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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평점 :
사람들은 왜 문구를 좋아할까? 문구는 정보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도구를 말한다. 왠지 좋은 문구류를 갖고 있으면 멋진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괜시리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소한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Gadget이랄까.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글씨를 참 못 썼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그나마 좀 삐뚤빼뚤하지 않은 글씨체를 갖게 되었는데, 그래서 필기할 때 색색의 수성펜을 썼었다. 색이 화려하면 글씨가 조금이라도 덜 못나 보이니까. 그리고 글씨를 큼직하게 쓰면 못 쓰는 게 확 튀어 보이니 되도록 작게 쓰는 버릇을 들였다. 글씨를 조그맣게 쓰려니 자연히 가는 펜을 써야 했고, 가는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 아마 이 때부터 생긴 것 같다(샤프도 0.2mm를 쓰고 만년필도 EF 촉을 쓴다).
잉크가 번지지 않는 매끄럽고 두꺼운 종이 위에 촉이 가느다란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을 써 나가면 별 것 아니지만 묘한 보람이 느껴진다. 위에서 말한 지적 허영심의 소확행이랄까. 이 <문구의 모험>은 비단 필기구 만이 아니라 클립, 컴퍼스, 접착제, 스테이플러, 포스트잇 같은 문구류까지(연필, 지우개, 볼펜, 만년필 등의 필기구도 당연히 들어있지만) 다룬다. 이 책의 시작은 저자가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들러 어릴 때부터 다니던 문구점에서 골동품에 가까운 문구 정리함을 사면서 시작된다. 보통은 문구점에서 펜을 살텐데(나도 문구점에 가면 신기하고 독특한 펜이 뭐가 나왔나부터 살펴 본다),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오래된 문구함에 매료되었다는 것부터가 저자가 범상치 않은 문구 덕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대체로 문구의 발전사를 다룬다. 특정 문구류를 누가 처음 발명했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떤 홍보 전략을 썼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지를 말한다.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신기한 지식들의 모듬회 같은 거랄까. 거기에 저자의 문구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으니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아무리 IT 디바이스가 발전하더라도 아날로그의 보존성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아이패드에 애플 펜슬로 필기하는 게 익숙한 시대가 되었지만, 나는 오늘도 언제 다시 읽을지 모르는 글을 로디아 노트에 만년필로 끄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