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자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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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 벗어난 주인공과 ’본‘은 원래 있던 곳인 미국이 아니라 파리를 망명지로 택한다. LA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장군의 딸인 라나와 하룻밤을 보낸 걸 장군에게 들킨 이상, 주인공에게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프랑스인 신부와 베트남 소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에게 있어 프랑스는 아버지의 나라였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자애롭지도, 본받을만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의 의형제 ‘만‘의 당고모 - 파리에 사는 공산주의자 지식인 - 는 프랑스를 주인공의 아버지에 빗대어 이렇게 일갈한다.

“네 아버지는 식민주의자이자 소아 성애자였어. 그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식민지화는 소아 성애증이야. 아버지의 나라가 불운한 어린 학생들을 강간하고 성추행하지.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거룩하고 위선적인 미명하에 그 모든걸 자행해!”

주인공과 ‘본‘은 난민 수용소에서 연을 맺은 갱단 두목 ’보스‘를 찾아가 몸을 의탁한다. 주인공은 갱단의 일원이 되어 당고모의 살롱에서 알게 된 지식인들을 통해 해시시와 필로폰을 판매한다. 그는 위험천만한 갱단의 사업과, 지독한 반공주의자 친구 ‘본’과, 자본가가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이중간첩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파리 뒷골목 마약상으로 탈바꿈한 주인공의 삶은 대체 어디까지 흘러가는 걸까?

비엣 타인 응우옌이 전작인 <동조자>에서 베트남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두 이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허망한 실체를 다루었다면, <헌신자>에서는 베트남이 가진 모든 문제의 뿌리인 프랑스 식민주의를 직접 타격한다. 사회주의자입네 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번드르르한 사상의 껍데기와, 그네들의 모순된 원초적 욕망과, 한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인종주의로 가득한 속내를 말이다. 그들은 지독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자유, 평등, 박애의 목소리로 프랑스가 베트남에 가한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동조자>가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펼쳐지는 스릴러였다면, <헌신자>는 잔뜩 흐린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느와르물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주인공의 수다는 여전히 유쾌하고 재기 넘치며, 전작에 버금가는 긴장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하지만 <동조자>만큼의 걸작이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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