다.

이 신세대적인 - 작품이 쓰여진 시기엔 칭찬이었을 수 있으나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낡아버린 감각 - 소설은 눈물의 여왕과 침묵의 왕이 각기 자기 시선에서 바라보는 동일한 동화 두 편으로 시작한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눈물이 끊이지 않았던 여왕은 나이팅게일이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선왕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여왕은 강을 마주 보고 말이 없는 이웃 나라 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여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이웃 나라 왕을 발견한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제 울어도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던 왕은 종달새가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어머니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다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왕은 강을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웃 나라 여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진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젠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대학 노래패에서 만난 신입생 장미와 명제. 장미는 눈물이 많고, 명제는 말이 없다. 서두의 동화 주인공 같은 그들은 사실 각기 다른 상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치대생 서정우와 화려한 한서영. 하지만 운명은 그들 네 명을 엇갈리게 하고 젊은 날의 가슴 떨림은 맺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1부. 2부에서는 본격적인 동화가 시작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장미와 명제는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하고, 상대를 운명의 파트너라 확신하는 몇 가지 사건을 거쳐 결혼에 이르른다. 3부는 현실이다. 동화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의 단점에 실망하고, 실망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확신이 된다. 둘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고 헤어지지만 영원한 행복은 없듯이 영원한 미움도 없나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시간은 힘이 세지만 사랑도 힘이 세다.‘ 둘은 상대가 달라졌다는 - 맑고 깊어진 눈, 옹골차진 속 - 믿음에 다시 결합한다. 4부는 둘이 재혼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이혼 전보다 깊어졌으며 옹골차졌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둘은 변한 줄 알았지만 사실 그들의 근본적인 자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 내면의 아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받기 쉬운 어릴 적 자아는 서로를 못 견뎌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래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두 번째 이혼 후 두 사람은 모종의 사건을 통해 각자의 미성숙함을 깨닫고 비로소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침묵 왕자는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고 눈물 공주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 끝에 드디어 저주가 깨진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도, 깊게 분석할 수도 있는 묘한 소설이다. 젊은 날의 운명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과 전쟁‘스러운 오해와 갈등을 거쳐, 오은영 박사의 ‘결혼 지옥‘을 보는 듯한 치유와 화해의 길로 인도한다. 김경욱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로 쓰인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고, 장미와 명제의 챕터가 교차하며 같은 사건을 남녀 각각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심리 소설 같기도 하다. 아니면 강유정 평론가가 지적했듯 ˝사랑이란 나를 비우는 지경임을 경험해 본 자들에게는 애틋한 성장소설로 읽힐 것이다.˝ 동화 같은 현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동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동화처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어른아이들에게 필요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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