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가장자리에 걸터앉았고 그녀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터운 커튼을 좌우로 펼쳤다.
호텔의 가장 높은 층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창문을 열자 전형적인 도시의 야경이 들어왔다.
야경과 함께 움찔 할 정도의 늦가을 선선한 공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 창문을 닫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른 한쪽 창문마저 열기 시작했다. 추우니 당장 창문을 닫으라고 하기에는 배려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언제 말을 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순간 그녀는 열려진 창문틀 위로 올라가 걸터앉았다.
당황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나의 예측을 많이 벗어났다.
창턱에 앉은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살짝 들썩이는 듯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나의 생각을 조금씩 앞서갔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때 그녀의 다리가 위로 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어떤 저항이나 두려운 표정, 비명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그녀는 창문 밖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 생각이 중지된 채 나는 창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1년 전 쯤에 나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여자친구에게 ‘홀수 강박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홀수를 좋아 하는 게 아니라 짝수에 집착한다는 의미에서의 강박증이다.
홀수를 보면 초조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1, 3, 5. 7. 9...는 싫고 2,4, 6, 8.....이 좋다고 했다.
남자친구도 1명은 싫고 2명이 좋다고 했다.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맞다 농담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것이다.
상처받았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약간 휘청거리며 살아온 건 맞다.

1년은 짧은 시간이다. 아니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나고 나면 짧은 시간이고 다가오는 건 긴 시간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과실주처럼 본래의 씁쓸함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효가 되어 달콤함이 남게 되기도 한다. 어떤 기억은 생채기가 되어 시간의 틈 속에서 물때처럼 눌어붙어 있다가 존재를 드러낼 기회를 엿본다.
젠장, 흉터는 상처의 묘비명일 뿐이다.
이렇게 문장은 박력 있고 단호하게 쓸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노래가사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 지길’ 바랐다.

우연은 없다. 오직 인과만 있을 뿐. 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결과와만 부딪히게 되면 우연이라는 원소들이 모여서 순간을 이루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하필 그날따라 친구에게 자동차를 빌려주게 되어 아울렛 매장으로 가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구입한 버튼다운셔츠가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작년에 구입한 셔츠랑 똑같은 색깔이라 다음날 반품을 하러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전날 구매하면서 평소 같으면 프라이스 택을 제거하고 영수증도 그 자리에서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만큼은 택도 떼지 않고 영수증도 비닐 백에 고이 접어 보관을 해 두었다. 계산대가 네 군대정도 되는 대도 한참을 기다린 후 반품처리를 했다.

매장을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 앞에 가던 여성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코트주머니에 넣다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진 손수건을 손에 쥔 채 그 여성을 불렀다.

“저기 손수건 떨어 뜨리셨는데요”
“아....감사합니다.”

그 상황에서 흔히 할 수 있는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제 갈 길로 가다가 우리는 매장 옆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카모마일 차를 시켰고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루해서 커피숍에 비치된 단행본 한 권을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이었다. 좀 두꺼웠지만 제목이 끌려서 마음에 들면 직접 구입해서 읽을 생각이었다. 서문을 읽고 목차를 훑어볼 때 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손수건의 주인이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었다.
치즈 조각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생각난 듯이 말을 건넸다.

“어떤 책 읽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저도 얼마 전에 그 책 읽었어요”

그녀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책의 앞부분에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녀는 어느새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우울은 결함의 한 종류일까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나의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화를 통해 그녀는 활자중독자이며 30대 중반의 직장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책 이야기를 하며 급격히 대화에 빠져들었고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근처에 있는 세계맥주 판매장으로 가서 스타우트와 KGB를 마셨다.

만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머리끈으로 무심한 듯 뒤로 묶고 화장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남자로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얼굴, 악세사리는 전혀 하지 않고 계절에 맞지 않게 얇아 보이는 면티셔츠와 이를 상쇄하려는 듯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몸에 붙는 청바지 때문에 몸매가 대충 가늠이 되었다.

처음 보는 여자와 이렇게 빠르게 친숙해 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보드카를 좋아한다고 했다. 위스키처럼 향이 강하지 않아서 다른 술과 섞어 마시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맥주도 보드카를 섞은 종류를 좋아했다. 나는 맥주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마셨다. 어느 덧 테이블위에 빈 맥주병이 열 병정도 세워져 있었다. 그 중에 두 병이 내가 마신 맥주였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 마시자고 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기 때문에 술집들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호텔에 가서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편의점으로 가서 앱솔루트 보드카와 스프라이트와 칵테일얼음을 샀다. 안주로 치즈와 비스켓을 샀다. 편의점을 나와 호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된 듯 붉으스럼했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살짝 비틀거리며 걸었다. 나는 아직 확실치 않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충만해져 있었고 이에 호응하듯 심장은 지나치게 엇박을 타기 시작했다.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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