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쟁 - 우리말 우리글 5천년 쟁투사
김흥식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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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쟁 / 김흥식 / 서해문집 / 2014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훈몽자회>를 집필한 최세진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은 엄밀하게 말하면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이 아니라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재정리한 언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왜 나는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까?

어쨌든 최세진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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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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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있는중에 댓글 쓰는건 처음인데 주제와 상관없이카레르의 글솜씨만으로도 읽어볼만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중에 소장하기위해 직접 구매했다. 앞으로 아껴가며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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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침공(Jupiter attacks)

 
 
외계인들의 침공이 시작된 지 3일째다. 지구인들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평  

소 지구방위대처럼 설쳐대던 미국은 전쟁만은 피해야한다고 평화지상주의를 외쳐대다가 가장 

먼저 외계인들에게 점령을 당했다. 망할 놈의 대갈장군 같은 외계인들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 줄

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틀 동안 공중에서 폭탄들을 떨어뜨리더니 이제는 비행선을 착륙시키고 

수색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전투방법은 지구에서도 전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왜 지구를 공격하고자 마음을 바꾸었을까? 우리의 지구는 더럽게 아름답고, 어지러울정

도록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는 행성이 아니던가. 내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

지의아버지의아버지때부터 우주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조용히 자전과 공전주기를 지

켜오지않았던가? 하기야 전쟁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로 일어난다면 그건 전쟁이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고 자

부해왔지만, 가본적도 없는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 날아온 생명체에 의해, 레이저 광선총에 맞아 

죽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우습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니.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피식 피식 웃음이 삐져나

온다. 어쩌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보았던 SF영화의 여운일지도.


   옆집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꿈은 아니다. 젠장, 이젠 정말 죽는구나. 이 죽음

의 도시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더욱이 숨을 곳도 없다. 이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 때인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던 죽음이 이제는 코끝에 앉아 있

다. 조금 있으면 한눈에도 외계인처럼 보이는 녀석들이, 저 문을 박차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올 것

이다. 그들이 들어왔을 때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 내가 지구인을 대표해서 

당당하고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자, 마음을 진정시키자. 이럴 땐 음악이라도 들으면 조금

은 편안해 질지도 모른다. 전기가 끊겨서, CD플레이어에 스피커를 연결했다. 플레이어 안에 어

떤 곡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순간에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도저히 생각할 수 없

었다. 평소에 죽는 순간 듣고 싶은 음악 Top 5 같은 것이라도 생각해 두었으면 이럴 때 편할 텐

데. 염병할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것이 택시와 후회라는 녀석이 아니던가.


  play버튼을 눌렀다. 하나, 둘, 셋.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호라, 팻 매스니 Offramp앨범이다. ‘타

인의 취향’이라는 영화에 삽입되었던 ‘Au Lait'이라는 곡을 찾다가 구입하게 된 앨범이다. 팻 매

스니를 들으니 그를 좋아했던 친구 녀석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죽었다면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였기를...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음악이다. 볼륨을 조금 더 올려본다. 이런 순간에도 음악이 귀에 들

려오다니.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순간 번쩍이는 빛이 귀 옆을 스치는가 싶더니 뒤쪽에 

있던 책장을 후벼 파는 소리가 들렸다. 외계인들의 광선총이 문에 바람구멍을 낸 후, 책장에 꽂

아둔  필립 K, 딕의 책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그 광선이 내 머리에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원래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편인데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을 상상한다는 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크리스마스에 웬 악몽 같은 일이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금방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정말 웃

기게 생긴 외계인이 총을 겨누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게 총을 겨누었다. 그래 빨리 쏴라. 그 대

신 조금 덜 아프게 쏘아다오. 그런데 총을 겨누던 외계인이 방아쇠를 당길 생각을 하지 않고, 눈

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찾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눈앞에 보이는 적을 처리하고 나서 볼 일을 봐야 되는 것 아닌가? 이 녀석

은 도대체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기나 한 거야 뭐야.



    잠깐 동안 가만히 서서 방안을 둘러보던 그 외계인은 총을 내려놓고 갑자기 스피커 앞으로 다

가갔다. 그러더니 아직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스피커를 부둥켜 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지나

자 동료들이 들어왔다. 처음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경계의 눈빛을 보이더니 이윽고 그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스피커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피커를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음악 앞에서 무장해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확

실한 것은 우리의 팻 매스니가 외계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

이지만 팻 매스니의 음악만이 아니라 모든 음악이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 것은 비밥(Be-bop)이었다.




  이제 다시 지구는 ‘평화’를 되찾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화’라기보다는 원래대로 지구

인들끼리 치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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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새벽 1시경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장소와 집까지 거리는  걸어서 30분정도 걸리는데, 운동 삼아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집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이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별빛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넓은 우주 속에서 우리는 너무 고립된 존재들이라는 생각과

저 끊임없는 공간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누구말대로 이 우주에 우리밖에 살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큰 공간 낭비가 아닐런지...

 

 10분 후면 도착한다.

 

귀속으로 울리는 스탄 겟츠의 연주를 듣는다.

이따금씩 입으로 악기소리를 내면서 그들의 연주에 끼어들곤 한다.

흉내 내기 쉬운 소리는 색소폰과 드럼이다. 그렇다고 똑같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고 혼자서만 기분을 내는 정도.

 

겟츠의 'Autumn leaves'에 맞추어 나도 중간 중간에 심벌즈를 두드려본다.

 

치치치 추추추 치치추추 치치칙…….

겟츠가 흐뭇한 모습으로 나의 연주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들의 세션에 끼어드는 순간 공간과 시간은 어그러지고 일그러져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게 된다.


신호등이다.

차량운행은 뜸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빨간 불 앞에서 멈춰 선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모범 시민인것이다. 아니면 강박의 노예이든지.

 

멍하니 신호등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쪽에서 인기척이 있기에 흘낏 쳐다보았다.

사람이 서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다.

 

갑자기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처럼 빠르게 주절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음악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확인 하고픈 생각도 들었지만 마침 파란불이 켜져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의식하며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눈앞에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들어온다.

터파기 공사를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뼈대를 세우고 벽돌을 쌓아 올렸다.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힘이여.

그런데 건물의 내구성은 공사기간과 반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글쎄 모르지 정확한 데이터가 없으니.

공사 기간이 빠르면 부실공사일 것이라는 생각도 나의 편견일지 모른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배고픔은 더욱 뼈에 사무친다. 빨리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고 싶다.

목표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상대적으로 급해지기 마련이다.

 

조금 가다보니 왠지 등 뒤에서 누가 다가오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소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무언가 가까이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바로 육감이라는 것이다.

감각기관에 의지하지 않고 영적으로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

 

동네 강아지나 다른 동물은 아닌 사람이 있는 듯하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돌아보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느낌을 무시하고 계속 걷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돌아볼까 말까를 고민했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일 확률이 얼마나될까?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나의 등을 짓누르는 듯 한 기분이 들더니 곧바로 중심을 잃고,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얼굴이 땅과 마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본능일 것이라고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아련하게 전해오는 異物感. 신경세포들이 부지런히 그 이질적인 존재를 분석하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절대로 녹이 슬지 않는다는 그 혁명적인 쇠붙이가 지금 내 척추를 비집고 들어와 있다.

씽크대안에 가지런히 놓여있어야 할 그것이, 지금은 번지수가 다른 곳에서 다른 용도로 놓여있다.

놀랍게도 그 순간에도 대뇌는 활발히 움직이며, 수많은 생각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쓰지도 않았던 나의 자서전 한 권이 파노라마처럼 나의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고통은 순간적이고 곧이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함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흙냄새다.

참으로 정답구나. 본래 내 고향은 흙이었다지 아마.

 

심장은 이다지도 빠르게 고동치는데 색소폰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과 음사이가 알래스카와 뉴질랜드만큼 멀어지고 있다.

 

다음은 씽코페이션이 와야 하는데..............겟츠, 연주 좀 똑바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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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가장자리에 걸터앉았고 그녀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터운 커튼을 좌우로 펼쳤다.
호텔의 가장 높은 층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창문을 열자 전형적인 도시의 야경이 들어왔다.
야경과 함께 움찔 할 정도의 늦가을 선선한 공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 창문을 닫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른 한쪽 창문마저 열기 시작했다. 추우니 당장 창문을 닫으라고 하기에는 배려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언제 말을 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순간 그녀는 열려진 창문틀 위로 올라가 걸터앉았다.
당황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나의 예측을 많이 벗어났다.
창턱에 앉은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살짝 들썩이는 듯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나의 생각을 조금씩 앞서갔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때 그녀의 다리가 위로 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어떤 저항이나 두려운 표정, 비명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그녀는 창문 밖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 생각이 중지된 채 나는 창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1년 전 쯤에 나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여자친구에게 ‘홀수 강박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홀수를 좋아 하는 게 아니라 짝수에 집착한다는 의미에서의 강박증이다.
홀수를 보면 초조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1, 3, 5. 7. 9...는 싫고 2,4, 6, 8.....이 좋다고 했다.
남자친구도 1명은 싫고 2명이 좋다고 했다.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맞다 농담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것이다.
상처받았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약간 휘청거리며 살아온 건 맞다.

1년은 짧은 시간이다. 아니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나고 나면 짧은 시간이고 다가오는 건 긴 시간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과실주처럼 본래의 씁쓸함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효가 되어 달콤함이 남게 되기도 한다. 어떤 기억은 생채기가 되어 시간의 틈 속에서 물때처럼 눌어붙어 있다가 존재를 드러낼 기회를 엿본다.
젠장, 흉터는 상처의 묘비명일 뿐이다.
이렇게 문장은 박력 있고 단호하게 쓸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노래가사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 지길’ 바랐다.

우연은 없다. 오직 인과만 있을 뿐. 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결과와만 부딪히게 되면 우연이라는 원소들이 모여서 순간을 이루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하필 그날따라 친구에게 자동차를 빌려주게 되어 아울렛 매장으로 가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구입한 버튼다운셔츠가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작년에 구입한 셔츠랑 똑같은 색깔이라 다음날 반품을 하러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전날 구매하면서 평소 같으면 프라이스 택을 제거하고 영수증도 그 자리에서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만큼은 택도 떼지 않고 영수증도 비닐 백에 고이 접어 보관을 해 두었다. 계산대가 네 군대정도 되는 대도 한참을 기다린 후 반품처리를 했다.

매장을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 앞에 가던 여성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코트주머니에 넣다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진 손수건을 손에 쥔 채 그 여성을 불렀다.

“저기 손수건 떨어 뜨리셨는데요”
“아....감사합니다.”

그 상황에서 흔히 할 수 있는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제 갈 길로 가다가 우리는 매장 옆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카모마일 차를 시켰고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루해서 커피숍에 비치된 단행본 한 권을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이었다. 좀 두꺼웠지만 제목이 끌려서 마음에 들면 직접 구입해서 읽을 생각이었다. 서문을 읽고 목차를 훑어볼 때 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손수건의 주인이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었다.
치즈 조각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생각난 듯이 말을 건넸다.

“어떤 책 읽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저도 얼마 전에 그 책 읽었어요”

그녀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책의 앞부분에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녀는 어느새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우울은 결함의 한 종류일까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나의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화를 통해 그녀는 활자중독자이며 30대 중반의 직장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책 이야기를 하며 급격히 대화에 빠져들었고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근처에 있는 세계맥주 판매장으로 가서 스타우트와 KGB를 마셨다.

만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머리끈으로 무심한 듯 뒤로 묶고 화장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남자로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얼굴, 악세사리는 전혀 하지 않고 계절에 맞지 않게 얇아 보이는 면티셔츠와 이를 상쇄하려는 듯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몸에 붙는 청바지 때문에 몸매가 대충 가늠이 되었다.

처음 보는 여자와 이렇게 빠르게 친숙해 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보드카를 좋아한다고 했다. 위스키처럼 향이 강하지 않아서 다른 술과 섞어 마시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맥주도 보드카를 섞은 종류를 좋아했다. 나는 맥주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마셨다. 어느 덧 테이블위에 빈 맥주병이 열 병정도 세워져 있었다. 그 중에 두 병이 내가 마신 맥주였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 마시자고 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기 때문에 술집들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호텔에 가서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편의점으로 가서 앱솔루트 보드카와 스프라이트와 칵테일얼음을 샀다. 안주로 치즈와 비스켓을 샀다. 편의점을 나와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된 듯 붉으스럼했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살짝 비틀거리며 걸었다. 나는 아직 확실치 않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충만해져 있었고 이에 호응하듯 심장은 지나치게 엇박을 타기 시작했다.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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