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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1952년의 어느 봄날, 촨둥의 작은 마을에서 여인이 세찬 강물에 떠내려 온다. 정신을 잃고 급류에 휩쓸린 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여인을 구한 마을 사람들은 근처 부대의 병원으로 그녀를 옮겨 치료를 받게 한다. 보름 남짓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던 그녀는 마침내 깨어났으나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다. 억지로 기억을 되살리려 하면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몰려올 뿐이었다. 그녀를 치료한 우 의사는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이름을 잃은 여인에게 딩쯔타오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녀가 혼수상태일때 가끔 “딩쯔!”라고 외쳤고, 그녀가 병원에 있던 봄에 복사꽃이 막 필 때라 타오(桃)를 붙여서 지은 이름이었다.
안정을 찾은 딩쯔타오는 우 의사의 소개로 군관구 류 정치위원의 가정부로 들어가 일하게 된다. 딩쯔타오는 전근과 승진을 거듭한 류 정치위원과 그 가족을 따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어느 날, 전역한 우 의사가 과거 상사인 류 정치위원에게 인사를 오게 되고, 우 의사가 부인과 사별한 것을 안 류 정치위원이 딩쯔타오와 우 의사를 중매서게 된다. 결혼한 둘은 아들 하나를 낳고 아들의 이름을 칭린이라고 짓는다.
칭린이 아직 어릴 때 우 의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생계가 막막해진 딩쯔타오는 다시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게 되고, 열심히 일해 칭린을 대학까지 보낸다. 칭린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취직 후 열과 성을 다해 출세길에 이른다. 마침내 장샤에 가정부와 기사가 딸린 근사한 저택을 마련한 칭린은 연로한 딩쯔타오를 모시고 와 아무 걱정없는 행복한 여생을 선사하려 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새 집으로 이사온 날 밤 딩쯔타오는 촨둥에서 구출되기 전의 기억이 담긴 끔찍한 악몽을 꾸고, 그 길로 식물인간처럼 외부의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게 된다. 딩쯔타오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잘 짜여진 미스테리극처럼 보이는 이 소설에는 중국 현대사의 어둡기 그지 없는 역사가 숨어 있다. 마오쩌둥 치하 중국의 여러 사건 중 끔찍하기로는 문화대혁명이 첫손에 꼽히지만, 이 책의 소재인 토지 개혁 또한 만만치 않게 참혹했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보면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처음으로 시행한 게 토지 개혁이었다. 국민당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공산당의 승리를 완성하고 중국 전 인민에게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게 마오쩌둥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대장정 이전 농민봉기로 촉발된 소작농들의 폭력성에 매료된 바 있었다. 친족 중심으로 똘똘 뭉친 중국의 농촌 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주와 소작농으로 나누어 전면적인 계급 투쟁으로 몰고 가야 했다. 농촌 각지에서 공작조가 결성되어 투쟁대회를 열어 지주를 비판하고 숙청하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처형했다. 그것도 같은 마을에서 한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이 말이다. 지주로 지목된 이들의 재산을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자 투쟁대회는 마녀사냥의 양상을 띠게 된다. 설령 재산이 많지 않더라도 지주로 지목된 이는 무조건 처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중간 쯤부터 딩쯔타오가 사실 지방 유력 가문인 루씨 집안의 며느리였다는 게 밝혀진다. 루씨 집안은 항일 투쟁을 지원하고 공산당의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했지만 토지 개혁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투쟁대회 전날 루씨 집안은 딩쯔타오 - 그녀의 원래 이름은 후다이윈이었다 - 와 그녀의 어린 아들 팅쯔를 제외한 전원이 치욕을 당하느니 자살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저택의 화원에 각자 묻힐 자리를 판 후 비상을 먹고 자리에 누워 죽음을 맞는다. 딩쯔타오는 슬픔에 겨운 채 그들 한 명 한 명을 흙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녀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아들을 잃고 기억도 잃는다.
이 책의 제목 <연매장>은 이처럼 관 없이 맨땅에 묻히는 것을 의미한다. 연매장을 당하면 환생하지 못한다는 미신 때문에 당시 중국인들은 연매장을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체높은 가문의 사람들이 연매장을 선택할 정도로 공산당의 토지 개혁은 비인간적이었다. 폐쇄적인 체제가 얼마나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중국 정부가 금서로 지정할만 하다.
서너 페이지의 짧은 챕터 70개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꽤 정교하다. 딩쯔타오와 우칭린, 류 정치위원의 시선이 시시각각 교차하고, 딩쯔타오가 시간을 거슬러가며 기억을 되찾아가는 기법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그 비극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우연에 의존하고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모호한 결말을 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앞서 읽은 김유태의 <나쁜 책>에 소개된 팡팡의 또 다른 작품 <우한일기>를 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