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 여행
브라이언 트레이시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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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브라이언 트레이시 하면 자기계발의 고전 중에 속하는 글들을 써 온 작가로 알고 있다.

자기계발서 분야를 어른대다 보면 접하게 되는 이름인 것이다.  익숙치 않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즈음에도, 분연히 도서관에 들러 책들을 집어든다. 결과는 일주일 연장하고도

이틀 연체.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일상의 감이 붙었고, 책들을 읽어가고 있다. 이제 나다,

나로 돌아왔다, 라는 느낌이 든다.

 

 

자기계발서에는 여러가지 형식이 있을 것이다. 자서전 형식으로 쓰기도 하고, 소설이나

우화의 형식을 빌리기도 한다. 평범한 서술도 물론 있다.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강의의 형식을 빌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신선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자주 읽는다. 행복처방전이라고.

의욕 백신을 맞는 거라고 친구와 장난삼아 말하기도 했다. 나라는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아래로

치닫는 인간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끌어올려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중간

비슷한 곳을 얼마쯤 비켜갈 수 있다. 어쩌면 정당성을 담보하려는 이런 말이 구차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문득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여러 가지 책이 있고, 수많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다양한 책들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쩌면 역지사지를 해 볼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런 건 왜 보는 거야?

왜 읽는 거야? 왜 사는 거야? 하는 설익은 의문들.

 

 

어쨌든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이 자기계발서는 일단 여행기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자못

독특하다. 이책을 빌린 이유에는 저자의 이름이 약간의 몫, 사실은 역자의 이름이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이 책의 한 대목으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것이다.

원전이 자못 궁금해졌다.  제목이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다. 무슨 내용인지. 주인공은

스무살에 여행을 떠났고, 그게 인생을 바꾸었다. 이 친구는 스무살에 아프리카로 무작정

떠날 목표를 세우는데, 모험에의 욕구라는 점 말고는 그 동기가 내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금에 시달리고, 굶주림과 피로와 이질의 고통까지 겪는 이 여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거야? 집에 가!

타인의 취향에 이어, 타인의 욕구마저 존중해야 하는 모양이다. 어떤 책을 몰입해서

불편하지 않게 읽으려면. 아니면 내가 벌써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는지도

모르지. 하긴 스무살에도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걸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막을 건너고, 싸우고, 자전거를 탔다가 걷다가 기차를 탔다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서까지 여행을 가는 모습들이, 낯설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는지도.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라는 나의 질문은, 어쩌면 책의 제목을 까맣게 잊은 질문이었는지도.

 

 

저자는 이 여행을 감행함으로써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도전한다는 것. 불확실하고

어렵기만 한 목표를 밀어붙인다는 것. 그 과정에서 목표를 수정하고, 모험의 속살을

체험하고, 마침내 성취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장애물이, 십자가가, 고난이, 어려움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문제는 이 어려움에, 난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태도의 문제. 실수와

혼란 속에서 배우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힘을 얻는 것, 때로는 애초의 목표에 무리가 있음을

깨닫는 것, 무엇보다도 뜨겁고 험난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는 것.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 자, 나는 어디쯤 있지? 이미 나의 사막을 건너왔던가? 또 다른 사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다면 사막 어느 구석에쯤 오아시스도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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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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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컴 백 투 스리 파인즈. 도무지 범상한 살인사건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은 스리 파인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람이 죽고, 또 가마슈가 사건을 해결하러 등장.

  가장 어처구니없고 멍청한 방식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한 여성이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 그러니까 컬링 대회에서였다. 그 자리에는 죽은 사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진기자까지 있었다. 스틸 라이프, 조용하고도 고요하게 삶은

  흘러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 전작에서와 같이 이 작품에서도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우선 제목..제목이 또 그렇다. fatal grace.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치명적인 은총이란다.

  은총이 치명적이라니. 그 치명적인 은총을 관통하는 소재가 살인 사건이라니. 그리고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화두이자 코드가 바로 be calm이다. 사람이 죽고 온 마을이

  뒤숭숭하고 사건은 온갖 미심쩍음 투성이언데, 차분하라고? 진정하라고?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냉정을 찾으라고?

 

 

  작품의 서두에서 중점적으로 내 눈길을 끈 사건은 이렇다. 다정하고 섬세해 보이는,

  하지만 명민한 무명화가 클라라가 백화점에서 이 기분나쁜 여성, 그러니까

  살해당한 여자에게서 모욕을 당한다.

  니 작품은 형편없다는, 그야말로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다.

  이 치명적인 모욕을 당한 클라라는 하지만 백화점을 벗어나기도 전에 절실한 구원이자

  은총을 입는다. 나는 니 작품을 사랑한단다, 라는 아름다운 한마디였다. 이 말은

  백화점 앞의 노숙자가 한 말이다. 클라라는 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아니 신이 자신을 위로하러 온 거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두 여자가 무관한 듯 죽는다. 한 사람은 클라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다른 한 사람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은총을 선물했다. 이 두 죽음의 보고서가 가마슈의

  손에 들어간다. 가마슈는 별개인 것 같은 두 사건을 동시적으로 조사해 나간다.

  그리고 그 유사성을 찾아낸다. 두 사람은 바로.....이 중 한 여자를 죽인 사람은...

 

 

  루이즈 페니라는 저자의 미스터리를 읽는 건 이런 느낌이다. 모닥불이 있어야 한다.

  따듯한 차와 음식도 있으면 좋다. 꼭 필요한 건 따듯함이다. 그런 다음에 들려오는

  건 담담하고도 차분한 목소리, 평화롭게 일상을 이야기해나간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움직임이 일어난다. 무관한 사건들이 서서히 다가온다. 움직임은 살인을 기점으로

  폭발하고, 별개인 듯한 일들은 하나로 얽혀진다. 처음에는 텔레비젼 화면을 돌려보는

  듯한 장면이 이어지지만, 아 꿰어맞추면 하나의 정교한 작품을 이루는 퍼즐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이 작가의 놀라움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아무

  상관도 없이 각기 진행되어 가는 사건들을 어느 순간 하나로 만들어 우리 앞에

  펼친다. 자, 이거야, 봐. 짠! 좀 헷갈렸지? 이 사람이 범인인가? 그렇다면 좀 시시한데?

  아니었구나, 앗.... !! 마음을 늦추었다가 당기는 작업이 반복된다. 아, 혹시 지금

  이 작가가 우리한테 밀당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자, 이쪽으로 와... 아니.. 그쪽

  말고 저쪽...안심시켰다 싶으면, 어느 순간 쾅 하고 뒷통수를 친다. 방심은 금물이다.

  이런 게 사실은 삶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라고, 방심하지 말라고, 한쪽으로 마음을

  몰아가지 말라고, 조금 더 차분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라고.

 

  왜 그 아이는 상처받았 을까, 그녀는 하필이면 왜 거기에 있었을까,

  그녀는 왜 그토록 자신을 위장하려  했을까, 세 사람은 왜 그리도 절실히 뭉쳐 다녔을까.

  무엇을 그렇게도 열심히 보호하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다른 한쪽 편에는

  자신이 뭘 그리는지도  모르는 채 치명적인 은총의 장면을 그려가는 화가 클라라가 있다.

   저자가 한 단어 단어 고르며 심어가고, 한 장면 한 장면을 배열하고 글을 펼쳐나가는

  동안, 저자의 분신과도 같은 클라라는 그림을 그린다.   조심스럽고도 사려깊은 붓질.

  그녀가 그리는 작품의 주제는 치명적인 은총 앞에서도  "Be calm" 하라는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의 앞에 놓인 삶은 결국은 치명적일 수도 있고, 결국은 은총일 수 있는 것이니까.

  어느날엔가 들었던 "삶은 소중하고도 힘든 거에요" 라는 말처럼, 이 책은 

  그렇게 삶의 두 얼굴을 동시에 우리에게 일깨워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삶이라는 치명적인 은총 앞에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라고도. 

  삶을 이야기하는 죽음. 묵묵하면서도 저 깊은  편에 따듯함이 배어 있는 이 소설은 

  서로를 죽이고 또 살리는 어머니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에게는 은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 모를 삶이 흘러가는 동안,

  스리 파인즈 마을을 감싸는 세 그루 소나무는  이 모든 사연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이 잊혀진 마을의 기억을 옹이 하나하나에마다 새겨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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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과 연초가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다.  모닝페이지는 커녕, 간단한 다이어리도

남기기 힘든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 그 속에 끌려다니는 나.

하지만 마음이 지치면 몸은 두배로 지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이틀의 만남은

참 좋았다.

 

 

2일부터 친구에게 직구를 맞았다. 강직구였다. 그 친구는 그런 직구를 던지고

친구 한 명을 잃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물론 타격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나를 생각해서, 내가 좋아서 한 말이라면 그렇다. 예전엔 그걸 몰라서 참 많이 싸웠는데

그러고 보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의 연습이란 생각도 들어. 그래서 한달도 채 안 돼

만났는데 즐거웠다. 예전처럼 다시 웃고, 직구를 두고 태연히 농담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격려를 받았다. 나는 성의를 보였고 그 친구는 그 성의를

잘 받아주었다. 아마 우리의 우정은 한 단계 성장한 것 같다. 무언가를 감당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모든 감당에 얻음이 따르는 것은 아닌가.

 

 

그런가 하면 요즘 같은 시기에 했던 어떤 실수에도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덕분에

한가지 더 조심하는 점을 배웠다. 다른 이들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적어도

지적받은 상황에서는. 도무지 쉽게 배울 수 없는 걸 가르쳐 주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을

만나게 하는 인생.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 거겠지. 피곤하지만 고맙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우선은 내가 믿는다. 나부터.

 

 

그리고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법. 함께 일하고 웃는 법. 서로 맞지 않는 걸

조정하는 법. 서로 다르지만 좋은 점을 발견하고 배우려는 법. 뭐 그런 것들을

연습하고 익혀나가고 있다.10년 전만 해도, 지금이 좋다라는 것이 불안했다.

그런 자격이 없는 것만 같고, 곧 뭐가 잘못될 것 같고 그랬어. 힘든 사람들도 많은데

나만 좋으면 되나 싶기도 했어. 그리고 그게 전부인 줄만도 알고 철없이 굴었던

것도 사실이지. 철은 지금도 없겠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걸 하게 되고서부터는, 서툴게 조금씩 익숙해져가고부터는

또 난 달라지고 있다.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선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헤쳐내 왔고

그리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기다리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이 행복하다고,

좋다고 인생은 아름다워~~ 룰루~~ 또 이런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분명 또 좌절도

하고 시련도 겪고 실망도 하고 그러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난 몸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든 이겨낼 거고,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거. 연을 좇는 아이, 라는 책에서도 그랬다.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책에서 읽는 것도 좋았지만, 직접 겪고 또 믿는 것도

중요하겠지.

 

 

어떤 전반적인 좋은 기운을 느낀다고 하아~~ 행복해요~~ 이런 건 아니다.

여전히 난 고민하고, 여전히 난 어렵고, 여전히 난 괴로워하고, 어떤 때는 하아

하는 한숨과 고뇌같은 거.. 뭐 난 그런 인간이니까. 하지만 좋은 흐름을 갖고

좋은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하는 거니까, 더 중요한 구심점을 바라보는 법을

마음 속에 넣고 있으니까 향해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좋아요. 자, 다시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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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처럼 소중한 고객님들의 신상이 팔려가나고 난 후에도 다시 아침이 밝았다.

  왠일로 꼬박꼬박 할당량을 지키고 있나 했더니만 그저께부터 스케줄이 꼬이기 시작.

  피곤한 심신을 부여잡고... 미친 수다 판을 벌이는가 하면... 느닷없이 몇 년 전에

  간 콘서트들의 추억을 찾아다니는 가운데, 성큼 밝은 일요일 오전.

 

 

  집에서도 꼭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야 한다던 어느 남정네의 말이 실감날 만큼의

  햇살을 맞으며 나는 어제의 대화를 곱씹고 있노라. 몇달 전의 어떤 조각들.

  나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은 전혀 모르는 것들. 좀 허무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런 느낌이다. 원래 타고나기를 오해 대마왕이라 혼자 이런 저런 뚱딴지

  같은 각본을 잘 쓰긴 하지만 그땐 이런 거였어, 라는 류도 아니고 아예 전혀

  몰랐다니 아...네..... . 이렇게까지 제대로 오해였음을 확인당한 건 처음이라...

  아주 좋은 가르침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날 새벽엔가

  또 소설 쓰고 있을 때, 그날의 확인사살을 떠올려 봐 라고 내게 일깨워 줄 수 있는 거다.

 

 

  앗.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제의 우울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거다. 그리고 어떤 변화에 대해서도. 금요일에 무리를 했고,

  어떤 구석들이 날 괴롭혔고,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또 애를 쓰고,

  모든 무리와 애와 괴롭힘이 침대에서 나를 짓눌렀고

  그래서 토요일 오전 무렵에는 다시 아른아른했고 그런데도 꾸역꾸역

  다시 밖으로 나가 방긋거려야 했고 방긋거림 속에서 나는 참 운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걸 문득 느꼈고 그러다가 다시 엄청난 추위를

  여름용일 게 틀림없을 것만 같은 스타킹으로 고스란히 맞아야 했고

  거의 질주하다시피 하는 마을 버스에서 다시 우울함이 고개를 들었고

  푸른 새벽의 보옴이 오면, 을 들으며 나는 왜 이 슬픔을 껴안을 수 없는가를

  생각하고 백미터 달리기에라도 나간 사람처럼 전속력으로 달려 집으로

  돌아왔고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간단한 상황 보고를 드리고

  그리고 방에 갇혀서 부스럭거리며 책인가를 밀린 일감인가를 뒤적거렸고

  그러다가 어떤 대화를 맞았고, 술 몇 잔 들이키며 하듯이 오래

  이야기했고 그러다가 신데렐라 타임이 지나갔고 다행히도 좀 푸욱 잔 것

  같지만 아직도 많은 군데가 욱씬거리고 있고 간신히 커피를 마시고 있고

  심경이 어쩐지 복잡들쑥하여 이런 말들을 끄적대고 있고.

 

 

  그러니까 약간의 꿈틀거림으로 지난 며칠을  다독이려는 참. 

  평소보다는 약간은 더 치달았던 리듬이 가라앉아

  평행선으로 진입하려는 즈음.

  이것이 내게 익숙한 일상이라는 안온한 느낌. 귓전에 명쾌발랄하게

  울리는 음악, 모두 내가 고른 음악들.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책들. 나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이 적힌 달력이며 노트며 프린트들. 이 철저한 나 같고

  나 다운 것들. 다섯달 차에 접어들어 어느덧 눈에 익은 풍경들,

  아스라한 산의 능선이나 오목조목 다가오는 녹빛 같은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느 한 순간. 느린 듯 빠른 듯

  찰랑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어느새 감감해져

  단어를 지우고, 한번씩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시간이랄까.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적인 일상 속으로.  

 

 

  미묘한 듯, 결론은 다시 긍정이다. 위에서 왜 변화라는 단어를 썼지,

  결국은 평소대로 돌아오는 건데 하고 생각해서 주춤거렸는데

  아 우울함에서 평온함으로의 변화로구나.... 라고 거슬러 거슬러 보다 알다.

  참... 언제나 글은 나를 앞질러 가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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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명색이 살인 사건 수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인데 제목이 저게 뭐니..너도 참...

 본 제목은... 살해를 당한, 작품 주인공인 제인 닐의 묘비명에 적힌 문구임을 밝힙니다.

 C.S. 루이스의 책 제목이기도 하죠.. 이 책을 올해의 첫 리뷰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구태여 밝히지 않도록 하고...

 

 

 아...길다... 항상 장편소설을 읽을 때면 드는 생각은, 그러다가 어떤 시점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표현이 난감한데..그러니까...쑥 들어가는 시점이다. 처음에는 내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사람들은 누구고, 여기는 어디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떤

 분위기이고, 이들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고를 직접 익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걸

 장편을 읽는 수고라도 불러도 좋겠다. 수고에 상응하는 대가... 예기하는 기쁨..

 그걸 얻기 위해 한 장씩 버텨나간다. 그런 다음 그 시점이 온다. 물론 좋은 책일 경우의

 이야기다. 이 시점이 오는 때는, 사실 "예기치 못한 기쁨" 이라는 표현에 걸맞다. 그런

 순간이 오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오는지는 알 수 없다. 가히 신비롭기까지.

 이미 들어가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작품이 날 부른다. 낯선 공간과 시간이, 정서가

 내 것이 된다. 영화를 보면 이 순간은 좀 더 빨리, 편하게 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미지에

 약하니까. 하지만 언어에는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좀 더 힘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더 값지기도 하다. 요새는 일부러 애를 써서 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한다. 애를 쓴 다음에 얻는 환희를 알지 못해서는 아닐까.

 

 

 

 자, 이제 작품 속으로. 누가 죽는다.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해결사가 등장한다.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마을 사람들을 탐문한다.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은? 그러고 보니

 이 자도 수상해... 하지만 아니었고, 아니었다. 알고 보니 범인은.... 아... 그리고 제인의

 죽음은..... 이 소설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스틸 라이프라는 제목에서 사용한

 단어에서처럼 소설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살인까지 일어났는데도 정적이다. 저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은 조바심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뭐하는 거냐고, 지금?

 이런 대화는 왜 나오는 거야? 라고 느낄 수도. 하지만 어쩌면 이건 줄을 팽팽하게 당기려는

 저자의 수법인지도 모른다. 차오를 때까지...끊어지기 직전까지... 자... 조금만 기다려봐...

 그리고 차분하게, 다름아닌 자신의 범행이 밝혀질지 모르는 벽지를 뜯어나가는 살인범의

 손길처럼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함께 비밀의 그림을 보고 싶은 클라라는 발을

 동동 구른다. 왜 이렇게 더딘 거야... 이때의 클라라의 심정은 어쩌면 독자들의 마음과

 같지는 않을지. 자, 더딘 호흡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또 장황하게...

 

 

 그럼 이제 제인 닐 이야기를 해야겠다. 제인 닐이 누구냐고?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죽음을 맞았던 여주인공이라고 해두자.

 그림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은 화가 지망생이고, 선하디 착한 여교사이기도 하자.

 그리고 이 두문장에서부터 살인의 단서가 출발한다.

 제인 닐이 공개하게 될 그림과, 수사를 더욱 묘연하게 만드는 그녀의 선량함.

 제인의 그림 속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풍경과 일상이, 그녀의 추억과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평범한 것 같다면,

 잠시 아르망 가마슈 경감이 오래 전에 들었던 비유를 빌어보자.

 

 

 

 인생을 산다는 건 롱하우스에서 사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한쪽 끝에서 아기로 들어가 때가 되면 반대쪽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 크고 긴 방을 통과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가 그 방에서 우리와 함께 산다.

 과거의 일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과 화해할 때까지 모든 사람,

 생각, 행위는 그 방을 통과하는 내내 우리를 괴롭힌다. 그리고 그 중에 정말로

 목소리 크고 밉살스런 것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까지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내린다.

 

 

 

 제인의 그림은 이 롱하우스와도 같은 것이다. 그녀가 들어가 산 크고 긴 방과도

 같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을 보는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림 속에 저마다의 롱하우스를 만난다. 염소로 묘사된 루스 자도라는 시인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클라라는 사랑하던 친구의 온기 앞에서 뭉클해진다.

 그리고 살인범의 눈에는 목소리 크고 밉살스런 무언가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행동 지침을 내린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지침을.

 

 

 좀 싱거운 것 같지만...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루이즈 페니라는 작가의 롱하우스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다소 뒤늦은 나이에 이 작품으로 등단했다. 제인처럼 오랜 꿈을

 접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펼친 것이다. 제인의 날개는 죽음으로서 펼쳐졌지만,

 작가의 날개는 삶 속에서 비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독자들은 작가가 펼쳐 놓은

 롱하우스와도 같은 글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괴롭혀 왔던 목소리를, 스스로를 지배하는 어떤 행동지침을,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이

 극적이고 웅장한 추리소설 시리즈라는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난다. 혹은,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은 어쩌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 누가 죽었고,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고, 죽음을 찾아내는 행위를 주로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 추리 작품은 다르다. 살아 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롱하우스를

 통과하는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죽어서까지 저마다의 살아감은

 가까이에, 어쩌면 더 멀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불러일으키는가를.

 

 

 화가를 죽이기까지 했던 그림은 그녀가 죽어서도 사람들을 움직인다.

 결국은 자신을 죽인 사람을 찾아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했다.

 제인은 죽었지만, 자신의 그림에는 생명력을 불어놓았던 것이다.

 작품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숨죽이게 하고, 감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고,

 궁금하게 하고,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한숨을 짓게 만든다.

 아, 이게 끝이구나. 그리고 이제는 기다리게 만들 것이다. 이번에는

 예기하고 있을 기쁨을 만날 그날을 말이다.

 

 

 지나치게 추리소설 리뷰답지 않은 리뷰가 되었지만, 리뷰라는 것은

 "자신에게 감흥을 일으킨 어떤 목소리" 를 되살리라는 행동 지침에

 따르라는 요구라는 말로.... 이만 줄이련다. 양보다 질이라 했건만,

 역시나 질보다 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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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 2014-01-1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 작품과 관련해 제대로 언급하지 못한 점은, 스틸 라이프라는 제목의 의미, (still life goes on...쯤? ) 왜 묘비명이 "예기치 못한 기쁨" 이 되었나, 가마슈를 비롯한 수사팀 캐릭터, 스리 파인즈 마을의 상징성, 살인범이 왜 그림을 보고 제인을 죽이게 되었는가, 그 문제의 그림은 무엇이며 밝혀지는 과정 등.... 일텐데 제대로 분석할 능력도 없거니와...지면 관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