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원전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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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역사는 비유하자면 잘 무두질된 가죽 같은 것이다. 수많은 가공을 거쳐 부드럽고 보기 좋지만, 그 동물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인류가 겪은 일상과 사건들이 엄청난 두께로 퇴적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는 건 당연할 터. 그래서 역사는 큰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깎아 만든 이쑤시개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된 역사는 절대로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할 수 없다. 권력자의 의지 때문이든, 사상과 이념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그게 역사 기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르포르타주가 중요해진다. 사건의 직접적인 목격자가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 것. 그게 일기가 되었건, 신문 기사가 되었건, 자서전이 되었건. 거친 호흡과 주관적인 문체로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의 느낌을 주는 것 말이다.
저자 존 캐리의 말대로 우리는 참혹한 사실주의 소설을 읽다가도 이것이 결국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 하지만 나치대학살에 관한 생존자의 기록을 읽다가 그렇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제기된 사실들이 우리의 인식을 강제하고 우리의 반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르포르타주는 현실을 가림없이 보여주어 독자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실린 180개 꼭지의 기록들이 갖는 울림은 때로 가슴을 저밀 정도로 대단하다.
다만 역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점이 아쉽다. 역자 후기에서 자랑스럽게 밝히듯,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원저에 있지도 않은 해설을 매 꼭지마다 멋대로 달아놓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자의 주석을 맘대로 삭제하고 원저의 30% 정도를 한국 일반 독자에게 적합지 않다(...)는 이유로 아예 번역에서 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나머지는 원서를 찾아보라고 친절히 안내까지 해준다. 아마 역자는 번역이 아니라 편역을 하고 싶었나보다.

프레인의 풍자는 기자가 겪는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표준화된 표현과 진부한 문체가 서서히 쌓여 기다리고 있다가 손끝에 닿기만 하면 종이 위로 튀어나온다. 사실 글 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기자의 경우 특히 심각한 문제다. 현실에 충실해야 하면서 또한 언제나 친숙하지 않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눈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아야 하고, 기자의 입은 언제나 처음 말하는 것처럼 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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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진화 - 이기적 개인의 팃포탯 전략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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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가 적극 추천한 책이어서 당연히 진화생물학자의 저서로 알았던 이 책은, 미시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가 ‘죄수의 딜레마‘를 기반으로 어떻게 개체나 집단 간의 협력이 발생하고 공고해지는지 증명하는 책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죄수가 각자 격리된 상태에서 심문을 받을 때, 둘 중 하나가 배신하고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풀려나고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10년형을 받는다. 둘 다 서로 배신하여 자백하면 각자 5년형을 받는다. 둘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둘 다 6개월 형을 받는다. 이 상태에서 서로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은 서로 배신하지 않고 6개월 씩 형을 사는 것이지만, 상대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상대가 배신하든 안 하든 나는 배신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 된다.
하지만 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1번만 선택해야 할 때는 배신이 최선의 선택이 되겠지만, 이런 선택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지금 만난 상대방을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른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로 협력하여 이득을 얻는 편이 다시 또 만날 가능성이 높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보다 낫다.
액설로드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죄수의 딜레마 대회‘를 두 차례 개최한다. 전문가들이 만든 프로그램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대전을 치러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프로그램이 우승하는 대회다. 첫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가장 단순한 팃포탯(Tit For Tat)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팃포탯은 우선은 상대와 협력하지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상대가 협력하면 다음 번에도 협력하지만 상대가 배신하면 바로 배신으로 응징한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첫 대회의 결과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좀 더 발전된 프로그램들이 참가했지만, 이번에도 우승은 팃포탯이었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두 대회 모두 상위권에 든 프로그램들은 팃포탯처럼 협력 위주의 신사적인 프로그램이었다는 거다. 우리가 인지하는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배신이 횡행하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간단하다. 배신이 횡행하는 세계에 조금이나마 협력을 할 줄 아는 개체들이 나타나면 이들 상호간에는 협력을 통해 배신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개체들도 이들을 모방하여 협력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결국엔 협력하는 개체들이 대세가 되는 세계가 된다. 단 여기엔 아주 중요한 전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 상대를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충분히 커야 한다. 딱 한 번만 만날 사이라면 배신이 최선의 선택이다.
이 점은 회사의 임원들이 왜 그리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지를 시사한다. 어차피 2년 내에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전체 조직의 건강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즉, 임원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다.
협력은 개체 또는 집단의 선악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협력은 최선의 이득을 얻기 위해 상대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촉진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생존전략들이 경쟁하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기 이득을 최대화하는 전략이 살아남고 그것이 팃포탯이라는 걸 저자는 두 차례의 죄수의 딜레마 대회, 그리고 역사적 사례와 생물계의 협력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세상은 대개 제로섬 게임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호혜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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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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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학창 시절 우연히 보르헤스를 만나 시력을 잃은 그를 위해 4년간 책을 읽어 주었던 알베르토 망구엘. 대문호와의 교류 때문이었는지 그 역시 굉장한 저술가이자 독서가가 되었다. <독서의 역사>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고루함과 달리, 이 책은 단편적인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다양한 주제에 따라 써낸 방대한 에세이에 가깝다. 챕터 제목들만 봐도 ‘눈으로만 읽는 독서‘, ‘누군가에게 대신 책을 읽게 하기‘, ‘책 분류의 역사‘, ‘갇힌 공간에서의 책 읽기‘, ‘책 훔치기‘ 등으로 연대기적 서술과는 거리가 멀다.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이를테면 고대엔 지금처럼 소리내지 않고 읽는 묵독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글이든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낭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책장에 쓰여진 단어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데 반해, 큰 소리로 외쳐지는 단어는 날개까지 달고 훨훨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모친에게서 온 편지를 말없이 읽자 부하들이 당혹스러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알베르토 망구엘은 어마어마한 독서 편력으로 쌓은 엄청난 지식을 기막히게 풀어내어 절대 구글 검색 같은 것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 점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술 형태와 유사한데, 다카시가 논리적이고 냉철한 과학도라면 망구엘은 매우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인문학도의 느낌이다. 다카시는 절대 픽션을 읽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망구엘은 그 유명한 ‘픽션들‘을 지은 보르헤스의 제자 아니던가.
카프카가 말했듯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하고, 월트 휘트먼이 말했듯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은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프카는 1904년에 친구인 오스카르 폴라크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요컨대 나는 우리를 마구 물어뜯고 쿡쿡 찔러대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읽고 있는 책이 머리통을 내리치는 주먹처럼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왜 책읽는 수고를 하느냐 말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일까? 천만에. 우리에게 책이 전혀 없다 해도 아마 그만큼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들은 우리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단 말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던 이의 죽음처럼, 아니면 자살처럼, 혹은 인간 존재와는 아득히 먼 숲속에 버림받았다는 기분마냥 더없이 고통스런 불운으로 와닿는 책들이라구. 책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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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0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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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의 살인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오스만 궁정 화원의 세밀화가인 엘레강스가 우물 아래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책은 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를 쫓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지만, 그 속에서 예술과 종교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드러낸다. 젊은 시절 가 본 베네치아에서 초상화와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유럽 화풍에 매료되어 유럽풍을 가미한 화집을 만들자고 술탄을 설득하는 에니시테 에펜디. 위대한 장인들이 이어온 화풍에서 한 치도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는 화원장 오스만. 유럽의 원근법은 인간의 시점에서 본 세상, 즉 인간이 중심인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반면 조감도처럼 하늘에서 본 평면적 시선의 이슬람의 세밀화는 바로 신의 시선, 신이 본 세상을 그린다. 따라서 이 대립은 신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물음으로 치환된다. 여기에 에니시테 에펜디의 아름다운 딸 셰큐레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촌 카라, 오스만의 제자들인 올리브, 나비, 황새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밀화는 신이 본 세상을 그리는 것이기에 화가 개인의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화가의 서명은 물론, 붓 터치 하나 조차도 개성을 드러내면 안 된다. 개성을 억압받는 화가들의 내면엔 자기만의 스타일을 뽐내고 싶은 욕망과 전통과 종교에 위배된다는 죄책감이 충돌한다. 엘레강스의 죽음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 책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매 장마다 화자가 달라진다. 카라, 셰큐레, 올리브, 나비, 황새, 에펜디, 오스만은 물론이고, 이미 시체로 변한 엘레강스나 그림 속의 개, 나무 등도 화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시점의 전환이 독자에게 더할 수 없이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김영하가 <보다>에서 말했듯, 오르한 파묵은 어릴 적부터 철저히 유럽 문화에 경도된 교육을 받았다. 당연히 젊은 시절엔 현대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냈으나, 정작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나이가 들어 터키의 전통을 다룬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도 오스만의 전통과 새로운 유럽 문화의 충돌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군상이기에 <내 이름은 빨강>은 어찌 보면 오르한 파묵 개인의 일생을 바친 예술에 대한 고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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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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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김중혁의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근래 가장 유망한 젊은 소설가로 꼽히는 이이기도 하지만, 사실 김연수의 고향 친구라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겠다. 같은 학교 친구가 나란히 연예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그 좁은 김천 바닥에서 두 명이나, 그것도 친구 둘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난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읽고 나면 잘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하루키, 위화, 김연수의 단편들도 읽을 땐 감탄했으나 지금 기억나는 작품은 없다. 김소진도 마찬가지. 그런 내가 김중혁의 단편집 <악기들의 도서관>을 고른 건, 여름휴가 때 가족들과 묵었던 제주의 한 민박집에 꽂혀 있던 책이기 때문이다. 민박집 조그만 벽장엔 서울에서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하다 제주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민박을 치는 주인 아가씨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책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서 이 책을 골라 단편 하나를 읽어보고 한 번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내가 김중혁에 대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주 가는 합정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냉큼 사서 읽었다. 완독한 후의 소회를 말하자면, 나는 이 책과 잘 안 맞는 것 같다. 이 책의 단편들엔 <무방향버스> 한 편만 빼놓고 전부 음악이 주된 모티브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도 피아니스트, 공연기획자, DJ지망생 등 음악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작품들은 사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사건을 다루지만 그 울림이 가볍지만은 않다. 음악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음악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 타인과 세계를 판단하는 가치관으로 전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회적인 3~40대를 위한 동화 같은 느낌의 단편집이고 바로 그래서 내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고향 친구인 김연수와는 너무나 다른 작풍을 가진 소설가다. 김중혁의 장편을 읽어보고 계속 찾아 읽을지 판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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