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스피노자 철학 읽기
이수영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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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Spinoza)“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듣게 되는 이름이다.

”에티카(Ethica)“
스피노자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책이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 마치 한 번은 읽어본 듯한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다.

”왜 이렇게 유명하지?“ 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펼쳤지만, 다음 페이지까지는 제주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렇게 어려운 책이 왜 이렇게 유명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이 책을 이해한 사람은 또 얼마나 존재할지도 궁금해진다.

개념 자체도 만만치 않은데 기하학적 방식의 논증 방법은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달리 더욱 낯설게 할 뿐이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에티카>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해설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해설서가 절실하다.

<에티카>가 철학사에서 워낙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에 많은 연구서와 해설서가 출판되었다. 그중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저자는 당연 들뢰즈이다. 많은 철학자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스피노자의 적자(嫡子)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코 들뢰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설서 역시 어렵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에티카>에 다가가기 위해 여러 방향으로 두드린 결과 가장 적당한 가정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의 저자인 이수영이다. 이수영의 이 책을 읽고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한국인이 썼다는 것이다. 번역된 글이 아닌 모국어로 쓰인 책 중에 이렇게 훌륭한 결과물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에티카>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수영의 책을 선물로 주거나 추천을 하고 있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된 책이다.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개념을 창출하는 철학자들이 더욱 많이 나와주길 기대하며 아울러 좋은 번역서나 해설서들이 출판되길 기대한다.

<에티카>의 내용 중 가장 인상이 깊은 부분은 이수영의 책 제목에도 나왔듯이 스피노자 철학의 긍정성이다.

”나는 ‘기쁨은 정신의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며.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다.“(제3부 정리11의 주석 /황태연 번역)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나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때 이 규정에서 완전성의 결핍에서 완전성의 획득으로 이행하는 것도, 완전성의 상태에서 불완전성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변이하는 게 아니라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스피노자 철학의 긍정성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책을 읽어야 하는데 나의 손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읽기 싫은 것일까? 그렇게 이해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싶은 욕망보다는 텔레비전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크기 때문에 나의 신체가 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재성(reality)이란 곧 완전성이라고 말한다. 곤충이든 미생물이든 팔이 하나 없는 사람이든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맨 마지막에 나오는데 외부의 원인에 의하여 혼란스러운 인간들을 위해 참된 행복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이성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면 더없는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러한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몹시 험준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발견될 수는 있다. 진실로, 이와같이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곤란한 일임에 틀림없다. 만일 구원(행복)이 눈앞에 있어서 큰 노력 없이도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등한시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제5부 정리42의 주석 /황태연 번역)

#스피노자
#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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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뭐라고 - 강준만의 글쓰기 특강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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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첫 페이지에서 언급했듯이 글쓰기 책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책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물 한 바가지 보태기보다는 가뭄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물 한 바가지가 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판을 하였다고 한다.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특정 독자층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시사적 문제에 대한 논증형 글쓰기(주장과 근거로 이루어진 사설이나 칼럼 등과 같은 저널리즘 글쓰기) 공부를 하려는 대학생들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다. 결국, 이러한 글쓰기의 목적은 설득이다.

글쓰기가 귀찮은 나에게 가장 자극이 된 말은 “생각이 있어 쓰는 게 아니라 써야 생각한다.”라는 지적이다. “최상의 아이디어는 생각할 때가 아니라 글을 쓸 때 온다”고 롤프 도벨리가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 만큼 나를 채찍질하는 말도 없을 듯하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생각하기 싫어서 글을 안 쓰는 거 아니냐’ 라는 자책에 빠질지도 모른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초기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에게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는 가르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동자는 지시 사항을 이해하면 되지, 자기 생각을 밝히거나 발전시키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의 문해율은 1800년대까지 50%를 넘지 못했다. 긴 인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 코앞의 1960년까지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읽고 쓰기를 하지 못했다. 이런 역사를 고려한다면,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라는 구호에 빗대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글쓰기와 민주주의’ 얼핏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방위적으로 뻗어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내 생각과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글쓰기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게시판에 글 올리겠다’라는 말이 협박처럼 들리는 시대가 아니던가.

글쓰기는 연못에 돌을 던지는 것이다. 돌멩이는 크든 작든 파장을 일으킨다. 한 번의 출렁임으로 끝나는 파장일지라도 이 세상의 바닥에 돌멩이 하나는 남겨 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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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든 게이트 - 세기의 내부고발
글렌 그린월드 지음, 박수민.박산호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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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휴대전화를 감청할 수 있나 없나 하는 문제로 논쟁이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보 감시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처럼 정말 ‘No place to hide(숨을 곳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모든 비양심적인 권력은 대규모 감시의 유혹을 받는다. 모든 사례에서 목적은 같다. 반대자를 억누르고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권력에 순종하고 충실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권력자로부터 부정적인 관심을 끌 일을 하지 않는 착한 국민은 감시국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모든 사회가 마찬가지다.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억압적인 수단의 목표가 될 일이 거의 없다. 이런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회가 지닌 자유의 진정한 잣대는 충실한 지지자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아니라, 반대자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다루는가다. 세계 최악의 독재자라고 할지라도, 충실한 지지자들은 국가의 권력 남용에 손해를 입지 않는다.

전방위적인 국가 감시와 만연한 비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려야 한다.

감시를 감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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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아함경 - 재개정판
고익진 엮음 / 담마아카데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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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초기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아함경>을 읽게 되었다. <아함경>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은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고 분량도 방대하므로 이 한 권을 읽었다고 해서 <아함경> 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함경>에는 석가모니의 탄생부터 열반에 들기까지의 전 생애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어 49년간 세상에서 설법한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

<중아함경 제60권 221경>에는 유명한 독화살 비유가 나온다.
말룬카풋타 존자는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세간은 영원한가, 덧없는가,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있는가, 없는가, 사후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사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라는 이러한 견해들은 다 제쳐두신 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이 질문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물음이지만 지금까지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이 인간의 지적인 한계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세존께서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기에 이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말룬카풋타의 의도는 부처를 테스트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부처의 답을 들어보자.

먼저 비유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 때문에 매우 심한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이 그를 가엾이 생각하여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이 산뽕나무로 되어 있는지, 뽕나무나 물푸레나무로 되어 있는지, 뿔로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겠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생각만 하다가 목숨을 마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법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집기와 괴로움의 멸함과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한결같이 말한다. 이것이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마땅히 이렇게 지니고 배워야 한다.”

부처가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설파했다는 말들은 꽤 의미가 있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비유에서 부처는 삶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지식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고통의 주머니인데 그 고통은 외면한 채 왜 헛다리를 짚고 있냐고 질책하고 있다. 그 고통을 해결해야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이지 사후세계는 있는가, 우주는 영원한가 등의 질문은 우리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때 이러한 부처의 매력에 경도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질문은 정확하게 던지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기운이 빠지게 만든다. 답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도를 닦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니, 나같이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겐 절망이고 파국인 셈이다. 아마도 이게 어려우므로 사람들은 부처를 억지로 신으로 승격시켜서 불상 앞에서 108번, 3000번 절하면 고통에서 해방되고 사후세계도 보장받을 것이라 믿고 싶어졌을 것이다.

<아함경>은 초기 경전이라 그런지 허황하고 비현실적인 설화들이 남발되고 있어 중간중간 헛웃음 나오게 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함경>이후 경전들이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정제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내용과 개념들이 종교 경전 특유의 모호함으로 인해 마치 굉장한 깊이가 있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 근거는, 나는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되었든 너무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개념은 나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으며 결국은 불교를 이해하려면 그 뿌리가 되는 힌두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야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하바라따>를 책장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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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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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580쪽 정도 되는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유익하고 훌륭하다고 열을 내며 추천을 했다. 나도 그 기세에 취해 즉시 책 제목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다음 날 잠깐 확인 후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그 책을 기다리는 며칠은 기대감과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었다. 그리고 책이 도착하고 허겁지겁 포장지를 뜯어낸 후 덤비듯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의 스토리는 살짝 황당했지만 기대감이 남아있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절반까지 읽었을 때,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여기서 접어야 할까? 조금 더 가 볼까? 이 분기점에서 나는 그 지인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분이 추천했으니 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조금만 참고 더 가 보도록 하자. 그런 마음으로 계속 나아갔고 중간중간 새어 나오는 한숨을 연료 삼아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반전은 없었다는 그런 슬픈 사연만 남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놓친 걸까? 내 눈에는 왜 좋은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나를 탓했고, 다음에는 그 지인을 의심하고 탓했다. 모든 책이 내게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기대감이 커서인지 실망감도 정비례가 아닌 2배로 크게 느껴졌다. 새삼 상대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추천하는 건 나의 돈과 타인의 시간을 강탈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건 여전히 어렵다. 내가 직접 책을 펴서 살펴보지 않고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서평집이다. 내가 신뢰하는 작가의 서평집을 읽다 보면 그나마 대물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가 신뢰하는 작가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사람답게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늘 궁금한 사람 중에 한 분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이 아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에 끌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평은 본인이 읽은 책 중에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을 골라서 소개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에게는 좋은 책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개떡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과 관심사와 배움의 과정이 다르기에 한 권의 책에 대한 생각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름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강하게 추천하는 책을 기대하며 읽다가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를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순간적으로 추천한 사람을 원망하고 싶지만,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 줄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나와 인연이 아니라 여기고 책을 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별로다, 시시하다, 읽을 필요 없다`라고 평가하는 책들은 정말로 그럴 때가 많은 것 같다. 온라인 서점에서 감상평들을 살피다가 칭찬 일색의 글 중 가끔 별점이 하나짜리 평이 있는데 막상 그 책을 읽어보면 그 별 하나를 준 평이 정확하게 나의 감상과 맞아 떨어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래서 열 개의 칭찬보다 한 개의 비판적 평가가 더 유익하게 느껴진다.

직접 읽어보지 않고 타인의 평가를 잣대 삼아 책을 선택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지만, 너무도 많은 출판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나만의 방식으로 괜찮은 서적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다만 서평집이라는 형식으로 ’피도 살도 안 된다‘는 비판적인 내용으로만 채워진다면 독자들이 선입견을 형성하여 접근을 막을 우려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평집은 지금처럼 브로커요 매치메이커의 역할도 수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깝게 느낀 것은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서적 중 우리나라에서 출판이 안 된 것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것도 번역이 안 됐단 말이야? 하는 탄식을 여러 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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