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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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린 괜찮아

지은이: 니나 라쿠르

옮긴이: 이진

펴낸 곳: 든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 방 한편에 쌓아둔 책. 소녀는 홀로 남은 기숙사 방 침대에 올라선다. 아마도 벽이 있을 그곳엔 고향 집에서 마린이 즐겨 찾던 바다가 펼쳐진다. 마린과 메이블의 추억이 있는 그곳, 엄마와 아빠가 만났던 그곳, 엄마가 자신을 꼭 안아줬을 그곳, 젊은 시절 그 바다를 한껏 누비다가 할아버지가 마린을 홀로 두고 영원히 잠든 그 바다. 겨우 지탱하듯 서 있는 마린의 뒷모습이 하염없이 안쓰러워 가슴이 저릿하다.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린. 넌 지금 울고 있니?

 

 

 

 미혼모였던 어머니를 어린 시절 잃은 마린은 줄곧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서로의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며 나름 행복하게 살던 마린. 그런 마린에게 메이블은 유일한 단짝이자, 소울메이트이자 진짜 사랑이었다. 할아버지의 위스키를 몰래 챙겨 나왔던 새벽, 마린과 메이블은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에서 서로를 따스하게 감싸 안고 입술을 포갠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던 그 순간, 그저 인간이 한 인간을 좋아하는 그 느낌이 낯설거나 싫지 않았다. 뉴욕으로 대학을 가게 된 마린. 할아버지는 이미 두 학기분의 등록금을 완납하고 앞으로 마린이 사용하게 될 생활비를 담은 현금 카드를 내민다. 대학을 가면 메이블과 멀리 떨어지게 되는 상황. 하지만, 이런 이별을 원한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바다에서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끝으로 더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린에게 닥친 놀라운 진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차게 마린을 잠식한다. 할아버지가 숨겨왔던 비밀. 경찰서 뒷문으로 빠져나간 마린은 그 길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뉴욕으로 떠난다. 아직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어 발길 닿는 대로 잡은 모텔은 마치 인생의 실패자들만 모인 듯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그 후 무사히 대학교로 간 마린은 룸메이트 한나를 만나고 차츰 생활에 적응하는 듯하지만, 마린에겐 고향에 두고 온 집과 아직 정리하지 못한 메이블과의 관계가 남았다.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마린에게 연락했던 메이블. 춥디추운 겨울, 기숙사에 홀로 남게 된 마린을 메이블이 찾아오며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소설은 시작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회상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잔잔한 리듬 속에 마치 원래 그랬다는 듯이 힘을 빼고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게 되는 이야기. 그렇게 난 마린이란 아이의 아프지만, 잊지 못할 소중한 시절을 함께했다.

 

 

 

 

 

 

 

'나는 나의 외로움이 두려웠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기막히게 속였던가.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기막히게 설득했던가. 난 슬프지 않다고, 난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사랑했던 할아버지가 두려웠고 할아버지가 낯선 사람이었다는 게 두려웠다.

내가 할아버지를 너무도 미워한다는 게 두려웠다.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는 게.

그 상자들 안에 있는 것들과 언젠가 내가 알게 될 것들, 그리고 그 상자들을 잊고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내가 잃을 수도 있는 기회가.

서로의 방문을 열어보지 않고 살았던 우리의 방식이 두려웠다.

서로를 결코 편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거짓말들이 두려웠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내게 했던 거짓말들이.

식탁 밑에서 우리의 다리가 부딪쳤던 게 아무 의미도 없을까 봐 두려웠다.

빨래를 개어놓았던 게 아무 의미도 없을까 봐 두려웠다.

차와 케이크와 노래들,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을까 봐 두려웠다.

...

할아버지가 나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봐 두려웠다.' - p251~253

 

 

 

 소설 끝자락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마린의 진심에 가슴이 먹먹해 한참을 쓸어내렸다. 그래, 넌 많이 외롭고 두려웠겠구나. 메이블이 돌아간 빈 기숙사에서 우두커니 있는 마린을 보며 지독한 고독과 저릿한 아픔을 느꼈지만, 이런 고통도 잠시. 읽으며 펑펑 울어버린 감동적인 순간이 등장한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려고 마린을 찾아온 메이블의 가족. 그리고 메이블의 엄마가 마린에게 전한 진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멀고 먼 곳에서 태어난 타인이 서로 만나 너와 내가 되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며 가족이란 이름으로 손을 잡는다. 너무나 간절했기에 더 두려웠을 마린. 그런 마린을 놓지 않고 지킨 메이블. 마린을 딸로 받아들인 메이블의 엄마. 그들이 빚어낸 인생의 모든 순간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슬픔과 고통마저도 어떤 편견이나 잣대 없이 있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 드러내지 않아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던 건 독자가 마린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막히게 섬세한 문체로 표현해낸 작가의 필력 덕분일 거다. 청소년 문학이라지만, 여느 멋진 소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깊이 있고 탄탄하며 잔잔한 울림을 주는 작품. 『우린 괜찮아』, 이 멋진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분명 우리의 만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거다. 머지않아 난 이 책을 또 펼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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