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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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선선해졌다. 아침 저녁으로 느껴지는 대기의 차가움과 냄새에서 그간의 고생이 끝나간다는 안도와 동시에 이렇게 나의 여름도 멀어져 가는구나라는 탄식도 흘러 나온다. 계절의 흐름. 유독 올해는 겨울부터 모든 계절을 타고 있다. 겨울에는 추위 만큼이나 감성도 희망도 얼어붙더니, 봄에는 개화에 덩달아 부풀어 올랐다가는, 여름엔 무성한 밭의 잡초처럼 자라난 고뇌에 힘들어 했으니.... 이제는 또한번의 가을을 어찌 버텨내야 할지.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지어 나르는 뇌명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 하는 가슴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 (18쪽)

슈낙의 책으로 올 가을을 일찍 맞는다. 위대한 개츠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It was an extraordinary gift for hope, a romantic readiness˝(그것은 희망에 대한 비범한 재능이자, 낭만적인 준비성이었다). 화자가 개츠비를 평한 한 문장이었다. 슈낙의 책을 읽자니 슈낙이 그 책에서 말했던 개츠비가 아니었나 싶었다.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돌아가신 아버지며, 고향의 풍경이며, 어린 시절 내 자신, 가족들, 친구들 등등이. 아버지는 마흔 일곱에 돌아가셨다는 것, 그 유전자가 정확히 계승되었다면 나의 생도 몇년 남지 않았으리라는 우울한 생각까지도.

˝숱한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한 통. 편지에는 무슨 사연이 씌어 있는가? ˝아들아, 너의 소행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나의 소행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릇된 행동, 불량한 성적, 어니면 무슨 복잡한 연애사건, 거짓말, 또는 치기어린 개구쟁이 짓이었을까? 아, 그 숱한 허물들은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 시절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채우셨던 것이다.˝ (10쪽)

그 많던, 천진난만했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그들도 나처럼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혹여 삶의 무게로 버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농부가 되어 기억 속에서 라틴어의 시구를 뿌리며 경작하는, 아니면 은행원이 되어 모험을 갈구하던 젊은 날의 웅대한 꿈을 장부의 차변과 대변 속으로 녹아 없애버린 친구들, 머릿속에는 반항과 고집, 뜨거운 동경과 설렘으로 꽉 차 있던 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차례차례 더듬어보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103쪽)

몇일전 직장 어린 여성 후배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감수성 결핍을 책망한 적이 있었다. 슈낙의 책을 읽자니 정작 내자신도 그간 감수성을 상당 부분 잃고 산 게 아닌가 자성하게 된다. 꽃, 나무, 숲 등 자연이며 지나간 사랑과 옛 우정까지,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저리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란......더욱이 독일말을 이처럼 아름다운 모국어로 옮겨낸 역자(차경아 교수)에게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나의 글이 얼마나 저질이었던지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각오도 생긴다 ˝그래 이런 감수성으로 내 이 가을 온몸으로 맞아주리라˝ 라는.

˝어린 시절의 체험과 꿈의 안식처였던 수목들은 이제 갱목이 되어 마치 무덤으로 들어가듯, 땅속에 들어가 썩어 가닥가닥 분해되어버릴 것이었다. 만물은 이렇듯 흔히 번거롭고도 긴 도정, 나쁜 길, 멸망의 길, 몰락과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 만물의 모습을 더럽히며 변질시키고, 굴복케 하며 파괴시키는 그런 길을. 역시 이것은 당위이며 태초부터 그래 왔던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운명이다. 억압과 신고, 악과 고뇌로 이루어진 천 갈래의 인간의 운명도 이와 무엇이 다르랴.˝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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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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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올 땐 구름이 조금 끼어 있는 정도였는데, 이젠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기세다. 태풍이 다가오는 중이라서 그런지 몇일 무더위가 이어졌고, 몇일 후면 어찌되었건 한동안의 고난은 일단락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야 과학적인 예보 체계가 있다지만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근간의 날씨에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하다. 짐작컨대, 너무 덥다고 비라도 오길 바랬을 터이고 막상 태풍이 닥쳐 다 키워놓은 작물이 쓰러지는 모습에 본인들의 인내심 부족을 후회했을 성싶다. 이런 와중에 그리모(Helene Grimaud)가 연주하는 브람스 파아노 협주곡 1번을 듣고 갑자기 울컥해졌다. 연주 중간중간에 흘러나오는 연주자 본인의 탄식과, 신음과 거친 숨소리. 예술은 창작자의 고뇌에서 비롯되고 청자는 그로부터 위안을 받는 법. 세상에는 공짜란 없다. 이런 감정의 전달과정을 보더라도....... 여기까지가 휴일 아침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는 도중 머리속에 떠오른 단상(斷想)들이었다.

성경을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노동이란 죄를 범한 인간에 신이 내린 형벌이다. 매일같이, 영겁의 세월동안 반복될 것 같은 무의미를 향해서 시시포스처럼 회사라는 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내 자신의 입장에서는 백번 천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가끔 나 조차도 일이 많고 바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의식 저변에는 일 자체보다는 그만큼 자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우쭐함이 깔려 있을 터이다. 그러한 점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일자체는 누가 말했듯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는 개인적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20~21쪽)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20쪽)

실상 나 자신도 가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버는 목적이 쉬기 위해서, 결핍으로 궁색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망각하고 휴가도 인간관계도 적당한 씀씀이도 일 때문에 희생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모든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일정량 소비하게 되어 있다. ...... 먹고 자는 데 따르는 대가로 뭔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 정도 선이라면 근로의 의무를 받아들여 마땅하다. 그러나 오직 이 정도까지만이다.˝(23쪽)

최근에는 여러 고민거리가 가시지않고 삶의 의욕도 바닥이 나서 오직 일에만 집중했다. 잊기 위해서 일분일초도 일에서 눈을 떼지 않는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같은 사무실 사람들의 의심과 견제의 눈초리에 온 몸이 데였고, 허리 통증도 심해져 주말엔 한의원으로 출근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인생은 살아가기 쉽지 않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사실을 회피할 순 없었다.

˝인생 전체를 달콤하고 유쾌하게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불유쾌한 부분들에 적합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238쪽)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33쪽)

이러다보니 내 심성도 많이 왜곡되어 가고 있음을 많이 깨닫는다. 이유 모를 짜증과 분노가 아무 관련없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일어나는 형국을 보니 말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소심한 성격 탓에 외부로 표출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 어쩌겠는가. 다행이 내가 마르크스나 무솔리니나 히틀러처럼 큰 인물은 아니니 사회에 해악은 끼치지는 않은 점에 위안이라면 위안을 할까.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는 너무도 많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다 해도 적의가 터져나오지 않는 여유있는 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다˝(164쪽)

˝파시즘은 자유방임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정돈된 믿음 체계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감정적 항변에 불과하다. 현대 경제의 발달로 고통받는 소상공인 같은 중산층들의 감정과 권력을 사랑한 나머지 과대망상증에 걸려 버린 무정부주의적 산업계 우두머리들의 감정이 그 축을 이루고 있다˝(168쪽)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의 독서 분량과 짜증지수는 정확히 양의 상관관계를 이루어 왔다. 책이 없었더라면 난 지금까지 살고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요즘에는 다시 독서량이 많이 늘었다. 한편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만큼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커졌다는 반증이기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처럼 책을 놓을 수 없다. 러셀의 책을 읽는 와중에 나처럼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며 책에 의지하는 동료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말이지, 가급적 어려우면서 제일 쓸데 없는 책을 선택해.˝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편(37~52쪽)을 읽은 후 나온 충고였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 이러한 지식(일견 무용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51쪽)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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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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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갖고서 시작했던 한주도 다시 실망으로 끝난다. 불면증은 반복되고 사람과 주위환경에 대한 희망도 약해졌다. 조금, 아니 많이 실망했다. 그러려니, 남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왔고 이 책을 읽고서 그런 마음이 더 강해지기도 했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섭섭함은 억누를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만으로도 버겁다. 그러니 자신들의 무게까지 내게 얹혀주지 않길 혼자 간절히 바랬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白戰不殆)˝라는 옛말이 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읽어본적이 없어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누가했든 이 말에서 새삼스레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한다. 언제나 위태롭지 않기 위해서는 내 주위를 알고 그다음 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환경이며, 그 이후에야, 그 속에서 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자아의 정체성이란 독립적인 측면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자아‘ 감정을 키우라는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197쪽)

그래서 항상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 조건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다하는 것, 설령 실망과 답답함으로 귀결되더라도 그것이 나를 찾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불가해함에 맨몸으로 맞서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했던 성실한 인간의 표상이며 프롬이 이 책에서 단언하는 ‘인간 본질‘의 요체인 것이다.

˝나 자신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이 어느 정도는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고 본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지능을 넘어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하지만 설사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47~48쪽)

그러나 알기 위한 마음 자세는 이해 대상의 순서와는 역순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나 꼭 그렇지 않다. 주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서 이해와 인식과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가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법이다.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굳이 정체성을 찾아 무엇에 쓰겠는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73쪽)

그렇다면 이제 방법만 남는다. 인식하는 능력을 갖추어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관해 프롬은 세가지 조건, ˝감탄의 능력˝, ˝집중력˝, ˝갈등과 긴장의 수용력˝을 제시한다.

˝(감탄 능력) 어떤 대상에게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의 힘으로, 그야말로 응답의 능력을 가진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192쪽)

˝(집중력)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여기 지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이다˝(194쪽)

˝(갈등 및 긴장의 수용력) 우리는 인간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하지만 짧은 생애 동안 이 가능성 중에서 미미하게 작은 부분밖에는 실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예방조치를 취하지만 우리의 의지와 계획과 전혀 무관한 우연에 지배당한다. 우리는 이런 갈등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심오하게 경험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정으로 수용해야 한다. 부인하거나 지적으로만 경험할 경우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인 체험밖에 할 수 없다˝(199~200쪽)

지난주말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흡사 프롬이 내 옆에 앉아서 내 귀에 대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전율에 몸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래 이틀에 걸쳐 찬찬히 나눠 읽어가면서 스스로를 많이 되돌아봤다. 특히 각성하게된 계기는 다음의 문구에서 주로 기인하였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101쪽)

과연 내가 원했고 원하는 것이 무얼까?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만 맴돌았다. 현재까지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내 삶이 내가 진정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다는 것, 말하자면 어쩌다보니 이렇게 흘러왔다는 것이다. 남은 삶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계속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갈 생각이다. 설령 질문만 하다가 생이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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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출판사 책이 있는데.....김석희씨 번역, 게다가 양장본. 사냐 마냐 이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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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신이 되어라 - 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엮음 / 부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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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은 책이다. 요즘 들어 독서력이 늘어난 것인지 세월의 힘인지, 기존에 읽었던 많은 책들이 지금에 와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옴을 많이 느낀다. 니체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이고, 특히 박찬국 교수가 번역하거나 풀어주는 그의 사상이 가슴에 많이 와 닿았었기에 이 책 역시 예전에 일독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 시점은 지금과 비슷하게도 삶이 의욕이 한껏 꺾여있을 때이지 않았나 싶다. 예전에 읽은 기억으로는 각각의 잠언이 낱알처럼 고유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느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전체적으로 종합되고 결국엔 큰틀에서 하나의 일관된 말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더 좁게는 개인의 인생에서 삶의 이유와 방향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주제가 무엇있겠는가. 지식 또는 물질의 풍요를 확보하는 방식 등과 관련된 문제라고 해봤자 결국 실현 가능의 여부로 귀결될 사안이라면, 삶의 이유와 방향에 관한 문제란 나의 존속과 직결되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 어떤 다른 사안에 비해 중대하고 시급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분야에 관해, 이 사안에 관해서만 진실하고 끝없이 몰두했던 대표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인생의 황금기에는 두통과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려 교수직도 버릴수 밖에 없었으며, 종래에는 45세 나이에 광증으로 삶까지 잃었던 그였기에 그럴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일견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의 말 속에서 그러나 나는 무한한 긍정과 무쇠처럼 단단한 강인함을 발견한다. 자신의 병까지 수긍하고 고양의 계기로 삼는 저 고귀함이란......

˝나의 병약함에 힘입은 바가 건강에 힘입은 것보다 훨씬 많지 않은가. 보다 높은 건강, 그 때문에 죽지 않는 한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은 건강을 나는 이 병약함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50쪽)

자신의 삶을 실재했던 범례로서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당대와 후세의 사람들에게 부과한 저 막중한 삶의 규율이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일 하나하나가 행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 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최종적이요 영원한 인증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너 자신과 인생을 사랑해야만 할 것인가?˝(246쪽)

다시 나는 내 삶과 그간의 고뇌를 되돌아본다. 과연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 관점이라는 것이 내가 보는 나였던가 남이 보는 나였던가. 지금 느끼는 왜소함이란 내가 자초했던 것, 내가 느꼈던 것 이상은 아니지 않았나. 그만큼 내 자신 속 깊은 곳에서 생의 의지가, 힘에의 의지가 쇠퇴해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내가 택한 방식은 운명애이다. 앞을 향해서도 뒤를 향해서도 모든 영원에 걸쳐서 하나도 변경을 요구하지 않는 일.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을 은폐하지 않고 견딜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일.˝(249쪽)

영원회귀 사상에 영감을 주었던 실바플라나 호수가의 피라미드처럼 육중한 바위 앞에서 니체가 느꼈을 감정에 관한 박찬국 교수의 해석도 아름답다.

˝‘피라미드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란 영원회귀의 운명을 의연하게 견디면서 자신의 강력한 힘을 즐기는 자의 불요불굴의 자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영원회귀 사상은) 그것을 실존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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