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시작한 불은 책으로 꺼야 한다 - 박지훈 독서 에세이
박지훈 지음 / 생각의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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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이 책엔 어떤 주제를 떠올린 뒤, 그에 걸맞은 책을 찾아 읽고, 내 나름의 감상이나 논평을 곁들인

글들이 담겨 있다."(10쪽)

저자가 말하려는 바를 이미 정한 뒤, 그에 맞는 적절한 책을 골랐다는 점이 독특한 책이다. 주제를 먼저 정했기 때문에 책의 장단점을 평하기보다 책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자신의 생각이 통하는 인용문을 올리고, 관련 책들을 어울려 소개한다.

저자는 20년의 기자생활 중에서 3년 6개월간 출판 기자로 일했던 시기가 가장 행복했다고 전한다. 매주 200여권의 책을 읽고 그 중 서너 권을 골라 서평을 썼다. 그 공력이 느껴지는 것은 글의 일관된 구성이다. 각 에세이 마다 제목을 붙이고, 아주 읽기 편한 개인 에피소드를 도입부에 배치하고, 소제목을 달아 내용을 구분한다. 이 일련의 작업이 체화되지 않고서는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아주 자연스럽다. 황현산님의 에세이 스타일과 닮아 있어 반갑기도 하다.

책 한권에서 생각을 확장시켜 넓이와 깊이를 더한다.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간병에 관한 소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돌봄의 고됨을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이나, 목에 구멍을 뚫은 어린 자식을 간병하는 엄마의 돌봄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다. 다시 문미순 작가의 작품으로 돌아가서, 명주가 마지막에 은빛 요양원에서 탈출한 치매노인을 품는 것을 개인의 돌봄에서 '시민의 돌봄'이라고 돌봄의 범위를 확장하며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시민의 돌봄은 공무원이나 관련 기관이 아니라 이웃이 이웃을 챙기는 것이겠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널리 확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장 읽어보고 싶어진 책은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이다. '부모의 양육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 책이 상식을 뒤엎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오은영 선생이 문제아의 부모를 따끔하게 혼내는 장면을 보면서 부모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보다 또래 속 사회화 과정에서 더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집단 사회화'가 가장 활발한 시기가 초등학교 때이고, 서로 패를 지어 자기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한다. 논쟁적인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판단해보고 싶다.

기자의 책이라 딱딱한 서평을 예상했는데 부드럽고 섬세하고 개성있는 독서 에세이를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읽고 나면 소개한 책들과도 친해진 느낌이지만, 저자와도 뭔가 친근해진 느낌이다. 저자가 미국에서 1여 년 이 책을 쓰기 위해 읽고 쓰며 보내고, 시간이 되면 딸을 픽업하러 가고, 여름이면 도서관에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낸 추억이 따스하다. 김연수 작가를 여러번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고,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된 것도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다. 무엇보다 개인으로서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모두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저자의 마음이 책 전체에서 느껴진다.

이 책은 소개한 34권의 책이 흔하지 않음에서 매력있고, 그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수필집으로서도 좋고, '독서 에세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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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표본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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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조용하지만 서늘한 작품을 쓰는 미나토 가나에의 신간이다. 표지에 보이는 화려한 나비 표본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감도, 서늘한 제목도 자극적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색과 나비의 눈에 보이는 색은 다르다. 어린 시절 나비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시로는 평생 나비를 연구하는 곤충학자가 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나비를 표본을 만들어 영원히 간직하듯 가장 아름다운 여섯 소년들을 죽여 표본을 만든다. 그는 이 엽기적인 고백을 소설사이트에 올리고 자수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들 이타루의 여름방학 숙제는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또 하나의 반전은 진정한 범인이 누구인지 밝힌다.  


등장인물은 시로를 중심으로 화가인 아버지 이치로와 아들 이타루로 이어지는 부자 관계에, 화가 루미를 중심으로 어머니인 사와코와 딸 안나로 이어지는 모녀관계를 연결한다. 이치로는 '인간도 가장 아름다운 때를 표본하고 싶다'는 말로 화단에서 퇴출당하고 산 속 집에서 사와코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을 건네주는 날, 사와코의 딸 루미는 시로가 나비의 눈으로 본 색으로 그린 그림과 나비표본을 보고 놀란다. 세월이 흘러 시로는 나비 전문 곤충학자가 되고, 루미는 화가가 되어 다시 만난다. 색채 마술사로 불리는 루미는 병색이 짙어져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해 그림에 소질있는 아름다운 5명의 소년과 이타루, 딸 안나를 산속 시골집에 불러 모은다. 그러나 루미가 갑자기 발병을 한 탓에, 시로는 아이들을 각자의 집에 데려다 준다. 아이들은 개성에 따라 특정한 나비를 연상시킨다.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도 없이 인간표본과 만드는 과정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한다. 인간이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나비로 변한 소년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잔인하다. 신체의 일부를 자르기도 하고, 목을 잘라 반대방향으로 두기도 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기 위해 포즈를 고정한다. 배경을 그리고 사진을 찍어 남긴다. 글로만으로도 아름다움과 끔찍함이 전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좀더 가까웠다면 어땠을까. 시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나 엄마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액자에 넣어 방학숙제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말도 못 꺼내고, 엄마에게 작품을 넣을 상자를 달라는 말도 못한다. 그렇게 어른이 된 시로는 아들과 격이 없는 듯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에 대한 의심으로 비극을 초래한다. 대화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을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부자에게 엄마의 인정을 갈구했던 안나보다 이타루의 고백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결국 관계로 귀결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반면에 자식이 부모에게서 받는 영향은 얼마나 지대한지 드러난다.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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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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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저스틴 토레스(1980~)는 <암전들(Blackouts)>로 2023년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였고, 퀴어문학을 영미권 문학의 주요무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의학 박사조지 W.헨리의 글 대부분이 검은 펜으로 지워져있는 사진을 보게된다. 일부 단어와 끊겨진 문장을 통해 유추하기에 예사롭지 않은 내용에 긴장이 고조된다.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 역시 마커로 지워져 있다. 도대체 책 속의 이 책은 무엇일까? 궁금증을 갖고 읽다보면 이 책이 <성적변종들: 동성애 패턴연구>(1946)임을 알게 된다.

죽음을 앞둔 후안은 자신을 찾아온 젊은 화자에게 이 책을 전해주며 잰 게이의 이야기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한다. 화자는 10년 전인 17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후안을 알고 지낸 것은 단 18일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후안은 나이들어 죽어가는 처지이지만, 둘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화자는 10대 부부였던 백인엄마와 푸에르토리코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찰관이 된 아버지가 동료와 게이 사이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집을 나와 동성애자로 몸을 팔아 살아가다 정신병원에서 후안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목걸이를 받아 간직한다. 후안은 푸에르토리코인으로 어린 시절 레즈비언 커플인 잰과 제냐의 돌봄을 받는다. 제냐는 후안을 모델로 삽화를 그렸고, 잰은 300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성애사를 기록한 자료를 출판하고자 한다. 출판이 불가하자 디킨슨 의사를 찾아가 출판을 부탁하지만, 후에 조지 W.헨리 박사가 두 권으로 된 <성적변종들: 동성애 패턴연구>(1946)를 펴낸다. 그 책에는 잰의 노력이 언급되지 않았고, 동성애를 병리현상으로 치료되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제목 '블랙아웃들(암전들)'을 복수명사로 책 속에서 여러 가지 암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자가 자살시도를 하고 깨어나 여러 번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이나, <성적변종들: 동성애 패턴연구>에 검은 마커로 지워버린 문장들이나, 동성애자들을 정신병원에 가두어 치료하려고 했던 미국의 어두운 역사나, 어둠 속에 가려져버린 잰의 연구자료도 암전들이겠다. 또한 암전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후안이 죽기 전에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도 제목과 연결되겠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뚝뚝 끊겨서 시간과 장소가 자유롭게 왔다갔다한다. 이야기들의 조각조각을 읽다보면 게이인 두 사람의 인생이 보이고 레즈비언인 잰과 제냐의 인생이 보이고, 미국 역사 속에서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가 보인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여성과 푸에르토리코인,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들이 작품 속에 녹아있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비정상은 치료해서 정상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이 폭력적이다. 다양한 사람과 사랑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구성과 서술이 독특한 책이고 동성애에 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한 번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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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물고기 이야기 - 개정판
오치 도시유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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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청어와 대구의 어업사를 중심으로 다룬다." 15

책은 총 6장으로 되어있다. 1, 2장은 청어에 관해 3, 4장은 대구에 관해, 그리고 5, 6장은 청어와 대구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룬다.

육식만 했을 것 같은 서양은 18세기 농업혁명 이후에야 고기가 주요 음식으로 자리한다. 그 이전에는 생선 소비량이 훨씬 많았는데, 카톨릭 교회가 한해의 절반을 단식일로 지정하였는데, 고기는 금지하였지만, 생선은 허용했기 때문이다. 청어와 대구가 그 중심에 있었다. 회유어인 청어는 경로를 바꾸면서 유럽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었다. 13-15세기는 발트해 연안 도시 중에서 독일 뤼베크를 중심으로 결성한 한자동맹이 강력히 부상하다가, 15세기 이후로는 청어가 북해 연안으로 경로를 바꾸자 네덜란드가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반면, 대구는 회유어가 아니므로 같은 장소에서 잡히는데, 바이킹이 활동하던 시대부터 말린 대구로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17세기에 잉글랜드의 신항로 개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원동력이었고,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

청어가 중요해진 것은 중세 13세기 기독교가 확산되며 '피시데이'가 자리잡으면서이다. 인구도 급증하며 청어수요가 증가했다. 독일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 '한자동맹'은 청어의 가공,보존, 운송수단을 개발하고, 뤼베크는 북해와 발트해 무역 중계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청어가 북해로 이동하며 네덜란드가 급부상한다. 네덜란드는 연안으로 몰려오는 청어를 잡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나가 청어떼를 앞질러 조업을 했다. 기존 코그선 대신 새로운 바위스선을 개발해서 갑판에서 바로 염장을 해서 신선도를 높이고 적재량도 늘렸다. 암스테르담은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이고, 16세기말 막대한 부를 쌓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세운다.

대구는 스톡피시로 유명한데, 노르웨이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소금을 사용하지 않고 장시간볕에 말려 망치로 두드린 다음 물에 불려 요리한다. 사진을 보니 우리나라 덕장의 명태 같다. 이렇게 말린 대구(스톡피시)는 10세기에 장거리 항해를 했던 바이킹에게 적합한 식량이었고, 염장 대구와 함께 선원들에게 단백질 공급을 통해 장거리 신항로 개척을 가능하게 했다.

신대륙 미국에 관한 초기 역사가 흥미롭다. 잉글랜드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만 있었지, 할 수 있는 것도, 가지고 온 것도 변변치 않았다. 신대륙의 넓은 토지와 대구가 가득한 바다를 두고서도 굶어 죽어갔다. 소수만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원주민의 도움으로 첫 추수감사절을 지내게 된다. 인구가 늘어나고 대구잡이로 수익이 늘어나자 노예를 사서 설탕, 담배 플렌테이션을 한다. 뉴잉글랜드, 서인도제도, 서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하고, 말린 대구로 흑인노예를 사는데 지불했다. 셰익스피어는 <템페스트>에서 말린대구를 '부정한 생선'으로 은유하며 가혹한 식민정책을 비판했다.

네덜란드가 청어잡이로 큰 수익이 나자 국력이 강해지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듯이, 미국은 대구로 수익을 내며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다. 영국인은 젠틀맨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잉글랜드 어민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횡포는 신대륙 뉴잉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거칠었고, 통제되지 않았다. 이러한 공격적인 성향은 프랑스와 식민지를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가 세수를 늘리려는 잉글랜드 본국에도 격렬히 저항해서, 결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고, 승리했다. 잉글랜드 어민의 터프함이 미국의 바탕이 된 셈이다.

기독교와 물고기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과일과 허브만 먹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며 쫓겨났다. 기독교는 단식을 통해서 에덴동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카톨릭교는 금식기간에는 성욕을 일으키는 '고기' 는 금하고, 성욕을 누르는 '생선'은 허용했다. 이에 따라 생선의 수요가 확대되고 어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상승하였다. 반대로 종교개혁으로 피시데이를 폐지하자 어업이 쇠퇴하고 해군력이 약해지게 된다.

저자가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하나의 주제를 잡아 여러 도서와 논문을 읽고 책을 냈다는 것이 대단하다. 물고기에 의해 국가의 흥망성쇠와 헤게모니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물고기가 어떻게 세계사를 바꾸겠냐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읽다보면 저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엄연한 사실임을 인정하게 된다. 책 속에 처음 알게 되는 지식이 많을 뿐더러, 문체도 가벼워서 읽기 편하다. 어렵지 않게 흥미를 유지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매우 좋은 책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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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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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열린책들 '하다' 시리즈 중 '걷다'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다. 앤솔러지는 여러 작가가 하나의 주제로 쓴 글을 모은 작품집으로 주로 단편이 수록된다. 5명의 작가(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의 작품 5편( '없는 셈 치고', '후보', '유월이니까', '유령 개 산책하기', '느리게 흩어지기')을 담았다.

'걷는다'는 것을 제목에서 정면으로 드러내는 '후보'나 '유령 개 산책하기'와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작품 속에 스며있다. 뒤로 걸으면서 옛 일을 회상하는 '후보'와 죽은 개의 유령과 산책하면서 개 유령이 보이는 사람과의 만남 이야기인 '유령개 산책하기'를 비롯해서, 고아로 고모 가족과 함께 살지만 고모에게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없는 셈 치고', 방패연을 죽은 아내라 여기는 남자를 우연히 만나면서 깨닫게 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유월이니까', 산책이 한자로 '느리게 흩어지기'라는 뜻이고 제목으로 삼은 작품까지 모두 참신하고 독특하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김유담 작가의 '없는 셈 치고'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선화를 고모 가족이 받아준다. 동갑의 고모 딸 민아는 일탈을 일삼으며 사고를 치는 반면 선화는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모범적으로 자란다. 어려서 고모를 엄마라 부르고 싶어했지만 고모는 냉정하게 아니라고 정정해준다. 그런 고모가 나이들어 유방암에 걸리자 행방을 알 수 없는 민아 대신 선화가 고모를 돌본다. 병원에서 선화가 딸이냐는 질문에 고모는 정정하지 않는다. 엄마없는 아이라는 것을 들키기 싫었듯, 고모도 자신의 처지를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늘 거리를 두는 고모를 보면서 선화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서로의 입장이 바뀌자 고모처럼 하지 않는 선화의 마음이 대견하다.

'걷는다'는 행동이 밝고 역동적인 것과는 달리 수록된 작품들은 상실과 외로움을 표현한다. 단편이지만 캐릭터를 통해 각기 다른 작품 속에서 상실과 외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고모에게 엄마의 사랑을 구했지만 받지 못한 선화, 퇴물이 된 듯한 철물점 주인 근성, 아이를 잃은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 남편, 죽은 개를 잊지 못하는 화자, 불륜과 불법을 버젓이 저지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명길. 단절된 사회 속에서 잠시 남의 이야기를 들은 듯, 그 이야기에 어떻게 조언을 해 줘야 좋을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들이다

여러 작가들이 '걷다'라는 하나의 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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